|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
가지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물없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성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모공경 하지않고 땅에서 잘될 수 없습니다.
또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가난하게 생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것은 무엇보다 배고픔입니다.
그 때는 굶기를 먹듯 했으니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나는 어려서부터 정말 뼈저리게 경험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가난한 가정생활에 음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별로 없었고 토지가 없었던 탓에
우리 집에서는 마당에 가마니를 가지고 거기다가 고구마를 심어 재배했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면 가마니를 가르고 가마니에 담긴 고구마를 겨울양식으로 소중하게 사랑방
윗목에 관리하면서 하루에 몇 개씩 식사로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시장기를 느낀 나머지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사이에 고구마를 화로에 한 개를 구어
먹게 되었는데 한참 먹는데 어머니가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시면서 "하루 세끼 식사 외에 고구마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
거늘 어떻게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느냐"고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치셨습니다.
서러움과 아픔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지났는지
어머니가 깨우셔서 일어났는데 머리맡에는 고구마가 담긴 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잠든 아들을 내려다보신 어머니의 눈은 이미 젖어 있었고 어린 아들에게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먹여주면서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목이 메여 고구마를 삼키지 못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
사발을 건네 주셨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와 나는 수천 만 마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날의 기억은 오늘도 자꾸만 아픔과 그리움이 되어 지금에도 가슴의
강물이 되게 합니다.
고구마의 유래는 효행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일본 대마도에서 한 효자가 가뭄 때, 죽어 가는 어머니를 살리려고 먹을 것 찾다가 이상한
뿌리를 땅에서 캐 어머니에게 삶아드려 기운이 회복되었는데 그 뿌리를 '고코이모'(효행을
뜻하는 일본어)라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고구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에 의해 에스파냐로 전해졌고
그것은 다시 필리핀으로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으면서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어린 시절 기억 가운데 고구마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젖이 없어 동냥젖을 먹어야 했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아
밀기울에서 짜낸 것을 젖으로 대신했기에 체질이 지금도 그리 건강체질이 못됩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어느 날에는 잠든 내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에 잠은 깼지만 눈을 뜨지 못하고 어머니의 기도를 다
들으면서 베개가 젖었습니다.
당신의 옷고름으로 잠든 척 하는 아들의 눈물을 닦으시고 말없이 방을 나가시는 후에도
어머니의 따뜻함은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두 아들을 양육할 때 어떻게 하더라도
배고프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가난했던 전도사 시절, 아이들이 어릴 때 우유를 먹이고 싶었지만 시골교회를 담임했던
전도사에게는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골교회에서 도시교회로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인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두 아이는 지금 180Cm의 78 Kg의 건강한 아이들로 성장한
것을 볼 때마다 내 어린 날이 새삼 생각납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단 한번도 그리 가르친 적이 없는데 큰 아이는 목사
가정의 생활을 벌써 몸에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와 어느 날 전화에서 "아빠 내가 고기 먹고 싶어 형아 에게 고기 사 달라고 했는데
짜장면을 사 주면서 이 안에 고기 많으니 이것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고기 안 사준다."고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서러웠든지 그냥 전화통에 대놓고 작은 아이는 울어 버렸습니다.
아하 이것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큰 녀석을 일깨운 후 그 날로 생활비를 인상해
주었는데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깊이에서 흐르는 또 다른 강물이 됨을
경험했습니다.
작은 아이가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차 안에서 작은 아이 손을 꼭 잡고 "현아,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돈은 성도들이 헌금한 하나님의 돈이다. 근검 절약해야 한다."라고 하며 동생에게 일러
주는 큰 아니의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목사 가정의 생활이 몸에 익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7천여명에 이르는 하나님이 위임하신 포항중앙교회 하나님 자녀들의 영혼을
영적 기근과 기갈에 허덕이지 않도록 목사는 영적으로 더욱 넉넉함을 가져야함을
어버이 주일을 맞으면서 새삼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오늘도 목사는 목양의 세월을 엮어 갑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
(에베소서 6:1~3)
그물없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성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모공경 하지않고 땅에서 잘될 수 없습니다.
