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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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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 10:46-52
김재성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장애물 앞에서 더 큰 소리 지르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리고의 눈먼 사람이자 거지인 바디매오이다. 그는 거지들이 흔히 하는 대로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예수를 만나러 먼 길을 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분이 지나간다고 하니 그는 다시없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세운 다윗 왕과 같이 그들을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줄 메시아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최고의 존칭어로 예수를 높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가던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그를 꾸짖었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꼭 장애나 병이 있는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막는 이들이 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이 다 죽어간다고 하여 예수를 모시고 집으로 갈 때, 그 집에서 온 사람들이 도중에 예수를 못 가게 방해를 한다. 벌써 아이는 죽었고 가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이다(막 5:35). 예수가 그들의 말을 듣고 거기서 멈추어 섰더라면 살 수 있는 아이가 죽을 뻔 하였다. 바디매오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문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리를 지르는 것인데, 사람들은, 시끄럽다든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꾸짖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을 때도,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막 10:13).
우리는 흔히 이런 장애물이나 훼방꾼을 만나면 기가 죽는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로 목표를 세웠으면, 처음으로 할 일은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항상 문제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그때 십중팔구는 “아이구 잘못 왔구나”, “역시 나는 안 된다, 역부족이다” 하고 뒤로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거지 바디매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는 앞을 못 보는 거지였지만, 그런 장애물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는 뚝심과 꿋꿋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장애물 앞에서 주춤거리지 말고 더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한다. 악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방해를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주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외치는 소리가 예수의 귀에까지 들리게 만들어야 한다. 바디매오가 악을 쓰니까 예수께서 가다가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렇게 인상을 쓰던 훼방꾼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바꾸어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하였다. 누군지 몰라도 참 변덕스럽다. 그런 것이 세상 이치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그들 앞에서 바디매오는 마치 무슨 파렴치한 요구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옳고 바디매오는 비정상인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 굽히지 않고 자기 주장을 하니까, 이제는 바디매오가 주인공이고 그들은 엑스트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바디매오와 예수의 대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마치 용수철이 튀듯이 예수께로 갔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은 생명과 다름없는 귀한 것이다. 한 벌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지에게 겉옷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죽으러 가도 겉옷만은 잡고 가는 게 거지이고, 특히 거지에게 겉옷은 구걸을 할 때도 필수품이다. 누더기 같은 겉옷을 걸쳐야 동정심을 일으킬 수 있고, 집이 없이 살아가니, 동냥한 것을 겉옷의 여기저기에 넣고 다녀야 했다. 그런 그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그만큼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그런 그에게 예수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는다. 그저 이심전심으로 바디매오의 마음을 다 아시고 병을 고쳐주는 식으로 하시지 않는다. 꼭 그에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는 “낫고 싶으냐”고 물었다.
우리는 예수 앞에서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저 착하게 살고 예의 바르게 사는 훈련을 많이 받은 우리는 꼭 무슨 소원을 갖는 것보다는 겸손하게 그저 위에서 해 주는 대로 받고 사는 것이 미덕인 줄 안다. 하지만 예수 앞에서는 그런 것이 미덕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에 대답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만큼 삶이 치열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이 질문이다.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우리가 예수께 진정으로 무엇을 간절히 구하는지 한번 물어보자. 진정으로 우리는 구하는 것이 있는가. 진정으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있는가.
소원이 없는 사람처럼 공허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들을 길러보면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고 이루고 싶어 한다. 소원이 많다. 어릴 때는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친구네 집 같은 집, 그네 차 같은 차, 청소년이 되면 멋진 옷, 신발, 핸드폰 …… 갖고 싶은 것이 끝이 없다.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욕심도 많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귀엽고 그 소원을 들어주고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 더불어 사는 기쁨이기도 하다. 주님 앞에서 우리도 간절히 구하는 것이 있어야겠다. 소원이 있어야겠다.
