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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마다 변한 여인(요4:28-30 (1-42)
성경에 예수를 만나 말씀을 나누거나 긴 설교를 듣거나 하는 중에 본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단
번에 변화 받고 주님을 메시아로 깨달아 영접한 것은 매우 인상깊은 사건입니다. 오늘의 시대
를 성경은,
마 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하심대로 오늘의 인간정서는 완악해서 바른 삶
삶의 판단을 깨닫지 못합니다.
본문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조금 이해하기 바랍니
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치정 후 아들들 시대에 남북이 갈라져서 살다가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게 멸망당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종교적으로 혼탁된 민족이어서 유대인들을 이 땅과 거
민을 천시했습니다. 그래서 남쪽 지방 유대 땅에서 북쪽 갈릴리로 갈 때는 사마리아를 직통하
지 않고 베레아 지방으로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직통하시게 된 것은 구원의 주께서 행보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
다. 저녁쯤 행로에서 곤하여 우물곁에 있다가 물 길러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천시
하는 사마리아 한 여인의 변화를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1.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알아봅니다. 이 여인은 본 장 18절에, "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하신 말씀에서 그녀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
보다 먼저 남편 다섯 그리고 지금 여섯 번째의 남자도 있었으니 누가 봐도 이 여인은 유대인과
대화할 수 없는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신상은 곧 우리들의 영혼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세상과 짝하여 살되 남
편을 6명씩이나 맞아도 행복할 수 없듯이 이 세상 것으로는 온전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 여인을 그리스도께서 대화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유대
인치고 아무라도 가까이 해주지 않을 이 부도덕하고 비참한 여인을 거룩하신 주님은 만나주셨
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셨습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
노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을 감사합시다. 지성으로 종교성으로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스스로 발
견할 수 없었던 우리 한국 땅에 선교사와 전도자들을 보내 주셔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신 하
나님의 은총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도 대화도 해 주지도 않는 사마리아 여인, 도덕적으로도 형
편없는 여자를 상대하심은 우리를 상대해 주신 것으로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2. 변화 받은 사마리아 여인
예수께서 그녀와 대화하는 중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고 유대인은 예루살렘
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서로의 예배처소에 대한 주장이 있음을 말하는 중에 주님은 그녀에게 가
르치시기를,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
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
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주
님의 말씀을 듣다가 그녀는 물 길러러 왔지만 주의 말씀을 듣는 중에 영적인 놀라운 변화가 생
겼습니다.
자세히 본 장을 살피면 사마리아 여인은 주의 말씀을 들으며 10절마다 변하였습니다.
1)먼저 9절에서, 그녀는 예수를 단순한 한 유대인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예수는 단순한 유대인 중의 역사적 인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2)두 번째의 변화는 10절을 뛰어 넘어 19절에, 이제 주님을 선지자로 보였습니다. 이는 세속인
들이 세계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 보듯이 그녀는 그냥 유대인이 아닌 선지자로 이해되어졌
습니다.
3)그리고 세 번째는 29절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
니냐 하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닫게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 짤막한 대화에서 그녀는 완전히 변할 수 있었을까요? 교회에도
빠른 시간에 은혜와 사명과 감사를 깨닫고 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신분을 갖추어도 하나님 앞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한 변화를 맛보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어째서 그녀가 지
식도 없고 그렇다고 긴 대화도 아닌데 어떻게 10절마다 시각이 열리고 주님을 생명의 그리스도
로 인식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녀가,
(1)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이 말씀을 들을 때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전하는 자도 준비를 해야 하고 듣는 이도 심각하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과 대화
를 할 때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는 것을 봅니다.
(2)또한 자기 처지를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불온한
여인인데 이를 고하고 계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가난한 자는
혹은 죄를 지은 자는 오히려 더 화를 냅니다. 인간의 약점이고 죄의 성질입니다. 그녀에게 아픈
상처를 섬세하게 집중으로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은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
다. 설교에서 나에게 기분나쁘게 들리는 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여
나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받아들려야 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자신의 인격을 그대로 들어 내어도 화내지 않고 수용했습니다. 변화를 받고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달콤한 이야기만 찾아서 교회를 찾아 다니지 않아
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프게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수용해야 구원이 있습니다.
웹스터는 그를 사람들이 잘 알기 때문에 시골에 가서 예배를 자주 들었습니다. 사람에게 아부하
고 맘대로 말하지 않는 도시의 설교를 떠나 촌락의 작은 전도사의 직접적인 말씀을 듣고자 찾아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을 분명하게 외치는 설교자를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
은 자신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에 아무 대꾸 없이 수용했음을 봅니다.
