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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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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통계보고
내가 여러 교회 주보를 보면서 이상히 여기는 점이 한가지 있다. 바로 구역보고 난에 있는 '지난 주에 읽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 분량이 자그마치 500-100장은 기본, 1,500-2,500장이 넘을 때도 있다. 구역 예배를 드리는 인원은 기껏 4-5명 선이다. 한 두 명은 한 주 동안 거의 성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 실제로는 한 두 명이 2,000장을 읽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 사람 당 성경 전체를 읽었다는 놀라운 결과다. 분량을 늘려서 거짓 보고를 했던지, 아니면 대단한 속독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지구상의 어떤 교회가 한국 교회보다 성경을 많이 읽을까? 목회자는 성경 읽기를 역설한다. 성도는 성경 읽기가 영적 성숙과 축복에 이르는 길로 생각하고 열성을 다한다. 그것도 모자라 성경 전체를 옮겨 적기까지 한다. 성경 읽기 테이프(최근에는 빠른 성경 테이프로 업그레이드 됨)가 나와서 마음만 먹으면 자동차 안에서든, 침대에 누워서든 성경을 들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 읽기를 금지옥엽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과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성경을 읽는 우리 마음가짐과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닐까? 나는 절대로 그렇다고 확신한다. 종교개혁이나 경건 운동에서 보듯이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바르게 성경을 읽었을 때에는, 반드시 교회 갱신과 도덕 재무장이 따랐기 때문이다. 먼저 흔히 범하는 잘못된 성경 읽기 두 가지만 지적한다.
무조건 많이 읽기(多讀)
많이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해하고 적용할 수만 있다면 많을 수록 좋다. 그러나 사람의 지적 용량은 제한적이므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설사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할지라도 의지로는 다 행할 수 없다. 우리의 전인(全人)이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성경을 읽으면, 지적 포만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앎과 실천간의 간극이 생겨서 지적으로는 거인이 될지 모르지만, 행함으로는 난쟁이가 된다.
진리는 양이 아니라 질(質), 이론 뿐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말씀은 무조건 많이, 빨리 입력될 것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아주 분명하게 마음 판에 각인되어야 한다. 관찰, 묵상, 관상 등을 통해 ‘내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실 때, 조금씩 장시간에 걸쳐서 주셨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설교하셨다(이해하지 못하면 해석해 주셨다). 진리란 마구잡이 식으로 쑤셔 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만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성경을 반추할 시간이 없이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것은 마치 진수성찬이
차려진 상에 앉아서 눈요기만 할 뿐 한 입도 먹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Gen Gier, The Reflective Life, p. 87).
이런 이유로 나는 성경을 수 십 독했다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똑 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새벽 기도 때, 성경 한 장씩만을 4년째 강해한다. 지금은 그것도 많아서 단락별로 강해한다. 영적 생활의 모든 부분의 그렇듯, 읽은 성경의 숫자가 축복이나 영적 성숙의 지표는 아니다. 한국 교회의 성경 읽기는 그 넓이가 수천 킬로인데 깊이는 단 몇 센티가 못되는 것은 아닐까?
