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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깊이

시편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2 추천 수 0 2024.12.07 18: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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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30: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92524 

jys.jpghttp://dabia.net/xe/1092524

설교보기 : https://youtu.be/fEtNegsM0IQ 
성경본문 : 시편 130:1-8 
영혼의 깊이
시130:1-8, 성령강림후 12주, 2024년 8월 11일
 
오늘 설교 본문 시편 130편에서 1절만 읽어도 그것을 쓴 그 시인의 영혼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사람은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부르짖는 모습을 가끔 영상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무차별 군사 공격을 받아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넋을 놓고 부르짖습니다. 거꾸로 작년 10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정권 하마스의 게릴라 공격을 받았을 때 죽은 이들의 가족도 부르짖었습니다. 10년 전 세월호 침몰에서 보았듯이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은 부르짖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르짖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안하고 달콤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우아하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고, 살려달라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깊은 곳
 
시인은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깊은 곳’은 어둠이고 혼돈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권력이나 명예나 돈이나 재미로도 저 ‘깊은 곳’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어둠과 혼돈은 3절이 말하는 죄악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곧 절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절망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를 단순히 도덕적인 잘못이라고만 보면 성경이 말하는 죄의 깊이를 모르는 겁니다. 죄는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근원적인 세력입니다. 우리는 그 세력을 극복할 능력이 없어서 부르짖을 뿐입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를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법 전문가인 판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피의자에게 10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법질서를 세워나가야만 세상은 무법천지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10년 선고를 받은 사람의 아내와 자녀들은 이 일로 인해서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법의 공정한 집행으로 인해서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까지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누가 책임집니까. 그렇다고 해서 법을 집행하지 않을 수도 없긴 합니다. 판사는 법조문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자기의 법 집행으로 인해서 벌어질 불행한 운명에 대해서 깊은 연민을 느낄 줄 알아야겠지요.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자기가 처한 실존이 ‘깊은 곳’이라는 사실을 뚫어볼 줄 알아야겠지요. 이런 문제를 종합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 사는 게 떳떳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있는지, 방향을 잡기가 힘듭니다. 어둠이자 혼란입니다.
 
법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자체가 사실은 늘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이중적이고 위선적입니다. 높은 수준에서 종교적인 사람들도 어떤 부분에서는 세속적입니다. 겉으로 착한 사람도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양심적이었으나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그런 실존을 성찰할 줄 아는 바리새인들은 절망합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 율법에 매달려서 살지만, 생명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쓴 시인이 ‘깊은 곳’이라고 말한 그 차원 안으로 우리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 삶에서 어둠과 혼돈은 더 짙어집니다. 이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명백한 실존입니다.
 
어둠과 혼돈이라는 인간 실존은 목회자와 교회 일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목회자로서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한계를 늘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대형 교회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수천 명 교인의 기대를 그가 어떻게 다 맞출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처럼 흉내를 내면서 설교합니다. 자신의 인격이 고상하지 않는데도 고상한 척 흉내를 내야 합니다.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교주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세뇌할 수만 있다면 자기 성찰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시인이 ‘깊은 곳’이라고 표현한 인간 실존의 어둠과 혼돈을 외면해도 됩니다. 영적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과 돈을 끌어모으고,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그렇게 교주처럼 행세한다고 해서 실제로 어둠과 혼돈이라 할 ‘깊은 곳’이 없어질까요? 자기의 눈을 잠시 가릴 뿐이지 사람은 살아있는 한 아무도 깊은 곳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3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우리의 영혼을 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위선과 교만을, 즉 어둡고 혼란스러운 그 인간 실존을 버텨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깊은 곳’이, 즉 부끄러움과 혼란스러움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니까요. 거꾸로 어둠과 혼란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여호와 앞에 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거울 앞에서 서지 않으면 자기 얼굴에 묻은 얼룩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가 사실은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이면서 인간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아직 확실하게 모르니까요. 동물은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기에 어둠이 없으나 인간은 그런 질문을 앞에 두고 살기에 어둠을 매 순간 경험합니다. 인간은 누군가요? 인간은 수십만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진화의 과정을 거쳤으나 인간만이 그들과 질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이게 생물학적 진화 원리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를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의 능력에서만 다른 길을 걸은 게 아니라 육체의 능력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 두 요소가 서로 결합해서 지금의 인간이 되었겠지요.
 
파리 올림픽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출전 선수들의 육체적 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 놀랍니다. 인간만이 육체 훈련을 통해서 높은 수준에 올라섭니다. 치타는 빠르게 달립니다. 그러나 어느 한 치타가 훈련을 통해서 다른 치타보다 더 빠르게 달리지는 못합니다. 침팬지는 아무리 가르쳐도 배드민턴을 못 합니다. 흉내를 낼지는 몰라도 다른 침팬지와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인간만은 육체 훈련을 통해서 월등한 기량을 보입니다. 왜 인간만 이렇게 독보적으로 진화의 길을 걸었을까요? 이런 진화가 결국 우리 스스로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지는 않을까요? 인간과 비슷한 외계 생명체가 우주 어딘가에 또 있을까요? 인간은 왜 죽을까요? 질문할 뿐이지 답을 얻지 못합니다.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는 시인의 외침은 우리 모두의 외침이자 절규입니다.
 
