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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6: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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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91115 |
설교보기 :https://youtu.be/GKMGLRJ3bs0
성경본문 : 마가복음 6:14-29
선지자 ‘너머’
막6:14-29, 성령강림 후 8주, 2024년 7월 14일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걸음은 세례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세례받는 사람은 회중 앞에서 다섯 항목의 질문을 받습니다. 둘째 항목은 이렇습니다. “(아무개)님은 악의 세력과 관계를 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자유를 누리길 원하십니까?” 세례는 악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겠다는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악과 관계가 없는 분이시고 그리스도 자신이니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네 복음서 모두 예수께서 세례받았다고 보도합니다. 예수께 세례를 베푼 이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운명에 상당하게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례로 교회의 세례 의식은 세례자 요한을 기원으로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누군지를 알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자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비슷한 구도로 보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 사가랴였습니다. 좋은 가문입니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 업무를 수행할 때 천사를 환상으로 보았는데, 그 천사는 사가랴의 집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게 된다는 말을 천사에게서 들은 겁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의 성 관계없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누가복음은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을 마리아의 친족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는 설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 아주 긴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이겠지요.
세례 요한의 공적 활동에 관해서 네 복음서가 각각 보도합니다. 당시 교회 구성원들이 세례 요한을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출가하여 요단강 서편 유대 광야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입니다. 이 메시지는 뒤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교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광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몰려온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온 이유는 그에게서 광야의 선지자라 할 엘리야 같은 카리스마가 넘쳐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노숙하면서 낙타 가죽옷을 걸쳤고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살았습니다. 함부로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까 모두 정신 차리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에 울림이 컸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가 머무는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일반 사람만이 아니라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고 일갈했습니다. 마 3:10절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세례 요한이 혁명을 일으킬 생각으로 민중을 선동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겁니다. 그럴 정도로 세례 요한의 대중적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당신인가?’라고(마 11:3)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요한에게 전하라.’라고 대답하신 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극찬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께서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그의 메시지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서 몇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한의 죽음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그 지역의 분봉왕인 헤롯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을 쳤습니다. 그 일이 본문에 아주 희화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헤롯은 자기 첫 부인과 이혼하고 이복동생 빌립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제수와 결혼한 겁니다. 왕궁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로 분주하기도 하고 공연히 말을 꺼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모른 척했으나 요한은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선지자이기도 했고, 헤롯도 어느 정도 양심은 살아있어서 그를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헤롯의 생일잔치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자 원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어머니에게 의견을 물은 헤로디아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자 헤롯은 그 자리에서 신하를 시켜서 요한을 참수하여 머리를 소반에 얹어 가져오게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요한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예수
세례 요한이 죽고 예수께서 활동을 본격 시작하자 헤롯만이 아니라 당시 여러 사람은 예수님을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인 막 6:15절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선지자라고 했고,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도 보았습니다. 마 16:13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모세오경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생각하면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지금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는 선지자에게서 일어날 만한 일들이 일어났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건 일단 이해가 됩니다. 세 명의 선지자가 거론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 기적 행위자로 유명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에 그들이 엘리야를 연상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 선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서 가장 정확하게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왕과 귀족들은 예레미야가 나라를 바벨론에 팔아넘기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냐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유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바벨론과 맞서다가 기원전 587년에 멸망합니다. 예루살렘은 초토화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선포를 예루살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외면했기에 예레미야와 비슷한 운명의 선지자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세례 요한과의 관계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기에 당연히 제2의 세례 요한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선지자라는 평가를 수용했다면 예수님 당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유대의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당할 때 예수께서는 반복해서 당신이 그리스도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자기들이 볼 때 예수는 선지자이기는 하나 그리스도, 즉 메시야일 수는 없었으니까요. 지금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라고 말합니다.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는 말이냐, 하고 반론을 펼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나요? 지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우리는 왜 여전히 불안하고 실수도 하고 온갖 불행한 일도 겪습니까? 사람들이 일정할 만한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구원의 현실(reality)이 없는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할 수 있나요?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자신이나 함께 나온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존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분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분이 자신을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말로는 인정하더라도 영혼의 깊이에서는 설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의 신앙생활에서는 영혼의 간절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계 3:14절 이하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 상태와 비슷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족할 게 하나도 없는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간절한 심정을 담아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생명과 구원의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긴밀하고 특별한 관계가 없는 신앙은 성립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지자인가요, 선지자 ‘너머’의 그리스도이신가요? 도대체 선지자와 선지자 ‘너머’에는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심판이냐 사랑이냐
유대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거기에 따른 윤리 도덕적인 변화를 외쳤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 앞에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많이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서 보듯이 실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변화와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선지자들은 인류 역사에 필요했습니다. 이런 선지자 덕분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개선됩니다. 예수님도 선지자들의 역사적 전통에 두 발을 딛고 있기는 하나 근본에서는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임박했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심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표면에 나타나는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를 불러옵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심판과 삶의 변화를 말씀하셨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역설적 표현입니다.
눅 15장에는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미리 상속받아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먼 지역으로 떠나서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 신세가 되어 오갈 데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아버지는 일단 둘째 아들을 나무라야 합니다. 성실하게 집안을 보살핀 첫째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마을 입구까지 달려가서 둘째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비유 마지막 절인 눅 15:32절에는 아버지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긴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나옵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에 우리가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은 왜 바리새인처럼 세련되게 살지 못했냐라고, 왜 존경받는 인물이 되지 못했냐라고 따져 묻지 않으시고 노숙자면 노숙자 그대로,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 자체로 인정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기는 노숙자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파렴치한 행위로 감옥에 갇힌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각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쉽게 판단합니다. 늘 시시비비를 따집니다. 가르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평가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느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공황장애에 떨어진 사람은 편안하게 숨을 쉬라고 해도 쉬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일에 속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살피지 않아도, 혹은 사람이 보살피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살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으니까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알았기에 예수께서는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었던 십자가의 운명까지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하게 순종하신 겁니다. 그 순종의 결과로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십자가 처형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죽는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았거나 미천하게 살았거나 죽음의 순간은 모두에게 똑같은 무게로 밀어닥칩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실제로 닥치기 전에도 이미 인간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죽음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평생에 걸쳐서 자기 죽음을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인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고전 15:20)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극복을 가리켜서 신약성경은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인기를 끌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예수님을 그냥 선지자로 여기고 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한 사람으로 살기 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너머’의 삶을 살았던 분, 즉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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