바디매오는 분명히 바라는 것이 있었다. 너무나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이 순간을 너무나 기다렸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얼마나 보고 싶었겠는가. 얼마나 그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겠는가. 바디매오의 이 대답에서 우리는 진한 감동을 받는다. 그에겐 그렇게 간절하게 구할 것이 있었고, 예수께서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이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칭찬하였다. 바로 이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그를 고쳐주었으면서도, 자신이 고쳐주었다고 하지 않고 바디매오의 그 믿음 때문에 그가 고침을 받았다고 격려를 해 준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그의 믿음을 격려해 준 것이다.
우리는 바디매오를 눈먼 거지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기 쉽다. 마치 시끄럽다, 조용해라, 입 다물어라 하고 소리 지르고 꾸짖은 그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바디매오를 그저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는 바디매오는 진정한 믿음의 인물이었다. 눈은 못 보지만, 배운 것은 없지만, 그에게는 참 귀중한 것이 있다. 믿음이다. 간절히 눈을 뜨고 싶은 소망이다. 그것 하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 바치는 마음이 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천하를 얻은 듯이 기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귀한 사람이다. 우린 흔히 바디매오는 별 것도 아닌 거진데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고 높여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은 선입견이다. 그는 실제로 예수의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한 가지를 굳세게 바라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이것저것에 잡다한 관심을 가지면서 한 가지 일에 제대로 매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는 참 좋은 믿음의 모범이다.
난 바디매오를 보면서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된다.
군대에 가자마자 큰 사고가 나서 여러 사람이 죽고 부상당한 일이 있었을 때, 나는 앞으로 남은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때 너무나 놀란 가슴으로 그저 드린 기도는 “주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저 살아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 부모형제를 만나고 교회 형제자매들 만나고 싶습니다.” 이것뿐이었다. 난 그 기도를 너무나 간절히 드렸다. 새벽에도 밤에 보초를 서면서도 자기 전에도 작업 중에도 틈만 나면 기도를 했고 그 기도는 늘 간단했다. “저를 살려 주시기만 하면……”이었다. 그 기도가 씨가 되어서 신앙은 더욱 굳세어져 갔고, 건강하게 제대를 했을 뿐 아니라, 신학을 하게 되고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난 혹 생활 속에서 어떤 불평이나 불만을 느낄 때, 정 힘들면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내가 본래의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노력한다. 그때 그저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그 믿음만 가지면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의 믿음을 회복하려고 한다.
또 한 가지를 더 말하면, 대학생 때, 이성과의 사귐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방황도 많이 했는데, 어쩌다가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 사람하고 결혼할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시작한 것인데, 조금씩 가능성이 보이자, 정말 “이 사람하고 결혼시켜 주시기만 하면……” 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고 얼마 동안은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 낳고 고생하고 하면서 시달리다 보니까 그때 그 마음은 잊어버리고 가끔 이런 저런 불평 불만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때 난 또 자신에게 말한다. 그때 그저 내가 맘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았는가.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자신의 행복을 좀더 느끼지 못하는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소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것은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이루어진 것은 잊어버리고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욕심내고,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바디매오의 믿음은 무슨 화려한 믿음이 아니다. 무슨 고행을 거쳐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슨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 담백하고 우직하다. 그런 게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예수는 바디매오를 만나기 조금 전에, 바디매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한 적이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0:36) 그때 그들은,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는 장차 십자가의 수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제자라고 하면서 선생님의 뜻도 모르고 그들은 한심한 요구를 한 것이다. 다른 열 제자들은 그들에 대해서 분개하기까지 했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들의 그런 무지를 답답하게 여기면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였다. 그들의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우리는 그저 아무 소원이나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기독교의 복음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구하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는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 그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욕심나는 것은 많은 데 구할 방법은 없으니 주님께 와서 구하고 악을 쓰고 떼를 쓰면 언젠가는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믿는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전한다. 돈에 욕심이 많고 명예와 지위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바디매오가 구한 것과 다르다. 그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구한 것과 같다. 예수는 분명히 그런 요구를 거절하였다.
