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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과 과로의 극복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과로와 긴장은 우리 시대의 한 특징이다. 모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괴하는 일에 순응하고 있다. 사실을 말한다면, 믿는 영혼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정을 제공하신다고 굳게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조리에 너무도 쉽게 순응해 버린다.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목사들과 선교사들일지라도 신경성의 해로운 긴장에서 결코 제외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울며 기도하고 자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머무는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같아 보인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렇게 될 필요도 없다.
허드슨 테일러 박사는 선교사로 일하게 된 초기와 중국대륙 선교부를 창설한 후 몇년동안, 이러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당시의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전에 고생하며 괴로움을 당했던 사람인데 근래에는 영혼의 휴식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그 후에 그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급진적으로 변화된 간증을 할 수있었다."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내게 맡겨진 일의 양이 너무 많거나, 책임이 몹시 중하거나, 극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의 일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은 모두 내게서 사라졌다."하나님께는 편애의 죄가 없으시므로 그가 자녀들 중 하나에게 하신 일이라면 모두에게도 기꺼이 하실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긴장이란 단어는 "뻣뻣하여 팽팽해진 상태에서 정신적 과로, 투쟁의 격렬함, 근육긴장을 일으키는 신경성 불안이 생기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신경적 긴장이 모두 해로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프의 줄은 필요한 만큼 팽팽해야만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정확하게 음악적인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가장 높은 성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가치있는 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이용할 때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정한 정도의 긴장이 포함된다.
누가복음 12장 50절에는 우리 주님이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는 말씀도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긴장해야 할 필요가 있으셨다.
과로는 "지나친 긴장"으로 정의되며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거나 해로운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때 생긴다.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원인들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힘든 일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오해하고들 있는데, 일 자체가 진짜 원인은 아니다. 일 자체가 힘이 든 일이라 해도 마음이 안식하고 있을 때는 건강을 가져온다.
일은 피곤을 낳지만 긴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긴장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신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사역자에게 과로한 건강상태를 유발시키는 요인들로써 적어도 다음의 네가지 요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부적격성을 느낌.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대해 영적인 자원의 부족함과 정신적 예민성을 계속 의식하는 것이 긴장을 낳게 하는 근원이다. 사실 대개는 기초가 잘 놓여있기 마련이다.
우리 중에 누가 자기의 영적인 사역에 적격인가?
완전한 적격성을 느껴야 우리의 영적인 부적격성을 느끼지 않게 되겠는가? 부족함을 의식함에 있어 우리가 양심적이면 양심적일수록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더욱 애쓰고 분투한다. 이런 면에서 가장 심하게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의무감이 지나치게 발달한 완전주의자이다. 우리가 영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과로는 더욱 격렬해지는 법이다. 우리 사역이 요구하는 바에 접하여 정신적인 준비가 부적절하다거나 훈련이 불충분하다고 의식하는 것은, 다시말해서 우리의 정신적인 자본이 너무 빈약하여 과중한 수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모두 우리를 극단으로 인도해가는 것이다.
-근심하는 태도.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습관은 영적인 열심에 대한 신경을 마비시킬 수도 있으며 위험한 내적인 긴장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걱정이 유전적인 경향성을 나타내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습관성인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며 어찌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방관해 두어 생활 형식의 일부가 된 습관을 깨뜨리는 데는 무력해 보인다.
조사, 건강, 마음의 문제들, 언어공부, 설교와 메세지의 준비, 까다로운 모임이나 면담, 사역하는 동료들과의 관계, 이 하나 하나가 근심을 더해주는 재료가 된다.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근심이란 말은 마음이 나뉘어지고 산란하여 동요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한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는 상태이다.
-두려운 마음상태.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일반적인 원인이다. 신경성 체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만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험이 없는 일을 맡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근심의 고뇌로 이 소심한 영혼을 채운다. 많은 경우에 그 실제적인 정당성이 인정되는 육체적인 두려움은 신경계통과 영적인 생활 양면에 원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잠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깨어있는 동안에도 이름모를 공포에 빠진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피하려던 그 상황을 오히려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두려움에는 응답지 않으시고 믿음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같은 마음에 함께 존재할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할까하는 두려움은 함정이 될 뿐 아니라 과로를 초래한다.
-다른이들에 대한 나쁜 태도(마음 가짐).
긴장을 일으키는 열매를 맺게 된다. 내적인 원한을 품고 있을 때, 때로는 거의 무의식적이지만, 시기, 질투, 악한 뜻, 증오심이 그러하듯 신경계통에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 바울이 근원적인 이유도 없이 이 파괴적인 정서를 단호히 "버리라"고 권면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죄악이고, 영혼을 파괴하며,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수많은 방향에서 우리에게 쏟아지는 피할 수 없는 중압감이 이런 원한들 중의 하나에(또는 모두에) 첨가되면 내적인 긴장이 폭발점에 도달하는 경우 가 많다.
선교분야에서는 연구시간의 부족, 편지, 면담, 가정 일, 방해물 등이 모두 긴장에 자기 몫을 첨가한다. 집이나 상담실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압박감이 지속되면, 그들은 관련이 있어서거나 호기심에서거나 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과 조용함을 뺏아간다.
여기에다 바울이 "온 교회들을 돌봄"이라고 불렀던 일, 즉 영혼들에 대한 적합한 관심과 "당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무리"를 위한 영적인 복지를 돌보는 일이 첨가되면 당신은 정신이 아찔하고 몸이 움츠러드는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힘을 빼고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열대성기후에서는, 누가 피로감없이 살 수 있겠는가?