찍어 읽기(占讀 또는 点讀)
이것은 다른 말로 '성경 제비뽑기'(sortes biblicae)라고도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성경을 펼치고 제일 먼저 나오는 부분을 하나님의 해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집중적으로(뷔페식처럼) 읽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점 궤를 얻어내듯 읽기 때문에 점독(占讀), 무작위로 찍어 읽기 때문에 점독(占讀), 편향된 자기 신학이나 취향에 맞는 일부분만(예를 들면 시편만, 복음서만) 골라 읽기 때문에 편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점독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성경에 대해 굉장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사실은 미신적이고 그릇된 행동으로서, 성경의 가치를 요서(妖書)나 비서(秘書)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이것은 기독교를 마법이나 요술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찍어낸 성경 한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얻으려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문맥과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크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지성을 감출 것이 아니라 더 크게 개방시켜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그럼 바른 성경 읽기는 무엇인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나는 사도행전(17:11)에 나오는 뵈레아 사람들이 보여준 성경 읽기 태도가 가장 간명하고도 옳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신사적으로
뵈레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었다. 말끔한 정장과 세련된 매너를 갖춘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편견이 없는 공평한 판단의 소유자였다. 아집과 독선에 포로가 되지 않는 자유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설교와 논증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었다.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사고 체계의 아성에 갇혀서 성경 앞에 자기 존재를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이 말은 아무런 해석상의 원리를 전제하지 않는다거나, 지적 활동과 판단을 중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라면 내 관념과 생각, 지적 체계, 교회의 전통, 심지어 지금껏 구축한 신학이론과 교리까지도 회의하고 던져 버릴 수 있는 자세를 말한다. 사회 복음주의자든, 근본주의자든 나름대로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진리라면 그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절대 필요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그분의 음성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단순한 지적활동 이상의 존재심연의 에너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문자를 너머, 또는 문자행간에서 말을 걸어오시는 성령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디모데서에 나오는 바, 성령의 감동(딤후 3:16) 이라는 말은 성령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의 거칠고(선지서처럼), 자애로운(복음서처럼) 숨결을 들을 수 있으려면 간절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말은(벧후 1:20-21) 이성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는 그 무엇(성령의 조명)을 전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객관적 지식탐구의 정신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성경학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다.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 내 개인의 믿음의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똑같은 롬 13:13-14이 어거스틴에게는 방탕의 종지부호가 되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못한다.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성경의 단순함은 '심오함'으로 다가온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며"(잠 8:17).
날마다
베뢰아 사람들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매일 성경을 읽고 탐구했다. 영적 성숙은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급조된 영성은 사이비 영성으로 의심해도 된다. 성숙된 신앙인격은 UPS 처럼 빨리 배달되지 않는다. 즉물성(卽物性)은 우리 시대의 저주다. 소량이라도 매일 성경을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요구된다. 성령은 우리의 게으름이 아닌 매일 매일의 부지런함을 통해 일하신다.
질문을 던지며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했다.' 즉 탐구했다. 이 말은 헤롯이 예수님을 (눅 23:14-15)을 심문하고, 의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취조하고(행 4:9) 벨릭스가 바울을 재판할 때(행 24:8) 사용된 법률 용어다. 베뢰아인은 법관이 법조항을 대조해서 살피듯이 성경을 연구했다. 그들은 바울 논증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성경을 '이 잡듯이 공부했다.' 그들은 교리의 주입(무비판적 수용을 요구하는 폭군 같은 가르침)을 거부했다. 성경은 신적인 산물일 뿐만 아니라 질문과 연구를 통해서 신적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이다.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의 일과 탐구자로서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탐구적 성경 읽기는 유대교에서도 장려됐다. 유대교는 모든 것을 성경으로 검토해 보고 스승의 가르침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을 고상하게 여겼다. 헬라 철학자들도 주의 깊게 경청하는 자들을 칭찬했다.
"참된 종교의 특징은 그것이 상세한 조사를 받으며 그것의 주장이
그렇게 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Bengel, Gnomon of the N. T.vol. Ⅱ. p. 325).
탐구는 독서와 공부 그 이상이다. 탐구란 자세히 조사하고, 생각하고, 관심을 집중시켜 상관관계를 살피는 과정이다. 기억하고, 묵상하고, 질문하고, 들추고, 파고, 추측하고, 시험해 보아야 한다. 1) 이 구절이 나에게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2) 이 구절이 나에게 사람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3) 모든 것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삶에 관하여 무엇을 보여 주려고 말하는가? 최소한 이런 질문이라도 던지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읽는데서(read) 나아가 공부하고(study) 탐구하라(explore)! 성경 읽기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당 못할 만큼 어렵지도 않다.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쉽다. 주님의 멍에는 무엇이든 쉬우므로. 그리고 성경 읽기 작업은 영화롭기까지 하다.
"일을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우리들)의 영화니라"(잠 25:2).
