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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 자치주, 백두산 및 심양 지역 여행기

무엇이든 장대식 목사............... 조회 수 1857 추천 수 0 2004.07.23 13: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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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정상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백두산, 연변, 심양 지역 선교 및 관광 여행-
                                                    목사  장  대  식

<글을 시작하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연합회’ 임원진 및 회원 교단 총회장들을 중심으로 모인 36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지난 7월 12(월)일부터 16일(금)까지 4박 5일의 일정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백두산 및 심양 지역을 여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1.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동포들의 현실과 긍지
  우리 일행은 7월 12일 낮 12시 30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2시 20분(중국 1시 20분, 이하 중국 시간) 중국 길림성의 소재지인 장춘(長春)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다시 오후 4시에 출발하는 연길행 비행기를 갈아 타고 50분 후 연변 자치주의 소재지인 연길(延吉, 인구 40만)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우리가 타고온 비행기 외에 비행기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우리 나라의 시골 역에 도착한 듯 초라하고 순박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순간 나를 감격하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공항 구내에 걸려 있는 간판이었다. ‘화장실, 洗手間, Toilet’ 순으로 한글이 맨 앞에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족 자치지주내의 모든 간판은 한글을 우선하도록 법률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비록 타국에서 사는 처지이이만 내 민족의 말과 내 조국의 글을 사용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크다란 긍지가 아닐 수 없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두만강 북쪽에 있는 길림성 내의 6개 시(연길, 용정, 화룡, 도문, 돈화, 훈춘)와 2개 현(안도, 왕청)으로 되어 있는데 1952년 9월 3일 설립 승인되었다고 한다. 면적은 42,800㎢로 남한 면적(99,200㎢)의 약 절반(43.1%)이며, 인구는 약 217만 명이고, 이 중 조선족은 86만 5천 명(39.9%, 전 중국에는 약 200만 명)이라 한다. 그리고 이 중 기독교인은 1.5%라고 한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으로 볼 수 있었던 연변의 산야는 광활한 대지 그대로이고, 토지는 매우 비옥해 보였다. 삼림은 참나무를 비롯한 주로 잡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밭에는 옥수수, 콩이 대부분이고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특히 벼농사는 우리 동포들이 약 100년 전에 개발하여 현재도 우리 겨레가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연길에서 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일행이 이구 동성으로 밥과 반찬 맛이 좋다고 격찬을 했다. 이것은 연변 지방의 쌀과 모든 체소들의 품질이 좋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연변 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 3성(길림, 흑룡강, 요녕)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주택의 벽을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칠하고 있으며, 대부분 동포들끼리만 통혼을 하면서 조국의 말과 글과 전통을 이어 왔다고 한다. 최근에 와서는 모든 동포들이 서울의 KBS, MBC, SBS 등 방송을 통해 뉴스, 드라마, 홈쇼핑 등 조국의 소식을 접하며 문화를 호흡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 우리 동포들은 조선족만을 위한 초.중.고 대학을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중국내의 56개 소수 민족 중 자신의 문자로 입학시험을 치르는 민족은 한민족(조선족)과 몽고족 뿐이라고 한다. 특히 한민족은 문맹률이 0%로 중국의 소수 민족 56개 민족 중 교육 수준은 1위이며, 경제 수준은 11위라고 한다. 자치주 내에 있는 주장이나 시장, 현장 등 수장은 반드시 조선족이지만 중국의 소수 민족 발전 억제 정책에 따라 조선족의 중앙 정계에 진출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과 글과 문화를 가지고 교육 수준이 높은 우리 동포 조선족의 미래에는 중국 사회에서 크게 기여하는 역할로 민족의 긍지를 드높일 것이라 기대해 본다.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은 자신의 글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에 동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통하여 삼국 통일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2. 심양 서탑(西塔) 마을의 한인들
  중국의 제5도시이며 동북 3성에서 제일 큰 도시인 심양(沈陽, 인구 720만, 옛날 奉天)에도 한국인 동포들이 약 14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주로 심양시내의 서탑 지역에 많이 모여 사는데 이 지역은 중국에서 유일한 ‘코리아 타운’(Korea Town)이라 하며 지역 인구의 3분의 1이 조선족이라고 한다. 특히 심양의 만융촌에는 100% 한국인만 3,000여호 모여 산다고 한다.    
