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
2003/3/9(일)
노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회를 보고 / 어쨋든 조선일보는 망해야 한다
'사과'는 빨갛고 달콤하며 상큼한 맛을 내는 사과라는 과일을 지칭하는 단어다. 기호론의 용어를 따르자면 앞의 '사과'는 기표(signifier)이고 뒤의 사과는 기의(signified)이다. 어린 시절 그림책 보며 공부를 잘 한 사람이라면 사과의 실체와 ‘사과’라는 단어는 분리될 수 없다. 기표와 기의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정부가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직접 국민과 소통하면 <조선일보>는 망한다. 벌써 <조선일보> 상공에는 어둠의 먹구름이 끼고 있다.
서프랑 여러분들의 오프모임이 있으면 예외 없이 모임후기가 올라오게 마련이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후기를 읽으며 즐거웠던 순간들을 되새기고 참석하지 못 한 사람들은 이를 통해 나름의 상상을 하게 된다. 후기는 기표이고 모임 자체는 기의이다. 모임에 참석하지 못 했으면서도 후기를 통해 모임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서프랑 회원이 올리는 후기는 바로 언론행위가 된다.
가 보지도 못 했고 체험하지도 못 했지만 전해주는 후기를 듣고 실체를 상상하는 것.. 언론의 본질적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어제 참석한 서프랑 모임과는 달리 언론에서 다루는 소재의 태반은 일반인들이 체험할 수는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가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경찰, 주민등록등본 뗄 때 가서 만나는 공무원? 혹은 잘 해야 대선 때 유세장에서 만난 대통령 후보 정도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국가의 기의들이다.
여기서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서민들이 이해하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은 실체를 접한 적이 없는 언론보도가 전하고 해석해 준 가상의 상상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생했지만 강원도 심중 산골에서 농사 짓고 편하게 산 촌로에게는 없었던 것이나 다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이럴 때 언론의 역할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할 수 없는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 즉 기의를 기표만을 통해 재구성 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우리가 해외여행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언론을 통해 기표로만 접해 온 그곳의 실체 즉 기의를 체험하고 왔음을 알리는 확인 작업인 셈이다.
사이버 세상의 컴퓨터 가상현실이나 언론이 만들어 낸 국가라는 상상공동체나 그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모임에 가지도 않은 서프랑 사람들이 후기를 읽으며 이미지를 떠 올리듯 신문지면과 방송뉴스를 통해 국가라는 상상공동체에 비로소 소속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5천만 국민의 공적인 문제에 있어 이들을 소속감을 지닌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엮어내는 언론이 없다면 현대적인 의미의 국가의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방의 필부필녀들조차 나라와 정치인을 운위하며 유별나게 거대담론 과잉증을 보이는 것도 지방지 대신에 중앙지가 득세하는 한국의 언론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상상공동체의 단위가 지방에서 국가 나아가 지구 전체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과의 인터뷰를 보면 나도 신문 보고 알았다는 대답을 많이 하고 오늘 평 검사와 노 대통령간의 토론에서도 유별나게 신문기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정작 정치와 공적임무의 수행 당사자들조차 자신들의 정치행위라는 상상공동체의 이해와 구현수단으로서 언론에 의지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모습이다.
오늘 평 검사들의 입에서 자주 나온 말을 보면 '밀실인사' '서열파괴' '검찰모독' 등등인데 하나같이 그 동안 조선.동아의 지면을 장식했던 단어들이다. 이들이 애용하는 기표 자체에서 이들의 현 시국이해를 구성하는 기의들이 조.중.동의 작품임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 검사들의 인사에 대한 불만이 단순히 인사의 실체적 진실에 바탕 한 것이 아니라 조.중.동이 해석하고 부채질 한 상상의 기표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방증이다. 토론이 끝나자 마자 필자가 토론 방에 조.중.동의 기표와 기의의 싸움이란 해석을 대뜸 내세웠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정작 사태의 한 가운데 있는 당사자들조차도 자신들의 문제를 조.중.동이 가공해 놓은 기표를 통해 느끼고 해석한다는 것이?