내가 여러 교회 주보를 보면서 이상히 여기는 점이 한가지 있다. 바로 구역보고 난에 있는 '지난 주에 읽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 분량이 자그마치 500-100장은 기본, 1,500-2,500장이 넘을 때도 있다. 구역 예배를 드리는 인원은 기껏 4-5명 선이다. 한 두 명은 한 주 동안 거의 성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 실제로는 한 두 명이 2,000장을 읽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 사람 당 성경 전체를 읽었다는 놀라운 결과다. 분량을 늘려서 거짓 보고를 했던지, 아니면 대단한 속독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지구상의 어떤 교회가 한국 교회보다 성경을 많이 읽을까? 목회자는 성경 읽기를 역설한다. 성도는 성경 읽기가 영적 성숙과 축복에 이르는 길로 생각하고 열성을 다한다. 그것도 모자라 성경 전체를 옮겨 적기까지 한다. 성경 읽기 테이프(최근에는 빠른 성경 테이프로 업그레이드 됨)가 나와서 마음만 먹으면 자동차 안에서든, 침대에 누워서든 성경을 들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 읽기를 금지옥엽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과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성경을 읽는 우리 마음가짐과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닐까? 나는 절대로 그렇다고 확신한다. 종교개혁이나 경건 운동에서 보듯이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바르게 성경을 읽었을 때에는, 반드시 교회 갱신과 도덕 재무장이 따랐기 때문이다. 먼저 흔히 범하는 잘못된 성경 읽기 두 가지만 지적한다.
무조건 많이 읽기(多讀)
많이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해하고 적용할 수만 있다면 많을 수록 좋다. 그러나 사람의 지적 용량은 제한적이므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설사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할지라도 의지로는 다 행할 수 없다. 우리의 전인(全人)이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성경을 읽으면, 지적 포만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앎과 실천간의 간극이 생겨서 지적으로는 거인이 될지 모르지만, 행함으로는 난쟁이가 된다.
진리는 양이 아니라 질(質), 이론 뿐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말씀은 무조건 많이, 빨리 입력될 것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아주 분명하게 마음 판에 각인되어야 한다. 관찰, 묵상, 관상 등을 통해 ‘내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실 때, 조금씩 장시간에 걸쳐서 주셨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설교하셨다(이해하지 못하면 해석해 주셨다). 진리란 마구잡이 식으로 쑤셔 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만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성경을 반추할 시간이 없이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것은 마치 진수성찬이
차려진 상에 앉아서 눈요기만 할 뿐 한 입도 먹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Gen Gier, The Reflective Life, p. 87).
이런 이유로 나는 성경을 수 십 독했다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똑 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새벽 기도 때, 성경 한 장씩만을 4년째 강해한다. 지금은 그것도 많아서 단락별로 강해한다. 영적 생활의 모든 부분의 그렇듯, 읽은 성경의 숫자가 축복이나 영적 성숙의 지표는 아니다. 한국 교회의 성경 읽기는 그 넓이가 수천 킬로인데 깊이는 단 몇 센티가 못되는 것은 아닐까?