  제4일이 되는 15일 우리 일행은 ‘코리아 타운’ 한식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서울의 명동 거리를 방불케 하는 네온이 휘황찬란한 서탑 거리를 산책했다. 한글로 쓴 한국 이름의 형형색색 네온 간판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이어서 우리는 한인 교회인 서탑교회를 방문하고 성전에 들어가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서탑교회는 1913년 설립된 역사적인 교회인데 현재 오목사라는 여자 목사님이 담임하고 있으며, 성경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동광교회 등 주변의 교회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서탑교회는 심양에서 제일 큰 교회로 본 교회 한인 성도가 2,000여 명, 시내 한인 연합회 성도가 800여 명, 중국인 성도가 300여 명, 그 외 외국인 성도들이 별도로 해서 주일날은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는 서탑교회와 그 역할을 통하여 중국 사회에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3. 백두산 정상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제1일(7월 12일) 오후 연길에서 한식으로 약간 일찍 저녁 식사를 한 우리 일행은 저녁 6시 버스편으로 훈춘시(인구 28만)를 향해 출발하였다. 훈춘은 한반도 동북 국경에 인접해 있는 자치주내의 시로 러시아와도 연접해 있다. 현재 강원도 속초에서 배가 다니고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통해 약 120km를 2시간 동안 달린 후 저녁 8시에 훈춘에 도착하였다. 연길까지 마중나온 K선교사님의 안내로 H선교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 예배를 위하여 인천에서 비행기 편으로 황해를 돌아 장춘에 이르고, 다시 비행기로 연길에 이르고, 다시 버스 편으로 훈춘에 이르는 3,000리(1,200km)가 훨씬 넘는 길을 8시간 30분 동안 강행군을 하게 된 것이었다. H선교사님과 20여 명 성도님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으며 우리는 강대상도 없는 약간은 초라해 보이지만 찬송가가 은혜롭게 울리는 성전에 들어섰다.
  예정된 순서에 따라 예배를 뜨겁게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일행은 각자 헌금을 좀 낫게 드려서 교회에 전달하였다.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은혜가 충만하였다. 멀지 않는 장래에 중국과 북한 땅에 자유로운 복음 전파의 계절이 도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9시 경 예배를 마친 우리는 우리 나라 50년대 시골길 같이 가로등이 없어 캄캄한 길을 조심조심 더듬어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연길로 돌아온 후 11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제2일(7월 13일)은 백두산을 등반하는 날이었다. 초등하교 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민족의 영산 백두산! 국토가 분단되어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죽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국 땅을 통하여서나마 백두산을 등반하게 되니 참으로 감계가 무량하다.
  백두산은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산이며 천지(天池)는 화구가 함몰된 곳에 물이 고여 된 호수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2744m(최근 2749.25m로 정밀 측정되었다고도 함), 천지의 둘레는 14.25km, 면적은 9.8㎢, 수심은 최고 374m, 평균 수심은 204m, 평균 수온은 섭씨 4도라고 한다.
  아침 7시에 연길을 출발하여 도중에 잠시 식사 시간을 포함해서 장장 5시간 40분이 걸린 12시 40분에 입구인 매표소에 도착하였다. 우리의 등반 목표지는 천문봉(天文峰)인데 짚차를 이용해서 등반하였다. 그야말로 구절양장 같은 S자로 겹친 길을 빠른 속력으로 오르는데 간담이 서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짚차는 거의 정상까지 우리를 실어다 주었으며, 내려서 4-5분 걸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기대하던 우리의 목적지 천지(天池)에 이르렀다.
  산 밑에서는 비교적 좋은 날씨었으나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구름의 변화는 겉잡을 수가 없었고 기온은 섭씨 7도 정도로 급강하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정상 부근의 계곡에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 무더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우리는 천지 보기를 기대했지만 구름으로 덮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천지의 모습은 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예정된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로 영광을 돌렸다. 백두산 정상에서의 예배! 나는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현실이 목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감격했으며,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드리고, 축사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축도를 하면서 한국의 시내산 백두산 정상에서 드리는 예배의 응답으로 남북한과 중국과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사는 모든 한민족에게 복음 전파의 놀라운 역사를 위해,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했다.
