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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2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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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92268 |
http://dabia.net/xe/1092268
설교보기 : https://youtu.be/ydJ70coQbvs
성경본문 : 요한복음 6:24-35
생명의 양식
요6:24-35, 성령강림 후 11주, 2024년 8월 4일
예수는 누군가?
오늘 설교 본문에 따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에 갔다가,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우여곡절 끝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가운 마음으로 언제 이곳으로 오셨냐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듣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당신들이 찾아온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니까요. 이렇게 찾아오다니 반갑다거나 수고가 많았다든지, 무슨 급한 일이 있느냐 등등, 웬만하면 따뜻하게 사람들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어떤 사건에 관한 자초지종을 기자들이 보도 준칙에 맞춰서 전하듯이 일일이 보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이 어떤 시적 경험을 시(詩)라는 문학 장르로 묘사하듯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의 관심은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당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당연히 나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여러분에게 설명하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는 말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과 연결됩니다. 그 사건은 요 6:1-15절에 나오는 소위 ‘오병이어’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요 6:14-15절에 따르면 이런 놀라운 현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로 여겼고,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예수께서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합니다.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을 표적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이 표적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σημειον은 그리스어-영어사전에 miracle, sign으로 나옵니다. 루터 성경은 Zeichen(징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병이어는 한 가족의 한 끼 식사 분량에 불과한 빵과 생선을 떼어내면 다시 늘어나고, 또 떼어내면 다시 늘어나서 오천 명이나 배불리 먹었다는 마술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하나의 징표, 또는 표시입니다.
바울이 고전 1:22절에서 짚었듯이 유대인들은 본래 표적을 찾는 민족입니다. 세상을 고착된 질서로 보는 게 아니라 의외의 사건이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열린 질서로 본다는 점에서 표적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유전자 결정론을 따르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징표이나 표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벗어나서 초자연적 기적 자체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인생살이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잘 풀리기를 바라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기적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표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적적인 일들이 벌어져서 불치병도 낫고, 사업도 잘되고, 큰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초자연적 기적과 축복에 매달리는 게 과연 옳은 신앙인가요? 하나님의 표적과 징표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세상살이의 기준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표적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오병이어 기적으로 배불렀다는 사실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 이 영생의 양식은 (마지막 때 심판자로 올) 인자(예수)가 준다. 이 인자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 이어서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답변이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양식을 얻는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나요? 사람들이 다시 예수께 요구합니다. 자신들의 논리를 피력한 것입니다. 아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들었던 비판이겠지요. 제가 그들의 문제 제기를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여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한 표적으로 보여라. 우리 조상들은 광야 생활 중에 하늘에 내려온 만나를 먹었다. 당신도 이런 초자연적인 표적을 보이시라. 먹고 사는 문제, 그러니까 경제 문제를 화끈하게 해결해봐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인정하겠다.’
만나 이야기
이들의 문제 제기는 일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먹는 문제는 절대적입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면 죽습니다. 인류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줄달음쳤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릿고개 시절을 지나서 먹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초중고 학교 급식도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점심을 싸 오지 못한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교실 밖을 배회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세상은 평화로워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조짐입니다. 이러다가 중동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 건 아닐는지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렇게 오래 끌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우리나라 정치도 장난이 아닙니다. 마치 ‘제로-섬’ 게임을 하듯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들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몸부림을 치는 걸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이 조상들의 만나 사건을 거론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방향 착오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광야의 만나가 아닙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광야에서의 굶주림 문제가 해결되어도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지 못합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드러났으며,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드러났고,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만나는,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직전에 벌어진 오병이어 사건은 ‘썩을 양식’입니다. 배고플 때는 만나만으로 만족합니다. 조금 지나면 만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불만을 모세에게 반복해서 토로했습니다. 애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가끔 소고깃국이라도 먹으면서 지냈을 텐데, 지금 광야로 나와서 겨우 만나로만 입에 풀칠하게 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썩을 양식’이라고 해서 실제로 먹는 문제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은 소중합니다. 