그런데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1970년대에 뉴욕타임스는 지금의 CNN이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당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국의 외교관들에게 뉴욕타임스는 몸은 해외에 있으면서도 본국의 소식을 듣고 그 실체를 상상하고 구성해 보는 아주 유용한 기표 수단이었다. 심지어 지난 걸프 전 때 미 국무부 관리들조차 현지의 작전부대가 보내주는 정보보다 오히려 CNN이 전하는 바그다드 공습 소식을 듣고 상황파악을 했다고 한다. 질문하는 CNN 기자에게 오히려 대변인이 현지 소식을 되묻곤 했다 나? 이쯤 되면 기표와 기의가 얼마나 뒤죽박죽으로 섞여 엉망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 평 검사들의 현 시국인식 역시 대체로 이런 모습에 근거하고 있으리라 본다. 대통령의 발언, 법무부장관의 반응, 기타 각 주체들의 여론들이 조.중.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전해지고 재해석 되며 이들은 이에 바탕 해 분노하고 대응작전을 세우고 단체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이는 조.중.동의 보도행위로 재 확산되고 이 기사는 다시 검사들에게 피드백 되고….
그렇다면 결국 대통령과 토론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사태의 진행과정의 절반은 검사들이 가장 애독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중.동의 기획작품이나 다름 없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이 일부 언론이 이번 사태를 즐기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일 터.
노 대통령이 결국 평 검사들과 토론을 택하고 또 위험을 무릎 쓰고 이를 TV생중계로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한 것은 바로 조.중.동에 의해 재해석 되는 기표와 기의의 끊임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버리려는 고단수의 지략인 셈이다. 평 검사들 역시 오늘 노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그간 조.중.동 지면의 해석을 통해 접해 온 사태와는 진상이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됐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번 토론과 생중계가 불안만 가중시키고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투로 불편하게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며칠간 자신의 지면에서 주도해 온 기표전쟁이 이제 드디어 종막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조선일보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회를 보고 / 어쨋든 조선일보는 망해야 한다
'사과'는 빨갛고 달콤하며 상큼한 맛을 내는 사과라는 과일을 지칭하는 단어다. 기호론의 용어를 따르자면 앞의 '사과'는 기표(signifier)이고 뒤의 사과는 기의(signified)이다. 어린 시절 그림책 보며 공부를 잘 한 사람이라면 사과의 실체와 ‘사과’라는 단어는 분리될 수 없다. 기표와 기의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정부가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직접 국민과 소통하면 <조선일보>는 망한다. 벌써 <조선일보> 상공에는 어둠의 먹구름이 끼고 있다.
서프랑 여러분들의 오프모임이 있으면 예외 없이 모임후기가 올라오게 마련이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후기를 읽으며 즐거웠던 순간들을 되새기고 참석하지 못 한 사람들은 이를 통해 나름의 상상을 하게 된다. 후기는 기표이고 모임 자체는 기의이다. 모임에 참석하지 못 했으면서도 후기를 통해 모임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서프랑 회원이 올리는 후기는 바로 언론행위가 된다.
가 보지도 못 했고 체험하지도 못 했지만 전해주는 후기를 듣고 실체를 상상하는 것.. 언론의 본질적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어제 참석한 서프랑 모임과는 달리 언론에서 다루는 소재의 태반은 일반인들이 체험할 수는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가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경찰, 주민등록등본 뗄 때 가서 만나는 공무원? 혹은 잘 해야 대선 때 유세장에서 만난 대통령 후보 정도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국가의 기의들이다.
여기서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서민들이 이해하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은 실체를 접한 적이 없는 언론보도가 전하고 해석해 준 가상의 상상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생했지만 강원도 심중 산골에서 농사 짓고 편하게 산 촌로에게는 없었던 것이나 다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이럴 때 언론의 역할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할 수 없는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 즉 기의를 기표만을 통해 재구성 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우리가 해외여행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언론을 통해 기표로만 접해 온 그곳의 실체 즉 기의를 체험하고 왔음을 알리는 확인 작업인 셈이다.