기다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시인의 절규가 무엇인지를 앞에서 확인했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운명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런 실존 자체를 외면하거나 그걸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찾아서 뛰어다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돈과 재미를 찾아서 뛰어다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인은 다릅니다. 그는 여호와를 기다립니다. 5절을 들어보십시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이어서 6절에서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린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이 어떤지는 분명합니다. 아침이 와야만 뜬눈으로 밤을 지키는 파수꾼의 임무가 끝납니다. 아침이 와야만 백성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이런 파수꾼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여호와를 기다리는 이유는 여호와만이 그 사람의 죄악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여호와께 ‘사유하심’이 있고, 7절에서 여호와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다고 말입니다. 여호와를 통해서만 시인이 ‘깊은 곳’이라고 표현한 어둠과 혼돈의 실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이 시인은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린다고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외칩니다. 이런 절박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도 있을까요?
 
사람들은 모두 기다림의 방식으로 인생을 삽니다. 기다리는 인생에 로드맵이 있습니다. 학교생활을 잘해서 좋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연봉 높은 직장과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재산을 늘려 멋진 인생을 사는 각각의 단계를 기다립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오랜 시간 훈련을 거치면서 올림픽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선수가 다음 올림픽을 기다릴 겁니다. 그런 기다림은 한편으로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하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삶을 과부하에 놓이게 합니다. 일상에 일방적으로 매달리게 합니다. 기다림이 성취되어도 실제로는 만족이 안 되니까 또 다른 것에 매달리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내 영혼이 주 여호와를 기다린다.’라고 했습니다. 주 여호와를 기다리는 건 영혼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을 정확하게 짚은 문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결혼 날을 기다리고 사업을 시작할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궁극적인 것을 기다립니다. 궁극적인 기다림은 영혼의 일입니다. 영혼의 깊이에서만 여호와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여호와를 기다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시인이 부르짖었듯이 죄악에서 벗어나는 때를 기다리는지를 말입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인생살이가 복잡해 죽겠는데 영혼의 깊이나 영혼의 기다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깊이는 억지로 느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의 깊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의 나그네가 있습니다. 각자 길을 갑니다. 한 사람은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는 것만 마음에 두고 걸어갑니다. 다른 것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걸으면서 구름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꽃과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듣습니다. 목적지에 얼마나 일찍 도착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나그네가 영혼의 깊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이 세운 기준에 매달려서 살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눈여겨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빠지지 않고 마치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이 등잔을 들고 밤새 동전을 찾는 심정으로(눅 15:8)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찾고 구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린다.’라고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해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까요? 여호와를 만나는 경험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경험으로 눈물까지 흘렸고 매일 기도하고 큐티를 한다고 합시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처럼 구원의 확신이 확실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왜 여전히 우리는 어둠과 혼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님 경험이 더 깊어지기는커녕 밋밋해지는 걸까요? 그래서 종교 열광주의자가 되든지 율법주의자가 되고 마는 걸까요? 왜 구원 독단론에 떨어지든지 냉소주의자가 되고 마는 걸까요? 한 마디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왜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점점 더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를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시인이 말하는 ‘깊은 곳’에서 벗어나서 여호와를 만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성과 자기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크고 작은 문제로 다툼이 종종 일어납니다.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차이를 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집에서는 문 여닫는 소리가 문제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여닫으라고 말하고 아내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어냐고 합니다. 화장실 슬리퍼 문제도 그렇습니다. 저는 나올 때 뒷걸음쳐서 슬리퍼를 들어가는 사람에게 편한 방향으로 놓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문을 나와서 다시 돌아서지 않은 채 문을 닫을 수 있어서 편합니다. 아내는 백번이면 백번 거꾸로 놓습니다. 이런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죽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차이와 갈등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소소한 문제야 어느 선에서 해결되기는 하나 심각한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전쟁이 왜 일어나나요. 이혼이 왜 일어나나요. 자살이 왜 일어나나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어둠과 혼란이라는 실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기 전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있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인격적인 죄와 인식론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죽음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겁니다. 이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가 육신이 된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생명이 곧 죽음 경험이자 생명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믿음과 현실> 105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숭고함과 은폐성은 예수의 역사적 운명 안에 있는 그의 계시를 통해서만 비로소 그 충만한 깊이가 전망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수도 많이 하고, 모르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불확실한 것도 많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말하는 ‘깊은 곳’의 어둠과 혼란이 예수 믿는 우리의 삶까지 실제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궁극적인 사태를 우리는 외면하지 말고 직면하면서 버텨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통해서 구원의 빛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미리 당겨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표면적인 인생살이에 머물지 않고 영혼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영혼의 깊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삶에서 가장 깊은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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