우리가 주님께 간절한 소원을 가져야 하고 믿음으로 구해야 하지만 그렇게 구한다고 해서 다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본주의적 욕심에서 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본의 논리로 구해야지 교회에서 믿음이라고 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적극적 사고는 자본이나 욕심을 추구하는 적극적 사고이지 믿음을 추구하는 사고가 아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비해서 세도 불어났고 수도 불어났고 부도 불어났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데서 전보다 높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썩을 대로 썩어 있고, 단군 이래 최고로 이기적으로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 가난한 사람은 서울에서 살 수도 없고, 잘 사는 사람도 어지간해서는 강남에서는 살 수 없다. 말로만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지 실제로는 시골 이전의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현상을 반성하기는커녕, 수입도 일정하지 않은 사람이 강남의 아파트를 수십 채를 갖고 있는가 하면, 서울과 분당 등에서는 아파트 반상회를 해서 집값을 높이기 위해 담합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요즘 인사 청문회다 뭐다 하면서 지도층 인사들의 재산이나 사생활이 공개가 되는데, 어쩌면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꼭 부동산 투기를 하고, 그래서인지 엄청난 부자이고, 꼭 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이중국적을 갖고 있거나 자식이 그렇고, 또는 꼭 자식이 군에 안 가거나, 비리에 연루되니 ……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물으신 물음 앞에 다시 한번 서 보아야겠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믿음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한 자리 차지하는 걸 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어떤 이들은 부동산투기로 불로소득을 얻기를, 어떤 사람은 미국 국적으로 영어를 잘해서 출세하기를, 어떤 사람은 군대를 면제받고 그 기회에 돈을 벌기를,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와 명예로 강남에서 자녀를 키우고,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되기를 구할 것이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 논리로, 또는 운이 좋아서, 또는 사기를 쳐서,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이 응답해주었다고 복을 받았다고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짓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거짓 ‘복음’이다.
우화의 교훈
우스개인지 우화인지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산신령을 만났는데 소원을 들어줄 터이니 세 가지를 대라고 했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큰 소시지를 하나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산신령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는 싱글벙글하며 소시지를 가지고 집으로 왔는데 아내는 우선은 반기다가 나중에 생각하더니 그래 소원을 말하려면 좀 거창한 걸 하지 겨우 이런 걸 했느냐고 그들 달달 볶기 시작했다. 화가 난 그는 “에이, 소시지가 저 조둥아리에나 붙었으면 좋겠네” 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제 난감한 그는 마지막 소원으로 그것이 떨어지게 해달라고 했다는 얘기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쯤으로 우스개로 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우스개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순박함보다는 계산과 탐욕에 익숙해서가 아닐까. 배고플 때 그저 소시지라도 실컷 먹었으면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바디매오가 눈을 떴으면 하는 마음 아니겠는가. 그런 순박한 마음으로 산다면 이 세상이 좀더 밝아질 텐데, 그런 걸 조롱하면서 욕심만 내고 들볶고 하니까 훨씬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이 세상이 이렇게 탐욕적으로 이기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예수 믿는 이들도 다 따라가야 하는가? 그러는 한 우리는 예수를 떠나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따라가면 반드시 돈에게 배반당하고 울 때가 올 것이다. 크리스챤은 오직 예수를 따라가야 한다. 바디매오는 눈을 뜬 다음에 예수를 따라갔다. 여기서 “따르다”(akoloutheo)는 말은 제자들에게나 쓰는 전문용어인데 바디매오에게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도 바디매오를 따라서, 오직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이 아니라, 바디매오의 소원 같은 그런 소박하고 간절한 소원을 갖고 오직 예수께 용수철이 튀듯 전폭적으로 우리를 맡기며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김재성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장애물 앞에서 더 큰 소리 지르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리고의 눈먼 사람이자 거지인 바디매오이다. 그는 거지들이 흔히 하는 대로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예수를 만나러 먼 길을 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분이 지나간다고 하니 그는 다시없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세운 다윗 왕과 같이 그들을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줄 메시아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최고의 존칭어로 예수를 높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가던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그를 꾸짖었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꼭 장애나 병이 있는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막는 이들이 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이 다 죽어간다고 하여 예수를 모시고 집으로 갈 때, 그 집에서 온 사람들이 도중에 예수를 못 가게 방해를 한다. 벌써 아이는 죽었고 가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이다(막 5:35). 예수가 그들의 말을 듣고 거기서 멈추어 섰더라면 살 수 있는 아이가 죽을 뻔 하였다. 바디매오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문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리를 지르는 것인데, 사람들은, 시끄럽다든가,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꾸짖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을 때도,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막 10:13).
