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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없습니까?
아모스 5:18~27
오늘 그리스도인이 회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질문을 싫어합니다. 권력화된 집단일수록 질문을 불온시하고 꺼립니다. 우습게도 그런 공동체에서는 질문하지 않는 사람을 귀감으로 여깁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 하면 ‘모범생’이라거나 ‘믿음이 좋다’고 칭찬합니다. 그렇다 보니 지도자 한 사람의 생각이 일이관지합니다. 자연히 다양성은 사라지고 역동성도 없습니다. 질문은 살아있는 자의 존재 증명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란 반듯한 질문과 책임있는 답변이 오고 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자유로운 인간관이 아닙니다. 스스로 질문 못 하는 일 역시 소아병적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감히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렘 12:1) 질문이 불경한 게 아니라 질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경이고 불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날’에 희망을 겁니다. 오늘의 세속 사회에서는 늘 정직한 자가 손해보고 사악한 자가 성공합니다. 악인이 득의의 미소를 머금고, 의인은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이악스럽고 발 빠른 자들이 정직한 노동의 대가를 훔쳐 가는 일이 예사롭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세속 사회가 정직한 삶을 배반하더라도 주님의 날이 이르면 억울함이 해결하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이기고 인생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인내하며 고단한 인생이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어지는 말씀 앞에서 당혹해집니다.
“너희는 망한다! 주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는 자들아, 왜 주님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5:18)
당혹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주님의 뜻을 역행했을까를 자문합니다. 질문은 하나님께도 가능하고, 스스로에게도 하여야 합니다.
2024. 12. 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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