  예배를 마치고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잠시 구름이 걷히고 호수가 나타났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탄성을 질렀다. 너울을 쓴 여인처럼 구름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지가 우리들의 소원을 알고 들어나 주듯이 잠시 구름 너울을 벗고 미소를 지어 주었다. 영영 못볼 줄 알았던 천지를 잠시라도 볼 수가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는 짚차로 하산한 후 다시 우측 계곡을 따라 등반하여 장백폭포를 관광하였다. 장백폭포는 천지의 물이 넘쳐 흘러서 이루어지는 폭포이다. 하산하는 도중 수온 섭씨 80도로 계란이 익을 정도의 온천수가 터져 나오는 노천 온천에서 익은 계란을 사 먹고, 근방에서 온천을 한 후 숙소인 백두산 백산호텔로 돌아왔다.    
  
  제3일(7월 14일)은 두만강변에서 북한을 바라보면서 야외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아침 6시 백두산의 백산호텔에서 출발하여 오전에 용정시에 있는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를 방문한 후 12시 40분 대성중학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오른편에 끼고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강 건너 북한 땅에는 회령에서 종성을 거쳐 온성, 경원, 아오지에 이르는 철도가 강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두만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리를 걷으면 쉽게 건널 수 있는 얕은 내처럼 보였다. 강 건너 북한 땅에는 간혹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차창을 통해 손을 흔들면 그들도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한참 달리다가 오후 2시 쯤 되어 버스를 길가에 세워 놓고 왼쪽 산으로 조금 들어가니 숲 속에 H선교사님이 먼저 성도님 몇 분들과 와서 예배 준비를 해 놓고 이었다. 아울러 점심 식사 준비는 물론 살찐 양도 한 마리 잡아서 바베큐로 준비해 놓았다.
  우리는 함께 모여 바로 강 건너 지척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이 또한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하나님! 우리 선교사들을 도구로 해서 북한과 중국에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옵소서!”우리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양고기와 찰떡과 한식으로 준비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예배를 마친 후 우리는 강 건너 북한 마을이 잘 보이는 길가에서 ‘통일의 노래’를 부르면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북한 주민들도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면서 응답해 주었다. 같은 민족끼리 왜 이러한 현실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감옥같은 북한 땅에도 자유의 계절이 찾아와서 하루 속히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등으로 만감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한민족의 남북 통일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더하여짐을 느꼈다.
  우리는 강변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다가 북한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개산툰에 이르러 K목사의 선교 시설인 양로원에 잠깐 들려 기도를 한 후 다시 출발하여 오후 5시 40분에 아침에 출발했던 연길에 도착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다가 밤 10시 25분 연길 공항을 출발하여 비행기편으로 560㎞ 떨어진 심양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었고, 숙소에 도착하니 15일 0시 30분이 되었다. 피곤하였지만 제3일도 유익하고 의미 있는 하루였다.

4. 민족혼이 스며있는 윤동주 시인의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
  제3일(7월 14일) 오전에는 한민족의 민족혼이 스며있는 유서깊은 용정시(龍井市)와 대성중학교를 방문하였다. 백두산의 백산호텔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여 연길을 거쳐 용정에 도착하니 12시가 되었다. 현재 용정시의 인구는 27만 명이며 그 중 조선족(한민족)은 68%(183,600명)로 연변 자치주 중에서 조선족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로 가는 도중 멀리 산 위에 있는 일송정(一松亭)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일송정은 일제시 흰 두루마기를 입은 우리 독립 투사들의 모이는 장소였다고 한다. 일송정의 명칭의 유래가 된 한 그루의 소나무는 1938년 일제(日帝)가 뿌리에 독약을 넣어 고사시켰다고 한다. 일제의 만행은 더욱 악랄하여 안도에서 연길로 오는 도중에 있는 로투구진 광산에서, 1945년 8.15 광복 전후해서 강제 노동을 하던 한국인 1만여 명을 갱도로 몰아넣고 가스로 독살하였다고 한다.