우리는 흔히 이런 장애물이나 훼방꾼을 만나면 기가 죽는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로 목표를 세웠으면, 처음으로 할 일은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항상 문제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그때 십중팔구는 “아이구 잘못 왔구나”, “역시 나는 안 된다, 역부족이다” 하고 뒤로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거지 바디매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는 앞을 못 보는 거지였지만, 그런 장애물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는 뚝심과 꿋꿋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장애물 앞에서 주춤거리지 말고 더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한다. 악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방해를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주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외치는 소리가 예수의 귀에까지 들리게 만들어야 한다. 바디매오가 악을 쓰니까 예수께서 가다가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렇게 인상을 쓰던 훼방꾼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바꾸어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하였다. 누군지 몰라도 참 변덕스럽다. 그런 것이 세상 이치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그들 앞에서 바디매오는 마치 무슨 파렴치한 요구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옳고 바디매오는 비정상인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 굽히지 않고 자기 주장을 하니까, 이제는 바디매오가 주인공이고 그들은 엑스트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바디매오와 예수의 대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마치 용수철이 튀듯이 예수께로 갔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은 생명과 다름없는 귀한 것이다. 한 벌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지에게 겉옷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죽으러 가도 겉옷만은 잡고 가는 게 거지이고, 특히 거지에게 겉옷은 구걸을 할 때도 필수품이다. 누더기 같은 겉옷을 걸쳐야 동정심을 일으킬 수 있고, 집이 없이 살아가니, 동냥한 것을 겉옷의 여기저기에 넣고 다녀야 했다. 그런 그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그만큼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그런 그에게 예수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는다. 그저 이심전심으로 바디매오의 마음을 다 아시고 병을 고쳐주는 식으로 하시지 않는다. 꼭 그에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는 “낫고 싶으냐”고 물었다.
우리는 예수 앞에서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저 착하게 살고 예의 바르게 사는 훈련을 많이 받은 우리는 꼭 무슨 소원을 갖는 것보다는 겸손하게 그저 위에서 해 주는 대로 받고 사는 것이 미덕인 줄 안다. 하지만 예수 앞에서는 그런 것이 미덕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에 대답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만큼 삶이 치열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이 질문이다.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우리가 예수께 진정으로 무엇을 간절히 구하는지 한번 물어보자. 진정으로 우리는 구하는 것이 있는가. 진정으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있는가.
소원이 없는 사람처럼 공허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들을 길러보면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고 이루고 싶어 한다. 소원이 많다. 어릴 때는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친구네 집 같은 집, 그네 차 같은 차, 청소년이 되면 멋진 옷, 신발, 핸드폰 …… 갖고 싶은 것이 끝이 없다.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욕심도 많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귀엽고 그 소원을 들어주고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 더불어 사는 기쁨이기도 하다. 주님 앞에서 우리도 간절히 구하는 것이 있어야겠다. 소원이 있어야겠다.
