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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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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쓰다는 것은... 나의 꿈이자 부담감으로 내 삶의 한부분에 자리매김 되어 있다. 비단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글 쓰기를 희망하지만 그 방법이나 정신을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 글을 올려본다.
월간지 '복음과 상황'의 주요 논객이며 내가 참 좋아하는 필자이다. 내가 고민하고 있고, 추구하고 있는 글쓰기의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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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의 글쓰기 자세와 연습에 관하여 - 박총]
하나, 자판에 손을 얹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것들에 관하여
1. 위대한 삶에서 위대한 글이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하라
먼저 좋은 글이 나오려면 삶이 그러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나무에 그 열매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삶과 글이 따로국밥이지만, 위대한 글은 위대한 삶에서 나온다고 한 톨스토이의 말처럼 삶과 글은 그대로 포개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나의 사랑이 더 가열치지고, 그윽해지고, 살뜰해질수록 내 글도 그만큼 사랑스러워졌음을 고백한다. 이를 위해 각별히 글쓰는 이는 이원론적인 생활을 타파하고 일상을 말씀으로 녹여 내며 살아야 한다. 교계에 영화든 소설이든 제대로 된 서사(敍事, narrative)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은 바로 말씀을 삶으로 녹여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애 하나는 업고 애 하나는 걸리며 양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달동네를 오르는 애기 엄마의 고생을 체휼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2.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글을 쓰라
성경만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하나님의 입김이 서린 글을 쓰기를 구하며 자판에 손을 얹었다. 성령은 나의 지식, 경험, 어휘, 문체는 물론 기질, 습관, 즐겨 쓰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전인적으로 감수하시기에 내 글에는 개성이 잘 드러난다. 그분은 까마득한 날에 읽었던 문장을 불러오시고, 무심결에 지나친 풀꽃을 내 글 속에 피워내셔서 메마른 글을 기름지게 하신다. 어떤 단어도 여하한 표현도 성에 차지 않아 답답해할 때 더도 덜도 아닌 ‘낱말’로 글 길을 시원스레 틔워 주신다.
3. 교회의 수준에 맞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라
“어차피 교인들이 읽을 건데…” “은혜로 받아들이겠지.”하면서 긴장감 없이 대충 쓴다면 그것은 교회, 즉 주님의 몸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교회가 읽는 것이니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열과 성을 다해 써야 하지 않겠는가. 지적․문학적 천박성을 드러내는 글은 음악성 없는 CCM과 작품성 없는 기독교 영화처럼 따돌림을 받는다.
4. 지성과 감성이 아우러진 글쓰기가 요구된다
그동안 지적인 글쓰기가 대세였다면 이제는 지성과 감성이 아우러진 글쓰기가 일어나야 한다. 균형 잡힌 기독인이라면 문화현상을 관통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을 통찰할 수 있는 눈과, 냉이 꽃같이 ‘지극히 작은 것’의 새뜻함을 볼 수 있는 눈을 더불어야 한다고 본다. 21세기의 지도력은 온갖 신간사와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꿰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잎새 한 잎 떠나보내는 나무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다. 예수님처럼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이가 되어서, 자연에 대한 새뜻함을 새록새록 샘솟게 하는 글, 쳇바퀴 같은 일상을 꼭 껴안게 하는 글, 늘 그 자리에 있던 사물을 새로이 느끼게 하는 글, 감성의 습도를 넉넉히 휴지시켜 주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둘, 구양수의 삼다를 내 방식으로 소화해 내기
글 쓰는 연습에 관한 한 아직도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의 삼다(三多)가 가장 유효하다고 믿는다. 많이 읽고(다독), 많이 쓰고(다작), 많이 생각하는 것(다상량)은 글 쓰는 이가 지고 가야 할 평생의 일과일 것이다. 개인적 경험으로도 생활 속의 글쓰기만큼 내 펜을 날카로우면서도 따스하게 갈아 준 것은 없었다고 본다.
1. 다독(多讀)
(1) ‘한 책’ 성경에 대한 천착하라
일전에 문학평론가 김미현 님은 남진우 시인의 근작「타오르는 책」에 대한 서평을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모든 시인은 ‘책중의 책’, ‘단 한 권의 책’을 꿈꾸죠. 그러나 보르헤스가 알려주듯이 그런 ‘원본’은 없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것은 각주나 부록일 뿐이니까요. 책에서 다른 책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본’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단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그 책보다는 갖은 각주를 더 열심히 보면서 글을 쓰려고 했던 점을 반성한다. 말씀은 우리가 쓴 글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깊이 새기도록 하자.