밥 먹기는 신앙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구원론적이면서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에 한 부분으로 성찬 예식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문제는 먹는 행위가 얼마나 거룩한지를 모른 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먹거나 더 자극적으로 먹는 데만 치우치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쓰양’ 사건을 알기 전에는 ‘먹방’ 유튜브가 그렇게 활성화되어 있는 줄을 저는 몰랐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쑤셔 넣었습니다. 몸집이 작은 여자분이 십 인분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 장면도 있더군요. 로마제국의 향락 문화가 한창이던 시절에 귀족들이 향연을 베푸는 방 옆에는 구토 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더는 먹지 못할 상태에 이르면 그 방에 가서 다 토해내고 다시 돌아와서 먹습니다. 저는 그런 행위를 하는 몇몇 이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문명과 문화에 휩쓸리면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그렇게 살아갑니다. 단지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재산 증식도 비슷합니다. 평생 굶지 않을만한 돈이 있어도 더 많이 채워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는 겁니다. 오늘의 자본주의 문명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자극합니다. ‘먹방’ 방식의 삶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찾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영생의 양식이라는 표현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저는 ‘대구성서아카데’ 사이트의 ‘매일묵상’ 메뉴에 ‘원당일기’를 다시 이어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하안거(여름 夏, 평안할 安, 있을 居)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불교 승려들이 음력으로 4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 석 달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재미없는 시간입니다. 지루하겠지요. 돈을 주면서 하안거에 들어가라고 해도 못 하겠지요. 하안거에 들어가려면 삶에 대한 태도가 근본에서 달라야 합니다.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깊이를 붙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숨쉬기, 중력 느끼기, 걷기, 죽비 소리 듣기, 새소리와 빗소리와 천둥소리 듣기, 밥 냄새 맡기, 구름과 달과 별과 나비와 벌 보기, 차 맛 느끼기 등등, 생명의 깊이를 실감할 줄 알면 세상 문명과 담을 쌓고 참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런 일에 매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사람의 삶은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영생의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부대끼는 현실의 삶에서 이런 생명의 깊이에 대한 인식과 경험과 감각을 붙들고 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밥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가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영생의 양식이라고 믿는지만을 설명하겠습니다. 영생의 양식은 오늘 설교 제목인 ‘생명의 양식’과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생명의 양식을 달라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γ? ε?μι ? ?ρτο? τ?? ζω??)라는 문장은 요한복음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고 에이미’(I am) 형식의 문장이 요한복음에 여럿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은 빵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르토스를 ‘떡’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밥’이 주식이니까 ‘예수는 생명의 밥입니다.’라고 번역하는 게 원문에 가장 가깝습니다. 어쨌든지 요한복음 공동체는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 믿는다고 실제로 밥이 나와요, 떡이 나와요, 술이 나와요, 돈이 나와요.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 문장 후반부 말씀을 먼저 생각해봅시다. 예수께 오는 이는 굶주리지 않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살았으나 여전히 굶주린 사람 같고 목마른 사람 같습니다. 영혼의 평화가 실현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도 우리 삶의 수준이 높은 것 같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싸우기도 많이 싸웁니다. 이미 생명의 양식으로 배부른 사람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일들이 개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예수께 오지 않았으며,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릴 뿐이지 모든 시간을 거의 세속적인 방식으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방식과 사유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도 명예욕과 돈 욕심이 많고,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작은 율법에 갇혀서 위선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실제 삶에 별로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라고, 그래서 그를 통해서 더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되었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이 충만하다고, 다른 것을 더 보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하안거에 들어간 승려들처럼 가장 심플하게 일상을 지내도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만끽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쉽지 않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직접 만난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뭔가 화끈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이 나타나야 했는데, 그게 없으니 ‘혹시나’ 하고 찾아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36절에서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이 혼란스러운 현실을 버티고 삽니다. 지금은 그 사실이, 밭에 묻힌 씨앗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언젠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39절과 40절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을 맞습니다. 지구에도 마지막 날이 있고, 우주 전체에도 빅뱅처럼 시작이 있었으니 마지막이 있을 겁니다. 그 마지막을 그리스도교는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우주 전체의 종말은 개인의 마지막 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 죽음입니다. 죽음은 너무 먼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른 척할 뿐이지 그 마지막 순간은 늘 우리 곁에 놓여 있습니다. 개인의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우리 각자를 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날에 우리는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부활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완전히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부활 생명의 순간을 우리는 기다리면서 삽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시 130:6) 그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살아있는 동안에도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실감합니다. 이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났기에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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