바디매오는 분명히 바라는 것이 있었다. 너무나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이 순간을 너무나 기다렸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얼마나 보고 싶었겠는가. 얼마나 그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겠는가. 바디매오의 이 대답에서 우리는 진한 감동을 받는다. 그에겐 그렇게 간절하게 구할 것이 있었고, 예수께서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이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칭찬하였다. 바로 이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그를 고쳐주었으면서도, 자신이 고쳐주었다고 하지 않고 바디매오의 그 믿음 때문에 그가 고침을 받았다고 격려를 해 준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그의 믿음을 격려해 준 것이다.
우리는 바디매오를 눈먼 거지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기 쉽다. 마치 시끄럽다, 조용해라, 입 다물어라 하고 소리 지르고 꾸짖은 그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바디매오를 그저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는 바디매오는 진정한 믿음의 인물이었다. 눈은 못 보지만, 배운 것은 없지만, 그에게는 참 귀중한 것이 있다. 믿음이다. 간절히 눈을 뜨고 싶은 소망이다. 그것 하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 바치는 마음이 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천하를 얻은 듯이 기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귀한 사람이다. 우린 흔히 바디매오는 별 것도 아닌 거진데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고 높여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은 선입견이다. 그는 실제로 예수의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한 가지를 굳세게 바라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이것저것에 잡다한 관심을 가지면서 한 가지 일에 제대로 매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는 참 좋은 믿음의 모범이다.
난 바디매오를 보면서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된다.
군대에 가자마자 큰 사고가 나서 여러 사람이 죽고 부상당한 일이 있었을 때, 나는 앞으로 남은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때 너무나 놀란 가슴으로 그저 드린 기도는 “주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저 살아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 부모형제를 만나고 교회 형제자매들 만나고 싶습니다.” 이것뿐이었다. 난 그 기도를 너무나 간절히 드렸다. 새벽에도 밤에 보초를 서면서도 자기 전에도 작업 중에도 틈만 나면 기도를 했고 그 기도는 늘 간단했다. “저를 살려 주시기만 하면……”이었다. 그 기도가 씨가 되어서 신앙은 더욱 굳세어져 갔고, 건강하게 제대를 했을 뿐 아니라, 신학을 하게 되고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난 혹 생활 속에서 어떤 불평이나 불만을 느낄 때, 정 힘들면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내가 본래의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노력한다. 그때 그저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그 믿음만 가지면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의 믿음을 회복하려고 한다.
또 한 가지를 더 말하면, 대학생 때, 이성과의 사귐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방황도 많이 했는데, 어쩌다가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 사람하고 결혼할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시작한 것인데, 조금씩 가능성이 보이자, 정말 “이 사람하고 결혼시켜 주시기만 하면……” 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고 얼마 동안은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 낳고 고생하고 하면서 시달리다 보니까 그때 그 마음은 잊어버리고 가끔 이런 저런 불평 불만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때 난 또 자신에게 말한다. 그때 그저 내가 맘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았는가.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자신의 행복을 좀더 느끼지 못하는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소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것은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이루어진 것은 잊어버리고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욕심내고,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바디매오의 믿음은 무슨 화려한 믿음이 아니다. 무슨 고행을 거쳐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슨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 담백하고 우직하다. 그런 게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예수는 바디매오를 만나기 조금 전에, 바디매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한 적이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0:36) 그때 그들은,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는 장차 십자가의 수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제자라고 하면서 선생님의 뜻도 모르고 그들은 한심한 요구를 한 것이다. 다른 열 제자들은 그들에 대해서 분개하기까지 했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들의 그런 무지를 답답하게 여기면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였다. 그들의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우리는 그저 아무 소원이나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기독교의 복음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구하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는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 그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욕심나는 것은 많은 데 구할 방법은 없으니 주님께 와서 구하고 악을 쓰고 떼를 쓰면 언젠가는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믿는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전한다. 돈에 욕심이 많고 명예와 지위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바디매오가 구한 것과 다르다. 그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구한 것과 같다. 예수는 분명히 그런 요구를 거절하였다.