  용정중학교의 교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大成中學校’라는 간판 탑이 눈에 띄었다. 현재의 용정중학교는 1920년부터 1926년 사이에 개교된 용정의 6개 사립중학교(恩眞, 永新, 東興, 大成, 光明女子, 明信女子)를 광복 후 ‘길림성립용정중학교’로 통합되었다가 몇 차례 이름이 바뀐 후 현재의 ‘용정중학교’(龍井中學校)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6개 중학교 중 대성중학교 건물이 아직 남아 있어 ‘윤동주문학기념관’이 되었다고 한다.
   기념관 앞에는 ‘윤동주시비’(尹東柱詩碑)가 서 있고 거기에는 그의 ‘서시’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
  
  우리는 2층 기념관에서 안내원의 유창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방에서 한민족의 민족혼을 일깨워 그 뿌리를 깊게 심은 우국지사님들의 애국심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정의 중학교가 비록 이국에 있는 중학교들이었지만 우리가 알만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윤동주(1917-1945) 시인은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서울의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고 한다. 한편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그는 천인이 공노할 일제의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또한 윤동주님은 북간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까지 받았으며 그의 민족주의 의식, 기독교 의식, 시 의식은 그가 죽은 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용정중학교는 조선족 학교로 중등부와 고등부로 되어 있으며 2,5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 방학인지라 학교는 조용했다. 넓은 운동장에 뛰노는 몇몇 학생들에게 “중학생이냐?”고 물었더니 “네” 하고 대답을 했다. 그 다음 “나는 한국 서울에서 왔다”고 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서울 사람 만나는 것이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닌 듯 보였다.
  12시 40분 우리는 두만강변 야외예배 장소로 가기 위하여 용정중학교를 나온 후 용정시내를 가로 질러 흐르는 혜란강을 다리 위로 건너게 되었다. 일제 당시 항일 독립운동의 요람인 그 꿈의 용정에 내가 와서 일송정을 바라보며 혜란강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하였다. 나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일제와 싸웠던 독립군들을 위한 노래인 선구자를 생각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혜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5. 국경 주변 중국 땅에서 느끼는 북한의 체취
  우리 일행은 이번 선교, 관광 여행을 통하여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몇 가지 북한의 체취를 느낄 수가 있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 보이는 북한의 산들은 잡목으로 우거져 있는 중국의 산과는 대조적으로 거의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 더러는 야산의 봉우리까지 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콩을 심어 놓았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군인들이 식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직접 경작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북한의 식량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는 증거라 하겠다.
  제2일(7월 13일) 우리 일행은 백두산 가까이에 이른 길목에서 북한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에 들렸다. 우리는 “한국에서 오신 동포 여러분들을 열열히 환영합니다”란 환영 구호를 크게 써서 가로로 길게 설치해 놓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가슴에 김일성 빼찌를 단 미모의 젊은 여성 안내자가 유창한 말로 상품을 설명하고 시식까지 시켜 품질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온 것을 의식해서인지 남한을 호칭할 때에는 반드시 ‘한국’이라 예우해 주고, 북한을 호칭할 때에는 ‘리북’이라 하여 상인으로서의 겸손을 보여 주었다. 상품으로는 우황청심원, 장뇌삼, 개성인삼 액기스 등 보약류와 정교하게 수놓은 자수 그림 등이었다. 백두산 관광객을 대상으로 외화벌이를 하기 위하여 북한 정부에서 하는 사업이라 한다.
  제4일(7월 15일) 저녁 식사는 심양에 있는 ‘평양향상관’이란 북한 식당에서 했다. 좌석이 한 50여 개 되는 한식 식당이었다. 가슴에 김일성 빼찌를 단 미모의 젊은 여성 5명과 카운터에 앉아 있는 1명의 남자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미모의 여성들은 모두 노래를 잘 불렀고 피아노를 잘 치는 여성도 있었다. 그들은 음식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불러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통일이여 오라, 아리랑, 고향의 봄, 선구자, 찔래꼿, 이별의 부산정거장, 목포의 눈물 등을 불렀다. 우리 일행과 함께 부르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 우리 일행도 있었다. 박수를 치고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가진 식사 시간, 우리 일행은 동포애를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우리 일행에게 매우 친절하게 해 주었으며 덤으로 먹은 냉면 값은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떠날 때는 5명이 문 앞에 나와 나란히 서서 우리 차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북한 정부에서는 외와벌이를 위하여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중국 땅에서 이러한 식당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들은 2년마다 교체가 되며, 외부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고, 조선족이 자유로히 시청할 수 있는 한국의 TV도 시청할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기능이 출중한 고등 교육을 받은 미모의 고급 인력이 외화벌이의 제물로 회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사랑의 하나님! 어두운 북한 땅에 하루 속히 자유와 복음의 계절이 도래하게 하시옵소서!”