또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가난하게 생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것은 무엇보다 배고픔입니다.
그 때는 굶기를 먹듯 했으니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나는 어려서부터 정말 뼈저리게 경험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가난한 가정생활에 음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별로 없었고 토지가 없었던 탓에
우리 집에서는 마당에 가마니를 가지고 거기다가 고구마를 심어 재배했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면 가마니를 가르고 가마니에 담긴 고구마를 겨울양식으로 소중하게 사랑방
윗목에 관리하면서 하루에 몇 개씩 식사로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시장기를 느낀 나머지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사이에 고구마를 화로에 한 개를 구어
먹게 되었는데 한참 먹는데 어머니가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시면서 "하루 세끼 식사 외에 고구마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
거늘 어떻게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느냐"고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치셨습니다.
서러움과 아픔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지났는지
어머니가 깨우셔서 일어났는데 머리맡에는 고구마가 담긴 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잠든 아들을 내려다보신 어머니의 눈은 이미 젖어 있었고 어린 아들에게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먹여주면서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목이 메여 고구마를 삼키지 못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
사발을 건네 주셨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와 나는 수천 만 마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날의 기억은 오늘도 자꾸만 아픔과 그리움이 되어 지금에도 가슴의
강물이 되게 합니다.
고구마의 유래는 효행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일본 대마도에서 한 효자가 가뭄 때, 죽어 가는 어머니를 살리려고 먹을 것 찾다가 이상한
뿌리를 땅에서 캐 어머니에게 삶아드려 기운이 회복되었는데 그 뿌리를 '고코이모'(효행을
뜻하는 일본어)라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고구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에 의해 에스파냐로 전해졌고
그것은 다시 필리핀으로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으면서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어린 시절 기억 가운데 고구마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젖이 없어 동냥젖을 먹어야 했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아
밀기울에서 짜낸 것을 젖으로 대신했기에 체질이 지금도 그리 건강체질이 못됩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어느 날에는 잠든 내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에 잠은 깼지만 눈을 뜨지 못하고 어머니의 기도를 다
들으면서 베개가 젖었습니다.
당신의 옷고름으로 잠든 척 하는 아들의 눈물을 닦으시고 말없이 방을 나가시는 후에도
어머니의 따뜻함은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두 아들을 양육할 때 어떻게 하더라도
배고프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가난했던 전도사 시절, 아이들이 어릴 때 우유를 먹이고 싶었지만 시골교회를 담임했던
전도사에게는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골교회에서 도시교회로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인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두 아이는 지금 180Cm의 78 Kg의 건강한 아이들로 성장한
것을 볼 때마다 내 어린 날이 새삼 생각납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단 한번도 그리 가르친 적이 없는데 큰 아이는 목사
가정의 생활을 벌써 몸에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와 어느 날 전화에서 "아빠 내가 고기 먹고 싶어 형아 에게 고기 사 달라고 했는데
짜장면을 사 주면서 이 안에 고기 많으니 이것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고기 안 사준다."고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서러웠든지 그냥 전화통에 대놓고 작은 아이는 울어 버렸습니다.
아하 이것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큰 녀석을 일깨운 후 그 날로 생활비를 인상해
주었는데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깊이에서 흐르는 또 다른 강물이 됨을
경험했습니다.
작은 아이가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차 안에서 작은 아이 손을 꼭 잡고 "현아,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돈은 성도들이 헌금한 하나님의 돈이다. 근검 절약해야 한다."라고 하며 동생에게 일러
주는 큰 아니의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목사 가정의 생활이 몸에 익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7천여명에 이르는 하나님이 위임하신 포항중앙교회 하나님 자녀들의 영혼을
영적 기근과 기갈에 허덕이지 않도록 목사는 영적으로 더욱 넉넉함을 가져야함을
어버이 주일을 맞으면서 새삼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오늘도 목사는 목양의 세월을 엮어 갑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
(에베소서 6:1~3)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