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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사랑
한정찬
이 시간은 나에게
영원을 밟는 연습을 하게 했다
늘 넘어지는 연습을 하면
일어서는 아픔 그런
희열의 기쁨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이 시간은 나에게
앞질어 가는 것보다 더디 가는 법을 알게 했다
늘 양보하는 마음 가지면
찬연히 일어서는 양심, 그런
진리의 사랑이 행복 가득 가슴에 쌓인다는 것을
(월간문학 1995년 2월호)
시를 하나의 비평으로
조창맹(시인, 평론가)
극히 최근까지도 시는 어딘지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의 서정시가 일률적으로 가지고 있던 풍월화조나 감상적 연탄이 주조가 되었던 시대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연한 대목에서 이상한 절규가 되곤 하는 시, 혹은 노래가 되어 흘러가 버리는 덧없는 영탄적인 감정밖에는 담을 수가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생활감정이나 삶의 인식에서 볼때 종래의 시인이 시의 모티브나 표현 양식으로 매력을 느끼고 있던 절규나 감상의 서정시는 말과 말의 새로운 관계가 아닌 말과 말의 '낡은 관계'가 되는 것이며 이런시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시를 단순히 막연한 영탄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평(크리틱)으로서 감지하는 힘의 싹이 트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시는 영탄이나 감상이 아니라 비평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월간문학'(2월호)의 한정찬의 '기쁜사랑'을 보기로 한다.
이 시간은 나에게
영원을 밟는 연습을 하게 했다
늘 넘어지는 연습을 하면
일어서는 아픔 그런
희열의 기쁨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이 시간은 나에게
앞질어 가는 것보다 더디 가는 법을 알게 했다
늘 양보하는 마음 가지면
찬연히 일어서는 양심, 그런
진리의 사랑이 행복 가득 가슴에 쌓인다는 것을
여기서는 결정적인 시간이 제시되고 있다. 이 결정적인 시간은 영원한 시각속의 한 토막이다. 사뭇 깔끔하게 처리된 소품이라 할 수 있다.
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씌어진 것, 즉 시로서의 작품적인 가치보다도 시를 쓴다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우리들의 경험에 의하면 시집을 몇권 냈다는 것보다 10년 20년 30년 ......동안 마치 습관처럼 시를 줄곧 써왔다는 것이 시인의 생활을 그 기초에서 지탱하고 행동의 지침이 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창조이기보다는 습관이며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느낌의 방식을 부단히 단련하기 위한 습관이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시가 창조라 하더라도 아마도 그것이 실현되는 장소는 이와 같은 사고의 방식이나 감정을 단련해가는 습관의 퇴적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가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시를 우리의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며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1995. 월간 문예사조 3월호 시 월평 중에서)
* 최용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3-08-0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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