우리가 주님께 간절한 소원을 가져야 하고 믿음으로 구해야 하지만 그렇게 구한다고 해서 다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본주의적 욕심에서 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본의 논리로 구해야지 교회에서 믿음이라고 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적극적 사고는 자본이나 욕심을 추구하는 적극적 사고이지 믿음을 추구하는 사고가 아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비해서 세도 불어났고 수도 불어났고 부도 불어났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데서 전보다 높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썩을 대로 썩어 있고, 단군 이래 최고로 이기적으로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 가난한 사람은 서울에서 살 수도 없고, 잘 사는 사람도 어지간해서는 강남에서는 살 수 없다. 말로만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지 실제로는 시골 이전의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현상을 반성하기는커녕, 수입도 일정하지 않은 사람이 강남의 아파트를 수십 채를 갖고 있는가 하면, 서울과 분당 등에서는 아파트 반상회를 해서 집값을 높이기 위해 담합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요즘 인사 청문회다 뭐다 하면서 지도층 인사들의 재산이나 사생활이 공개가 되는데, 어쩌면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꼭 부동산 투기를 하고, 그래서인지 엄청난 부자이고, 꼭 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이중국적을 갖고 있거나 자식이 그렇고, 또는 꼭 자식이 군에 안 가거나, 비리에 연루되니 ……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물으신 물음 앞에 다시 한번 서 보아야겠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믿음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한 자리 차지하는 걸 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어떤 이들은 부동산투기로 불로소득을 얻기를, 어떤 사람은 미국 국적으로 영어를 잘해서 출세하기를, 어떤 사람은 군대를 면제받고 그 기회에 돈을 벌기를,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와 명예로 강남에서 자녀를 키우고,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되기를 구할 것이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 논리로, 또는 운이 좋아서, 또는 사기를 쳐서,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이 응답해주었다고 복을 받았다고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짓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거짓 ‘복음’이다.
우화의 교훈
우스개인지 우화인지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산신령을 만났는데 소원을 들어줄 터이니 세 가지를 대라고 했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큰 소시지를 하나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산신령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는 싱글벙글하며 소시지를 가지고 집으로 왔는데 아내는 우선은 반기다가 나중에 생각하더니 그래 소원을 말하려면 좀 거창한 걸 하지 겨우 이런 걸 했느냐고 그들 달달 볶기 시작했다. 화가 난 그는 “에이, 소시지가 저 조둥아리에나 붙었으면 좋겠네” 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제 난감한 그는 마지막 소원으로 그것이 떨어지게 해달라고 했다는 얘기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쯤으로 우스개로 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우스개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순박함보다는 계산과 탐욕에 익숙해서가 아닐까. 배고플 때 그저 소시지라도 실컷 먹었으면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바디매오가 눈을 떴으면 하는 마음 아니겠는가. 그런 순박한 마음으로 산다면 이 세상이 좀더 밝아질 텐데, 그런 걸 조롱하면서 욕심만 내고 들볶고 하니까 훨씬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이 세상이 이렇게 탐욕적으로 이기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예수 믿는 이들도 다 따라가야 하는가? 그러는 한 우리는 예수를 떠나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따라가면 반드시 돈에게 배반당하고 울 때가 올 것이다. 크리스챤은 오직 예수를 따라가야 한다. 바디매오는 눈을 뜬 다음에 예수를 따라갔다. 여기서 “따르다”(akoloutheo)는 말은 제자들에게나 쓰는 전문용어인데 바디매오에게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도 바디매오를 따라서, 오직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소원이 아니라, 바디매오의 소원 같은 그런 소박하고 간절한 소원을 갖고 오직 예수께 용수철이 튀듯 전폭적으로 우리를 맡기며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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