(2) 폭넓은 독서를 하라
지면 관계상 독서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①자신의 전공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할 수 있는 한 폭넓은 분야의 책을 읽도록 하자. ②폭넓은 독서와 동시에 고전 및 고전급 저서에 매달리는 것 역시 요구된다. 신앙의 위인들은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을 크게 쳤다. 아더 핑크는 “한두 명의 저자에게 보내는 시간을 다른 20-30명의 자자보다 50-60배 많이 하라”고 했다.
③칼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을 알기에 애써야 한다. 조선일보나 CNN처럼 돈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언론보다 오마이뉴스나 Z처럼 비교적 양심적이고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가 더 바른 소리를 낼 것이다. ④모든 책을 정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서평을 이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대로 쓰인 서평은 지성계의 흐름을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좋은 책을 구분할 수 있게 돕는다. ⑤특히 김훈, 고종석 같은 훌륭한 문장을 즐겨 읽음으로 정갈한 문장을 몸에 배게 해야 한다.
2. 다상량(多商量)
(1) 기독교 마인드 (Christian Mind)를 구축하라
무조건 많이 생각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바르게 생각해야 바른 글이 나오는 만큼 기독교 세계관을 삶으로 습득하고 재생산해야 한다. 더불어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생각이 깊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 특히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들과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는 것은 나를 부쩍 크게 해준다는 걸 체험할 수 있다.
(2)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설계하라
인간의 반성성(反省性)은 학문하는 바탕이요, 종교의 기초이며, 글쓰기의 토대이다. 조용한 시간 속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 삶을 돌아본 흔적인 일기와 회개 기도와 편지를 생활화하라. 이는 삶을 반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좋은 글감이 된다.
(3) 일상 속에서 시인의 눈을 품고 삶을 깊이 관찰하라
시인이란 것이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라면 기독교인은 모두 시인이 될 필요가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책 읽기, 친구와의 만남, 공원 산책하기, TV보기, 채팅하기, 문제 메시지 보내기, 길가의 풀 관찰하기, 지나가는 사람 보기, 차 마시며 추억에 젖기 등 삶의 전 영역은 모두 ‘글거리’가 된다.
3. 다작(多作)
(1) 꾸준히 글 쓰는 훈련을 하라
매일 써 보라. 먼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으로 소화하여 풀어내거나 중요한 구절을 정리하면서 주석을 다는 것은 좋은 글쓰기 훈련뿐만 아니라 글감이나 글의 자료로서도 활용 가치가 있다. 일기를 매일 쓰는 것도 대단히 좋은 연습이 된다. 주보나 소식지나 홈페이지 등 기회가 닿는 대로 자청하여 글을 써 보라. “복음과 상황” “좌변기”홈페이지처럼 글과 논리에 뛰어난 논객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에 자주 글을 올리는 것은 좋은 실전 기회를 제공한다.
(2) 글을 살찌우는 훈련을 하라
글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문장서전, 속담사전, 역순사전, 분류사전, 동의어사전, 비속어사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평론가 유종호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용사 하나에서 우주의 차이를 느끼는 섬세한 글이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3) 글을 빚어 나가는 훈련을 하라
한번에 글의 끝을 보려고 하지 말고 오래 묵혀 가면서 글을 발효시켜 나가라. 단, 글을 빚어 가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것은 처음 글을 썼을 때의 각오가 누수되기 쉽다는 것이다. 입버릇처럼 은혜니, 사랑이나 하는 습성은 버리고 낱말 하나를 쓸 때에도 피 한 방울, 최소한 땀 한 방울 흘리는 고통을 걸어야 한다.