6. 동굴 안에서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신비의 지하강 3km  
  제4일(7월 15일)의 본래 계획은 북한의 신의주와 접경한 단동(丹東) 방문으로 되어 있었으나 너무 멀기도 하고, 한편 본계(本溪)의 수동(水洞) 동굴을 방문하자는 의견이 있어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본계의 수동 동굴은 동굴내에서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신비의 동굴이라 한다.
  아침 7시 30분 심량의 호텔을 출발하여 단동으로 향하는 탁트인 고속도로를 달렸다. 심양에서 단동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3년 전에 개통된 것인데 장차 한국이 통일되면 서울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중요 물류 통로가 될 것을 예상하고 건설한 것이라 한다.
  고속도로와 비포장 도로를 약 3시간 달린 후 10시 30분 경 우리는 수동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입구에서 비교적 좁은 동굴을 약 300m 들어가니 넓은 동굴이 나타나는데 바닥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이다. 동굴 바닥에 군데군데 물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동굴 바닥이 넓고 긴 강을 이루어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신비의 동굴은 최근까지 숨겨져 있다가 1980년대 아이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3년에 개설이 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은 석회 동굴인데 군데군데 아름다운 종류석이 떼를 지어 늘어져 있다. 바닥에는 물이 있어서 석순은 자라지 못했지만 양 벽과 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석순이 만물상을 이루고 있다. 구불구불 흘러 가는 지하강의 총 길이는 지금까지 탐사 개발된 것까지만도 3km나 된다고 한다. 평균 수심은 1.5m이고, 폭은 좁은 곳이 3m, 넓은 곳이 20m이며, 높이는 최저 3m, 최고는 38m나 된다고 한다.
  동굴내의 온도는 평균 섭씨 12도이므로 모두 방한복으로 갈아입고 보트 한 척에 9명씩 올라 탔다. 우리가 탄 배는 배터리가 약해서인지 속력이 느려 다른 배가 끌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거의 1시간 반이나 걸려서 제 자리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우리 팀이 유선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12시 5분이었다.
  순간 찬란하고 밝은 세상이 눈 앞에 전개됨을 느꼈다. 장차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나와 밝은 세상을 보는 것처럼 더욱 찬란하고 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제5일(7월 16일)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심양에서 인천으로 가는 아침 9시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아침을 일찍 먹고 7시 10분 마지막 숙소인 심양의 금도호텔을 출발하여 심양공항으로 향했다. 심양공항은 우리 나라의 인천공항에 비교될 수는 없었지만 내가 5년 전에 본 북경공항 보다는 훨씬 넓고 깨끗하고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예정대로 오전 9시에 출발하는 중국 남방항공사의 CZ 681기 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 시간 11시 30분이었다. 그 동안 여행지의 날씨는 좋았는데 한국에는 장마로 인하여 비가 내리고 있었다.
  4박 5일의 빽빽한 일정은 육신적으로는 좀 피곤한 것이었지만 비행기와 버스 편을 이용, 1,000-2,0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땅인 광활한 대지를 누벼 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역사적인 우리의 땅 위에서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쓰고 우리의 풍습대로 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또 다른 하나의 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좋았던 것은 매일 같이 의미 있는 장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이다. 첫 날에는 북한과 러시아가 국경으로 접한 훈춘의 선교지 광신교회에서, 둘째 날에는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정상에서, 셋째 날에는 북한이 건너다 보이는 두만강변 숲 속에서 예배를 드렸고, 넷째 마지막 날에는 심양의 서탑교회에서 기도회로 대신했다.
  또한 항일 민족혼의 태동지인 유서깊은 용정중학교에서의 감격과 신비로운 본계 수동 동굴의 지하강에서 유선하던 즐거움도 오래 동안 기억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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