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
2003/1/28(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1) 인터넷 게시판은 독자논객들의 양성소
인터넷 정치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 정치는 오로지 한국적인 실험이며, 한국의 실험이 곧 세계의 표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의 네티즌 유권자들은 최소한 인터넷 정치에 관한 한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의 가능성은 오로지 이곳, 한국에서 발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화의 과정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필자는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유감스런 것은 정작 인터넷 정치를 알아야 할 정치인들이나 정치학자들이 이러한 변화 자체를 아직 느끼지 조차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터넷 정치의 진화에 핵심은 게시판 문화다. 물론 새로운 시각의 인터넷 매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기도 했지만, 단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질 수 있었던 기반은 전적으로 게시판 문화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이버 공간의 게시판 문화는 PC통신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열한 실전을 거듭하며 인터넷 논객은 강철로 단련된다
PC통신시절에도 사이버상에서 이름난 논객들이 양산됐고, 자체 게시판에서 치열한 토론이 오가기도 했으나 지금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지금 인터넷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적하듯 ‘젊은 그들’만의 소수자 문화였다는 점이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다. 처음에는 삶 주변의 일상에 관한 짧은 글들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감상만 해도 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쓰고 싶은 사람만 쓴다. 특정한 주제에 논쟁이 벌어질 때 참여하기도 하고, 남의 글에 공감하는 글을 쓰기도 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글쓰기에 익숙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게시판부터 시작할 필요도 없다. 취미나 나이, 학력, 지역 등 온갖 종류를 주제로 한 소규모 게시판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조차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계기는 무궁무진하다. 인터넷 정치가 활성화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소규모 게시판의 자연스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능력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닫힌 마음을 열린 마음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도 했다. 글을 써보고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진보를 향한 첫걸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PC통신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약하나마 토론훈련이 된 일상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새로운 인터넷 매체의 등장을 통해 한 단계 걸러진 내용이 아닌 원재료 그대로의 정치적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은 일반적인 토론을 정치적인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통령선거였고, 노풍(盧風)의 등장이었다. 노풍은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정치의 토양 속에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을 열망하는 욕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익명성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게시판문화가 참여정치공간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한 인식이나 숙고는 너무나 부족한 상태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터넷 정치공간이 다른 무엇보다도 익명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인터넷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꼽고 있는 익명성이야말로 실은 한국의 인터넷 정치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왜 익명성이 원동력인가. 익명성은 참여를 위한 절대적인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익명이기 때문에 어떠한 의견의 개진도 가능하고, 익명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으며, 익명이기 때문에 거리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익명이기 때문에 어떠한 정보의 공개에도 겁낼 필요가 없으며, 익명이기 때문에 검열프리(free)가 가능하다. 특히나 정치적 담론에 관한 한 익명성이 갖는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훨씬 크다.
필요하면 자유롭게 바꿔 쓸 수 있는 아이디(ID)란 신분증만으로도 얼마든지 활동이 가능한 장소, 그것이 인터넷 공간을 참여정치의 공간으로 진화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익명과 익명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담론이 창출되는 현장에서 이들은 일상이 정치로 변모하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정치에 재미를 느끼고, 일상이 곧 정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한국의 인터넷 정치의 밑바탕인 네티즌은 지구상에서 전혀 새로운 참여민주주의 혁명을 선도하는 실천자로 진화하고 있다.
