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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빗소리

보시니............... 조회 수 1063 추천 수 0 2003.07.24 06: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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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빗소리

나는 유독 비가 오는 날을 싫어했다. 이상하게 비가 오면 기분도 울적해지고 습한 공기와 피부에 와닿는 느낌도, 분위기도 싫었다. 비가 오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해 주시는 부침개를 먹으며 음악도 듣고 하루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리운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정도지 장마철 마냥 비가 계속 올 때는 혈압도 떨어지고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내가 언제부턴가 비를 기다리게 되었고 적절히 내리는 비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러시아의 타쉬켄트라는 곳에서 1년 동안 살게 되었다. 겨울엔 눈도 많이 오고 봄엔 비가 많이 오는 곳이었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타쉬켄트에는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장마철이면 젖은 빨래를 말리기 위해 선풍기를 돌려대고 때론 방열기를 틀어놓아야 했던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생각, 수영장에 갈 때 비가 올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타쉬켄트의 여름은 상상을 초월한 더위였다. 러시아 하면 막연히 추운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땅이 넓은지 러시아에는 여러 기후가 공존하고 있었다. 타쉬켄트의 여름은 40도를 웃도는 엄청 더운 날씨였다. 사막기후여서 건조하고 비가 오지 않는 무더운 날씨. 양산을 써도 뜨거운 태양을 다 막아주지 못해서 챙이 넓은 모자까지 쓰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모자를 벗으면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언제부턴가 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던 장대비를. 한국에서처럼 시원하게 한바탕 쏟아졌으면 하는 간절함이 하루하루를 더해가고 있었다.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에 달린 무성한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마치 비가 오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해서 몇 번씩 창문을 열어 보곤 했다.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먼지에 숨이 턱턱 막혔고 거리에 잔디들은 노랗게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특급호텔 앞 분수대에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지나가다가 발을 적시고 심지어 옷 입고 뛰어드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기를 한 달여. 정말 여름엔 비가 안 오나? 숨이 막히도록 건조하고 더운 날씨가 계속되자 내 삶의 에너지도 말라 가는 듯했다. 예전에 비 안 온다는 말을 듣고 좋아했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하나님 다시는 그런 생각 안 할게요. 비 한번만, 한번만 내려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열어 보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비였다. 진짜 비,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아니라 비였다. 정신없이 밖으로 나갔다. 마른땅을 때리는 비 때문에 바닥에서는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비는 그쳤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비가 왔는지는 모른다. 아마 오지 않았어야 할 비였는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이 내 작은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름이 다 가도록 나뭇잎 스치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창문을 열어 보는 습관이 생겼다. 한국에 와서도 가끔 마름 흙 냄새를 맡을 때면 타쉬켄트에서 간절히 기다렸던 그 비가 생각난다. 계속되는 가뭄, 건조주의보. 그곳에서 경험했던 비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지금의 농부들의 심정을 알 듯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오히려 못 미치는 것과 같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무엇이든지 적절한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것이 비이건 인생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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