(3)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인 겸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부도덕 한 여인이었지만 그는 겸손히 주의 말씀을 받아 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의 겸손은 인륜사상의 공자의 겸손
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하나 형식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겸손은 이 여인의 태도같이
끝까지 듣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우리는 겸손이라 합니다.
제자들도 3년 간이나 교육받아도 참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변
화받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많이 들어도 가령,
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 말씀에
서 살아나리라는 긍정적이고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귀에 안 들어오고 죽임을 당
하고....이 말만 귀에 쏙 들어오는 겁니다. 희한하지요?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왜 크게 들리지 않
을까요?
같은 성경을 보면서 세속주의로 읽혀지는 눈은 무엇이며 내세주의적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정신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같은 성경을 읽는데 어떤 이는 세상 복을 바라고 읽고 또
다른 이는 내세주의로 성경을 보게 됩니까? 그래서 교파가 생기기도 합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교
파가 생기는 것은 정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주의 말씀을 많이 듣고 기적을 보이시고 비유로 말씀하시고 수많은 시간
에 주의 뜻을 가르치셨으나 그들이 왜 변화를 입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율법사는 왜 주의 말씀을 못 알아 들었을까요? 가르침이 둔해서일까요? 그런 중에 니고
데모 같은 경우는 대화 중에 주를 깨달아 나중에 보면 믿음을 갖게 된 모습을 봅니다.
사람이 얼마나 변하기 어려운지요,
손봉호 박사가 신학을 다하고 영동교회를 개척하고 평신도로 설교를 할 때 1년 내내 검소에 대
한 설교를 해도 겨우 부자가 외제차 사려는 마음을 접고 국산 차를 사겠노라는 생각을 비치더라
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변하기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마리아 여인은 율법사도 아니요,
옳은 정통 유대인도 아닌 여인이요, 생활이 또한 온전한 정신도 아닌 여자입니다. 어찌 변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실하게 귀담아 듣고 주님의 말씀을 구원의 메시
지로 알아 들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지요.
3. 그리스도를 전하는 여인
참으로 놀라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자말자 그녀의 한 행동은 실로 본받을 만
합니다. 28-29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
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 말은 나에게 물질축복을 주신 분을 보고 복 받으세요 한 말이 아닙니다. 내게 행한 모든 나의
엉망인 인생을 깨닫게 하신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닌가요! 하고 증거한 이 여인의 심정을 이해하
십니까?
나의 행한 모든 일, - 나의 속사정을 알게 하신 그리스도를 보라!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1)먼저 놀라운 행동의 변화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전도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상의 생활이
잠시 멈추어지고 감동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몰두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6남편을 가
진 것처럼 만족할 수 없는 세상일, 물동이를 버려두고 주님을 증거하러 나간 이 여인의 행위에
서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삶을 얻게된 그녀의 행복을 이해하게 됩니다.
2)또한 그녀는 자신의 구원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동네에 들어가서 전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멀리가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1)예루살렘과 (2)온 유대와 (3)사마리아와 (4)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미국의 교회성장학자 엘머 타운즈 박사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처음에 어떻게 교회에 나
오게 되었는지,그 경로를 유형별로 연구했습니다. ‘친구나 친지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86%)
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조직적 복음전도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6%), ‘목회자를 통
해서 나오게 된 사람'(6%), ‘광고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2%) 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친구나 친지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선배, 부모, 배우자, 형제, 친척 등 가족의 권유로 교회에 나
오게 된 사람이 86%나 됐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면, 나도 다
른 사람에게 전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3)와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신의 버려진 영혼 상태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럽니다. 왜 혼자 믿지 자꾸 예수 믿으라고 귀찮
게 하냐구요. 하지만 이 여인같이 진정 인생이 비참하고 구원이 필요함을 안다면 우리들도 이
사마리아 여인같이 주님을 영접하고 또한 주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얻게 한 의사나 그 병원을 선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신적 활동입니다. 내
게 주신 은혜의 사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 얻은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대사회에 버림당한 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그녀와 별
다를 바 없는 이방인으로서 구원 얻게 된 축복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얼마
나 전파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명령이자 우리가 전할 그리스도를 입 다물고 그냥 교회당에서만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전파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닮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가까
운 사람부터 많이 예수님을 알리는 저와 여러분 되셔서 전도의 상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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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7-3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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