셋, 맺고 나가며
필자에게 있어 글쓰기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키에르케고르가 시인을 파라리스의 소에 비유한 것이다. 파라리스는 고대 시켈리아의 참주인데 청동의 암소 콧구멍에 피리를 붙이고, 소의 몸 안에 죄수를 넣어서 밖에서 불로 태워 그들이 발하는 비명이 피리를 통해 음악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기뻐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시인이 불행한 인간임을 말하려 이런 비유를 들었지만, 이 비유는 글쓴이가 자신의 절규와 눈물을 글로 승화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글 쓰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작업이기도 하지만 글 쓰는 이로 부름 받은 자는 일단 써라. 글 쓰는 것은 최초의 글쟁이이자 최고의 자자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월간지 '복음과 상황'의 주요 논객이며 내가 참 좋아하는 필자이다. 내가 고민하고 있고, 추구하고 있는 글쓰기의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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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의 글쓰기 자세와 연습에 관하여 - 박총]
하나, 자판에 손을 얹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것들에 관하여
1. 위대한 삶에서 위대한 글이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하라
먼저 좋은 글이 나오려면 삶이 그러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나무에 그 열매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삶과 글이 따로국밥이지만, 위대한 글은 위대한 삶에서 나온다고 한 톨스토이의 말처럼 삶과 글은 그대로 포개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나의 사랑이 더 가열치지고, 그윽해지고, 살뜰해질수록 내 글도 그만큼 사랑스러워졌음을 고백한다. 이를 위해 각별히 글쓰는 이는 이원론적인 생활을 타파하고 일상을 말씀으로 녹여 내며 살아야 한다. 교계에 영화든 소설이든 제대로 된 서사(敍事, narrative)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은 바로 말씀을 삶으로 녹여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애 하나는 업고 애 하나는 걸리며 양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달동네를 오르는 애기 엄마의 고생을 체휼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2.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글을 쓰라
성경만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하나님의 입김이 서린 글을 쓰기를 구하며 자판에 손을 얹었다. 성령은 나의 지식, 경험, 어휘, 문체는 물론 기질, 습관, 즐겨 쓰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전인적으로 감수하시기에 내 글에는 개성이 잘 드러난다. 그분은 까마득한 날에 읽었던 문장을 불러오시고, 무심결에 지나친 풀꽃을 내 글 속에 피워내셔서 메마른 글을 기름지게 하신다. 어떤 단어도 여하한 표현도 성에 차지 않아 답답해할 때 더도 덜도 아닌 ‘낱말’로 글 길을 시원스레 틔워 주신다.
3. 교회의 수준에 맞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라
“어차피 교인들이 읽을 건데…” “은혜로 받아들이겠지.”하면서 긴장감 없이 대충 쓴다면 그것은 교회, 즉 주님의 몸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교회가 읽는 것이니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열과 성을 다해 써야 하지 않겠는가. 지적․문학적 천박성을 드러내는 글은 음악성 없는 CCM과 작품성 없는 기독교 영화처럼 따돌림을 받는다.
4. 지성과 감성이 아우러진 글쓰기가 요구된다
그동안 지적인 글쓰기가 대세였다면 이제는 지성과 감성이 아우러진 글쓰기가 일어나야 한다. 균형 잡힌 기독인이라면 문화현상을 관통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을 통찰할 수 있는 눈과, 냉이 꽃같이 ‘지극히 작은 것’의 새뜻함을 볼 수 있는 눈을 더불어야 한다고 본다. 21세기의 지도력은 온갖 신간사와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꿰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잎새 한 잎 떠나보내는 나무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다. 예수님처럼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이가 되어서, 자연에 대한 새뜻함을 새록새록 샘솟게 하는 글, 쳇바퀴 같은 일상을 꼭 껴안게 하는 글, 늘 그 자리에 있던 사물을 새로이 느끼게 하는 글, 감성의 습도를 넉넉히 휴지시켜 주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둘, 구양수의 삼다를 내 방식으로 소화해 내기
글 쓰는 연습에 관한 한 아직도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의 삼다(三多)가 가장 유효하다고 믿는다. 많이 읽고(다독), 많이 쓰고(다작), 많이 생각하는 것(다상량)은 글 쓰는 이가 지고 가야 할 평생의 일과일 것이다. 개인적 경험으로도 생활 속의 글쓰기만큼 내 펜을 날카로우면서도 따스하게 갈아 준 것은 없었다고 본다.
1. 다독(多讀)
(1) ‘한 책’ 성경에 대한 천착하라
일전에 문학평론가 김미현 님은 남진우 시인의 근작「타오르는 책」에 대한 서평을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모든 시인은 ‘책중의 책’, ‘단 한 권의 책’을 꿈꾸죠. 그러나 보르헤스가 알려주듯이 그런 ‘원본’은 없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것은 각주나 부록일 뿐이니까요. 책에서 다른 책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본’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단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그 책보다는 갖은 각주를 더 열심히 보면서 글을 쓰려고 했던 점을 반성한다. 말씀은 우리가 쓴 글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깊이 새기도록 하자.