실명제를 도입하는 정치게시판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실명화 자체가 곧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욕구의 배출구요 해우소로서 익명성이 갖는 폐해는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인격모독이라든지, 명예훼손 등 익명성의 역기능은 실정법만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합의에 의한 규제와 퇴출의 메커니즘 확립이지, 실명제에 의한 차단이 아니다. 게시판 글의 마이너스 점수제 도입 등 합의를 통한 규제 시스템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 네티즌들에게 익명성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익명성을 통해 폭로되는 가짜 권위의 주체들만이 이를 두려워할 뿐이다.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은 사실 인터넷의 익명성을 기반으로 확립된 것이다. 지난 한해동안 이미 정치참여공간으로서의 인터넷은 싹을 틔웠고, 무럭무럭 자랐다. 첫 과일을 수확할 시기는 내년 총선이다. 한번 싹을 틔운 인터넷 정치공간이 불과 1년 사이에 숨가쁜 진화를 거듭해 왔듯이 앞으로 1년여 동안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인터넷 정치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것이란 점이며, 이제 단순히 인터넷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인터넷(열린 공간)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1) 인터넷 게시판은 독자논객들의 양성소
인터넷 정치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 정치는 오로지 한국적인 실험이며, 한국의 실험이 곧 세계의 표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의 네티즌 유권자들은 최소한 인터넷 정치에 관한 한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의 가능성은 오로지 이곳, 한국에서 발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화의 과정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필자는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유감스런 것은 정작 인터넷 정치를 알아야 할 정치인들이나 정치학자들이 이러한 변화 자체를 아직 느끼지 조차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터넷 정치의 진화에 핵심은 게시판 문화다. 물론 새로운 시각의 인터넷 매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기도 했지만, 단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질 수 있었던 기반은 전적으로 게시판 문화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이버 공간의 게시판 문화는 PC통신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열한 실전을 거듭하며 인터넷 논객은 강철로 단련된다
PC통신시절에도 사이버상에서 이름난 논객들이 양산됐고, 자체 게시판에서 치열한 토론이 오가기도 했으나 지금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지금 인터넷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적하듯 ‘젊은 그들’만의 소수자 문화였다는 점이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다. 처음에는 삶 주변의 일상에 관한 짧은 글들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감상만 해도 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쓰고 싶은 사람만 쓴다. 특정한 주제에 논쟁이 벌어질 때 참여하기도 하고, 남의 글에 공감하는 글을 쓰기도 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글쓰기에 익숙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게시판부터 시작할 필요도 없다. 취미나 나이, 학력, 지역 등 온갖 종류를 주제로 한 소규모 게시판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조차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계기는 무궁무진하다. 인터넷 정치가 활성화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소규모 게시판의 자연스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능력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닫힌 마음을 열린 마음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도 했다. 글을 써보고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진보를 향한 첫걸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PC통신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약하나마 토론훈련이 된 일상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새로운 인터넷 매체의 등장을 통해 한 단계 걸러진 내용이 아닌 원재료 그대로의 정치적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은 일반적인 토론을 정치적인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통령선거였고, 노풍(盧風)의 등장이었다. 노풍은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정치의 토양 속에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을 열망하는 욕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익명성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게시판문화가 참여정치공간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한 인식이나 숙고는 너무나 부족한 상태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터넷 정치공간이 다른 무엇보다도 익명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인터넷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꼽고 있는 익명성이야말로 실은 한국의 인터넷 정치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왜 익명성이 원동력인가. 익명성은 참여를 위한 절대적인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익명이기 때문에 어떠한 의견의 개진도 가능하고, 익명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으며, 익명이기 때문에 거리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익명이기 때문에 어떠한 정보의 공개에도 겁낼 필요가 없으며, 익명이기 때문에 검열프리(free)가 가능하다. 특히나 정치적 담론에 관한 한 익명성이 갖는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훨씬 크다.
필요하면 자유롭게 바꿔 쓸 수 있는 아이디(ID)란 신분증만으로도 얼마든지 활동이 가능한 장소, 그것이 인터넷 공간을 참여정치의 공간으로 진화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익명과 익명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담론이 창출되는 현장에서 이들은 일상이 정치로 변모하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정치에 재미를 느끼고, 일상이 곧 정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한국의 인터넷 정치의 밑바탕인 네티즌은 지구상에서 전혀 새로운 참여민주주의 혁명을 선도하는 실천자로 진화하고 있다.
실명제를 도입하는 정치게시판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실명화 자체가 곧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욕구의 배출구요 해우소로서 익명성이 갖는 폐해는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인격모독이라든지, 명예훼손 등 익명성의 역기능은 실정법만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합의에 의한 규제와 퇴출의 메커니즘 확립이지, 실명제에 의한 차단이 아니다. 게시판 글의 마이너스 점수제 도입 등 합의를 통한 규제 시스템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 네티즌들에게 익명성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익명성을 통해 폭로되는 가짜 권위의 주체들만이 이를 두려워할 뿐이다.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은 사실 인터넷의 익명성을 기반으로 확립된 것이다. 지난 한해동안 이미 정치참여공간으로서의 인터넷은 싹을 틔웠고, 무럭무럭 자랐다. 첫 과일을 수확할 시기는 내년 총선이다. 한번 싹을 틔운 인터넷 정치공간이 불과 1년 사이에 숨가쁜 진화를 거듭해 왔듯이 앞으로 1년여 동안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인터넷 정치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것이란 점이며, 이제 단순히 인터넷 정치가 아니라 정치가 인터넷(열린 공간)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