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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출처/ http://www.hani.co.kr/section-001003000/2002/10/001003000200210221822700.html
피그말리온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자기가 만든 상(像)에 반한 조각가이다. 이 신화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자신의 염원과 객관적 현실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이른바 ‘자기이행적 예언’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전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피그말리온이 되기 쉽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한국 사회는 현재 의식의 전환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전환시대엔 온갖 모순이 춤을 춘다. 민주주의적 질서와 가치를 요구하고 향유하면서도 민주주의를 강간한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권위주의를 청산하자고 핏대를 올리면서도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사람은 ‘불안하고 무게가 없다’고 욕한다.
이러한 모순은 ‘개인’과 ‘집단’ 사이의 방황에서 비롯한다. 오랜 세월 집단주의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은 이제서야 ‘개인’을 회복해가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과도기적 상황의 개인주의엔 ‘객관’과 ‘연관’과 ‘일관’이 없다. 모든 걸 자기 위주로, 파편화된 인식구조로, 지속성이 없는 감성만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런 한국인들에게도 만인이 합의하는 공감대는 있다. 그건 바로 ‘이대론 도저히 안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념과 지역과 성별과 세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공감대다.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최병렬 한나라당 의원같은 정치인마저도 “우리나라는 진짜 한번 들었다 놓을 정도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한국인들이 변화를 염원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피그말리온처럼 각자 자기가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있으며, 그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곧 변화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조각상은 사람이 아니라 반감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일 수도 있다.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있지만 불안정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이 두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대선을 결정한다. 이들은 ‘대세 추종’이라고 하는 습속을 완강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주류 언론’의 선전과 선동에 취약하다. 대한민국 선거사에서 지금처럼 주류 언론이 한마음 한뜻으로 특정 후보를 밀고 특정 후보를 죽이려 든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우리는 주류 언론이 써주는 각본대로 나타나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일희일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민주당 일각의 행태가 가관이다. 앞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좀더 지켜본 뒤에 무슨 결단을 내리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거울에 비친 더러운 자기 얼굴을 보고 실망하고선 한시간 후에 다시 거울을 보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세수를 하고 깨끗하게 단장하고나서 거울 앞에 서야지 더러운 얼굴을 더욱 더럽게 만들면서 자꾸 거울만 보면 어쩌자는 건가
주류 언론이 저지르고 있는 사실상의 여론 조작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다. 그들이 왜곡과 과장을 많이 저지르고 있기는 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얼굴을 조금 뒤틀려 보이게 만들 수는 있을 망정, 깨끗하게 세수한 얼굴마저 더럽게 보이게 만드는 데엔 한계가 있다.
과오를 범한 게 있으면 과오를 사과하고 이유를 규명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을 납득시켜야 한다. ‘진흙탕 개싸움’을 벌여봐야 이길 수도 없고 이긴다 해도 본전이다. 객관과 연관과 일관을 잃고 방황하는 피그말리온들의 ‘이미지 사고’에 정면 대응하는 길은 지금이 전환시대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뿐이다. 답은 간단하다. 기존의 틀과 판을 거부하는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어떤 후보와 정당에게 더 진실성이 있는가 대선은 그런 경쟁이 되어야 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피그말리온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자기가 만든 상(像)에 반한 조각가이다. 이 신화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자신의 염원과 객관적 현실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이른바 ‘자기이행적 예언’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전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피그말리온이 되기 쉽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한국 사회는 현재 의식의 전환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전환시대엔 온갖 모순이 춤을 춘다. 민주주의적 질서와 가치를 요구하고 향유하면서도 민주주의를 강간한 박정희를 그리워한다. 권위주의를 청산하자고 핏대를 올리면서도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사람은 ‘불안하고 무게가 없다’고 욕한다.
이러한 모순은 ‘개인’과 ‘집단’ 사이의 방황에서 비롯한다. 오랜 세월 집단주의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은 이제서야 ‘개인’을 회복해가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과도기적 상황의 개인주의엔 ‘객관’과 ‘연관’과 ‘일관’이 없다. 모든 걸 자기 위주로, 파편화된 인식구조로, 지속성이 없는 감성만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런 한국인들에게도 만인이 합의하는 공감대는 있다. 그건 바로 ‘이대론 도저히 안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념과 지역과 성별과 세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공감대다.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최병렬 한나라당 의원같은 정치인마저도 “우리나라는 진짜 한번 들었다 놓을 정도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한국인들이 변화를 염원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피그말리온처럼 각자 자기가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있으며, 그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곧 변화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조각상은 사람이 아니라 반감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일 수도 있다.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있지만 불안정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이 두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대선을 결정한다. 이들은 ‘대세 추종’이라고 하는 습속을 완강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주류 언론’의 선전과 선동에 취약하다. 대한민국 선거사에서 지금처럼 주류 언론이 한마음 한뜻으로 특정 후보를 밀고 특정 후보를 죽이려 든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우리는 주류 언론이 써주는 각본대로 나타나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일희일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민주당 일각의 행태가 가관이다. 앞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좀더 지켜본 뒤에 무슨 결단을 내리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거울에 비친 더러운 자기 얼굴을 보고 실망하고선 한시간 후에 다시 거울을 보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세수를 하고 깨끗하게 단장하고나서 거울 앞에 서야지 더러운 얼굴을 더욱 더럽게 만들면서 자꾸 거울만 보면 어쩌자는 건가
주류 언론이 저지르고 있는 사실상의 여론 조작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다. 그들이 왜곡과 과장을 많이 저지르고 있기는 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얼굴을 조금 뒤틀려 보이게 만들 수는 있을 망정, 깨끗하게 세수한 얼굴마저 더럽게 보이게 만드는 데엔 한계가 있다.
과오를 범한 게 있으면 과오를 사과하고 이유를 규명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을 납득시켜야 한다. ‘진흙탕 개싸움’을 벌여봐야 이길 수도 없고 이긴다 해도 본전이다. 객관과 연관과 일관을 잃고 방황하는 피그말리온들의 ‘이미지 사고’에 정면 대응하는 길은 지금이 전환시대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뿐이다. 답은 간단하다. 기존의 틀과 판을 거부하는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어떤 후보와 정당에게 더 진실성이 있는가 대선은 그런 경쟁이 되어야 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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