찍어 읽기(占讀 또는 点讀)
이것은 다른 말로 '성경 제비뽑기'(sortes biblicae)라고도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성경을 펼치고 제일 먼저 나오는 부분을 하나님의 해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집중적으로(뷔페식처럼) 읽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점 궤를 얻어내듯 읽기 때문에 점독(占讀), 무작위로 찍어 읽기 때문에 점독(占讀), 편향된 자기 신학이나 취향에 맞는 일부분만(예를 들면 시편만, 복음서만) 골라 읽기 때문에 편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점독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성경에 대해 굉장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사실은 미신적이고 그릇된 행동으로서, 성경의 가치를 요서(妖書)나 비서(秘書)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이것은 기독교를 마법이나 요술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찍어낸 성경 한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얻으려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문맥과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크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지성을 감출 것이 아니라 더 크게 개방시켜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그럼 바른 성경 읽기는 무엇인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나는 사도행전(17:11)에 나오는 뵈레아 사람들이 보여준 성경 읽기 태도가 가장 간명하고도 옳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신사적으로
뵈레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었다. 말끔한 정장과 세련된 매너를 갖춘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편견이 없는 공평한 판단의 소유자였다. 아집과 독선에 포로가 되지 않는 자유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설교와 논증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었다.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사고 체계의 아성에 갇혀서 성경 앞에 자기 존재를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이 말은 아무런 해석상의 원리를 전제하지 않는다거나, 지적 활동과 판단을 중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라면 내 관념과 생각, 지적 체계, 교회의 전통, 심지어 지금껏 구축한 신학이론과 교리까지도 회의하고 던져 버릴 수 있는 자세를 말한다. 사회 복음주의자든, 근본주의자든 나름대로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진리라면 그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절대 필요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그분의 음성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단순한 지적활동 이상의 존재심연의 에너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문자를 너머, 또는 문자행간에서 말을 걸어오시는 성령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디모데서에 나오는 바, 성령의 감동(딤후 3:16) 이라는 말은 성령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의 거칠고(선지서처럼), 자애로운(복음서처럼) 숨결을 들을 수 있으려면 간절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말은(벧후 1:20-21) 이성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는 그 무엇(성령의 조명)을 전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객관적 지식탐구의 정신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성경학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다.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 내 개인의 믿음의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똑같은 롬 13:13-14이 어거스틴에게는 방탕의 종지부호가 되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못한다.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성경의 단순함은 '심오함'으로 다가온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며"(잠 8:17).
날마다
베뢰아 사람들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매일 성경을 읽고 탐구했다. 영적 성숙은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급조된 영성은 사이비 영성으로 의심해도 된다. 성숙된 신앙인격은 UPS 처럼 빨리 배달되지 않는다. 즉물성(卽物性)은 우리 시대의 저주다. 소량이라도 매일 성경을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요구된다. 성령은 우리의 게으름이 아닌 매일 매일의 부지런함을 통해 일하신다.
질문을 던지며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했다.' 즉 탐구했다. 이 말은 헤롯이 예수님을 (눅 23:14-15)을 심문하고, 의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취조하고(행 4:9) 벨릭스가 바울을 재판할 때(행 24:8) 사용된 법률 용어다. 베뢰아인은 법관이 법조항을 대조해서 살피듯이 성경을 연구했다. 그들은 바울 논증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성경을 '이 잡듯이 공부했다.' 그들은 교리의 주입(무비판적 수용을 요구하는 폭군 같은 가르침)을 거부했다. 성경은 신적인 산물일 뿐만 아니라 질문과 연구를 통해서 신적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이다.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의 일과 탐구자로서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탐구적 성경 읽기는 유대교에서도 장려됐다. 유대교는 모든 것을 성경으로 검토해 보고 스승의 가르침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을 고상하게 여겼다. 헬라 철학자들도 주의 깊게 경청하는 자들을 칭찬했다.
"참된 종교의 특징은 그것이 상세한 조사를 받으며 그것의 주장이
그렇게 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Bengel, Gnomon of the N. T.vol. Ⅱ. p. 325).
탐구는 독서와 공부 그 이상이다. 탐구란 자세히 조사하고, 생각하고, 관심을 집중시켜 상관관계를 살피는 과정이다. 기억하고, 묵상하고, 질문하고, 들추고, 파고, 추측하고, 시험해 보아야 한다. 1) 이 구절이 나에게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2) 이 구절이 나에게 사람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3) 모든 것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삶에 관하여 무엇을 보여 주려고 말하는가? 최소한 이런 질문이라도 던지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읽는데서(read) 나아가 공부하고(study) 탐구하라(explore)! 성경 읽기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당 못할 만큼 어렵지도 않다.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쉽다. 주님의 멍에는 무엇이든 쉬우므로. 그리고 성경 읽기 작업은 영화롭기까지 하다.
"일을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우리들)의 영화니라"(잠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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