사이버 세상의 컴퓨터 가상현실이나 언론이 만들어 낸 국가라는 상상공동체나 그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모임에 가지도 않은 서프랑 사람들이 후기를 읽으며 이미지를 떠 올리듯 신문지면과 방송뉴스를 통해 국가라는 상상공동체에 비로소 소속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5천만 국민의 공적인 문제에 있어 이들을 소속감을 지닌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엮어내는 언론이 없다면 현대적인 의미의 국가의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방의 필부필녀들조차 나라와 정치인을 운위하며 유별나게 거대담론 과잉증을 보이는 것도 지방지 대신에 중앙지가 득세하는 한국의 언론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상상공동체의 단위가 지방에서 국가 나아가 지구 전체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과의 인터뷰를 보면 나도 신문 보고 알았다는 대답을 많이 하고 오늘 평 검사와 노 대통령간의 토론에서도 유별나게 신문기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정작 정치와 공적임무의 수행 당사자들조차 자신들의 정치행위라는 상상공동체의 이해와 구현수단으로서 언론에 의지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모습이다.
오늘 평 검사들의 입에서 자주 나온 말을 보면 '밀실인사' '서열파괴' '검찰모독' 등등인데 하나같이 그 동안 조선.동아의 지면을 장식했던 단어들이다. 이들이 애용하는 기표 자체에서 이들의 현 시국이해를 구성하는 기의들이 조.중.동의 작품임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 검사들의 인사에 대한 불만이 단순히 인사의 실체적 진실에 바탕 한 것이 아니라 조.중.동이 해석하고 부채질 한 상상의 기표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방증이다. 토론이 끝나자 마자 필자가 토론 방에 조.중.동의 기표와 기의의 싸움이란 해석을 대뜸 내세웠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정작 사태의 한 가운데 있는 당사자들조차도 자신들의 문제를 조.중.동이 가공해 놓은 기표를 통해 느끼고 해석한다는 것이?
그런데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1970년대에 뉴욕타임스는 지금의 CNN이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당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국의 외교관들에게 뉴욕타임스는 몸은 해외에 있으면서도 본국의 소식을 듣고 그 실체를 상상하고 구성해 보는 아주 유용한 기표 수단이었다. 심지어 지난 걸프 전 때 미 국무부 관리들조차 현지의 작전부대가 보내주는 정보보다 오히려 CNN이 전하는 바그다드 공습 소식을 듣고 상황파악을 했다고 한다. 질문하는 CNN 기자에게 오히려 대변인이 현지 소식을 되묻곤 했다 나? 이쯤 되면 기표와 기의가 얼마나 뒤죽박죽으로 섞여 엉망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 평 검사들의 현 시국인식 역시 대체로 이런 모습에 근거하고 있으리라 본다. 대통령의 발언, 법무부장관의 반응, 기타 각 주체들의 여론들이 조.중.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전해지고 재해석 되며 이들은 이에 바탕 해 분노하고 대응작전을 세우고 단체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이는 조.중.동의 보도행위로 재 확산되고 이 기사는 다시 검사들에게 피드백 되고….
그렇다면 결국 대통령과 토론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사태의 진행과정의 절반은 검사들이 가장 애독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중.동의 기획작품이나 다름 없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이 일부 언론이 이번 사태를 즐기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일 터.
노 대통령이 결국 평 검사들과 토론을 택하고 또 위험을 무릎 쓰고 이를 TV생중계로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한 것은 바로 조.중.동에 의해 재해석 되는 기표와 기의의 끊임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버리려는 고단수의 지략인 셈이다. 평 검사들 역시 오늘 노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그간 조.중.동 지면의 해석을 통해 접해 온 사태와는 진상이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됐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번 토론과 생중계가 불안만 가중시키고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투로 불편하게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며칠간 자신의 지면에서 주도해 온 기표전쟁이 이제 드디어 종막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조선일보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