(2) 폭넓은 독서를 하라
지면 관계상 독서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①자신의 전공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할 수 있는 한 폭넓은 분야의 책을 읽도록 하자. ②폭넓은 독서와 동시에 고전 및 고전급 저서에 매달리는 것 역시 요구된다. 신앙의 위인들은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을 크게 쳤다. 아더 핑크는 “한두 명의 저자에게 보내는 시간을 다른 20-30명의 자자보다 50-60배 많이 하라”고 했다.
③칼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을 알기에 애써야 한다. 조선일보나 CNN처럼 돈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언론보다 오마이뉴스나 Z처럼 비교적 양심적이고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가 더 바른 소리를 낼 것이다. ④모든 책을 정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서평을 이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대로 쓰인 서평은 지성계의 흐름을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좋은 책을 구분할 수 있게 돕는다. ⑤특히 김훈, 고종석 같은 훌륭한 문장을 즐겨 읽음으로 정갈한 문장을 몸에 배게 해야 한다.
2. 다상량(多商量)
(1) 기독교 마인드 (Christian Mind)를 구축하라
무조건 많이 생각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바르게 생각해야 바른 글이 나오는 만큼 기독교 세계관을 삶으로 습득하고 재생산해야 한다. 더불어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생각이 깊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 특히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들과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는 것은 나를 부쩍 크게 해준다는 걸 체험할 수 있다.
(2)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설계하라
인간의 반성성(反省性)은 학문하는 바탕이요, 종교의 기초이며, 글쓰기의 토대이다. 조용한 시간 속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 삶을 돌아본 흔적인 일기와 회개 기도와 편지를 생활화하라. 이는 삶을 반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좋은 글감이 된다.
(3) 일상 속에서 시인의 눈을 품고 삶을 깊이 관찰하라
시인이란 것이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라면 기독교인은 모두 시인이 될 필요가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책 읽기, 친구와의 만남, 공원 산책하기, TV보기, 채팅하기, 문제 메시지 보내기, 길가의 풀 관찰하기, 지나가는 사람 보기, 차 마시며 추억에 젖기 등 삶의 전 영역은 모두 ‘글거리’가 된다.
3. 다작(多作)
(1) 꾸준히 글 쓰는 훈련을 하라
매일 써 보라. 먼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으로 소화하여 풀어내거나 중요한 구절을 정리하면서 주석을 다는 것은 좋은 글쓰기 훈련뿐만 아니라 글감이나 글의 자료로서도 활용 가치가 있다. 일기를 매일 쓰는 것도 대단히 좋은 연습이 된다. 주보나 소식지나 홈페이지 등 기회가 닿는 대로 자청하여 글을 써 보라. “복음과 상황” “좌변기”홈페이지처럼 글과 논리에 뛰어난 논객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에 자주 글을 올리는 것은 좋은 실전 기회를 제공한다.
(2) 글을 살찌우는 훈련을 하라
글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문장서전, 속담사전, 역순사전, 분류사전, 동의어사전, 비속어사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평론가 유종호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용사 하나에서 우주의 차이를 느끼는 섬세한 글이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3) 글을 빚어 나가는 훈련을 하라
한번에 글의 끝을 보려고 하지 말고 오래 묵혀 가면서 글을 발효시켜 나가라. 단, 글을 빚어 가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것은 처음 글을 썼을 때의 각오가 누수되기 쉽다는 것이다. 입버릇처럼 은혜니, 사랑이나 하는 습성은 버리고 낱말 하나를 쓸 때에도 피 한 방울, 최소한 땀 한 방울 흘리는 고통을 걸어야 한다.
셋, 맺고 나가며
필자에게 있어 글쓰기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키에르케고르가 시인을 파라리스의 소에 비유한 것이다. 파라리스는 고대 시켈리아의 참주인데 청동의 암소 콧구멍에 피리를 붙이고, 소의 몸 안에 죄수를 넣어서 밖에서 불로 태워 그들이 발하는 비명이 피리를 통해 음악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기뻐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시인이 불행한 인간임을 말하려 이런 비유를 들었지만, 이 비유는 글쓴이가 자신의 절규와 눈물을 글로 승화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글 쓰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작업이기도 하지만 글 쓰는 이로 부름 받은 자는 일단 써라. 글 쓰는 것은 최초의 글쟁이이자 최고의 자자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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