필연적인 결과들
이런 류의 피로와 긴장은 몸과 마음 양면의 혹사를 가져온다는 말은 의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피로가 지닌 곤란한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긴장 아래 살아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느낄 때 이런 분위기에서 영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로는 육체의 무기력을 나타낸다.
여러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신경성 소화불량은 그들이 먹은 음식보다는 그들이 하는 생각에 원인이 더 있지 않을까?
우리 나이에 편두통과 불면증의 경향이 있어 적절한 알약에 심각히 의존하게 되는 것은 혹사된 신경계통이 자신을 피로하도록(하나님은 결코 피로를 일으키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내 팽개친데 대하여 우리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경성으로 추정되는 많은 질환이 사실은 영적인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건설적인 목표들로 유도되어야 할 에너지가 헛되게 낭비된다.
-정신적 혼란.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기도한다. "여기 저기 허둥대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 바라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내적인 긴장들은 어차피 정신적인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런 마음으로 영적인 일들에 전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혼란은 지속성을 띄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시간에는 생각을 특별히 조절할 수 없게 되어 기둥은 놔두고 바늘같은 일,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일에 비참하게 매달린다. 잠자리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찌할지 몰라하는 것은 마음 속의 보다 깊은 불안을 증명하는 것이다.
논리의 절정은 영적인 쇠약함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이 동맹을 형성하여 영(靈)에 대항할 때 그의 쇠약해짐은 어떠하겠는가? 경험이 많고 냉정한 우리의 적은 불타는 화살로나 압박하는 구름으로나 그가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극 좋게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강점을 발휘할 독특한 기회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다. 이리하여 민감하고 심하게 눌린 영혼을 영적인 노예의 신분이 되게 한다 - 즉, 좌절감, 그리고 생활이나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 때문에 억눌려 고민하게 한다.
만병통치약
이러한 감옥에서 나오는 길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서
피로와 긴장을 없애주심으로
우리의 정돈된 생활이
하나님의 평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일에 불과한 것인가?
자신과 하나님께 처절하도록 정직해질 준비가 된 사람들, 열쇠를 찾으려고 깊이 열중해 있는 사람들이 찾을 "탈출로"는 있다. 구원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데는 다음의 단계들이 필요로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을 다시 발견함.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복잡한 인격성의 가장 깊은 필요에 응하는 길이다. 하나님이 해결책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가 관여된 일에 우리가 뛰어들 진실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계시를 허락하실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현재를 억누르고 있는 필요에 정확히 알맞도록 점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필요하는 것은 엘 샤다이(El Shaddai /모든 일에 넉넉하신 하나님), 우리가 자신의 불충분을 의식하는데 대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인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 개념과 지식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본성의 복합성과 연약함을 처리하시기에는 부적당하다. 우리는 보다 큰 하나님을 소유해야 한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을 이해하는 대신 우리의 불충분을 확대하는 것은 해로울뿐만 아니라 죄가 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았던가? 출애굽기 4장 14절에서 모세의 태도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모세가 책임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설비를 그에게 공급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을 통해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평탄한 지름길은 없다. 에베소서 1장 3절, 베드로후서 1장 3절, 고린도전서 3장 21절 같은 깜짝 놀랄 단어들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부족을 위해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이 자원들을 이용할 수있음을 믿으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그가 그 필요에 대처할 풍성한 만물을 갖추어 놓으셨다. 육체나 마음이나 영혼의 어느 영역에 있는 필요라해도 이에 넉넉히 대처하신다.
배고픈 군중에게 먹일 빵이 없다는 제자들의 문제가 그리스도에게는 걱정할 만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심이라."그는 언제나 알고 계신다.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확신을 되찾게 되면 피로는 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긴장이란 우리가 불충분한 하나님을 소유할 때만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낱 죄인으로서의 자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면 구원의 길을 따라 가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질수 있는 짐 이상을 지도록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요구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질수 있는 짐의 한계를 알고 계시다. 성경이 가르치고 또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리고 이 말에 의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일들을 할 능력이 있다."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출 18:23).
이 구절은 영속적인 원리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모두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시간들이라고 불평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낮이 12시간이 아니냐?"이 말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임무마다 그것을 성취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의미하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의 활동들 중 어떤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부과한 일들일 가능성이 크며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가 눈에 띄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기량을 경시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이와 똑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의 불성실이 현저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인준을 확보하는데 더 신경을 쓰지는 않는가?
영적인 외모를 유지하므로써 영적인 것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굉장히 피로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일쑤는 아니며 자주 소리내어 우리 자신과 고된 운명을 탓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깜짝 놀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연민은 본질상 사탄의 일임을 명백히 하셨다(마 16:23).
자아란 한낱 죄인인 것이 사실이며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참된 근원은 자아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음의 보좌를 포기하지 않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깃발이 인간 영혼의 망루 위에서 나부낄 때 피로는 청명(淸明)에게 자리를 내준다.
구원을 향한 세번째 단계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계속 구조를 받기 원한다면 태도의 급진적인 변화, 곧 순수한 마음의 재생이 따라야만 한다. 정신적인 자세가 변함없이 남아있는 한 긴장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노고에 중압감을 느낀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동정하거나 변명하는 대신, 이제는 더 이상 부드럽게 피할 수 없는 약점으로 보지 말고 나무랄 만하고 불필요한 죄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압감을 더 이상 우리를 몰아부치는 짐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충만함을 전시하기 위한 진열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이제 내가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출 6:1).
이제 우리의 눈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하나님께 고정된다. 우리의 연약함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일할 때 그에게 더 큰 영광이 돌 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변화, 마음의 갱생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어떻게 그런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은 정확하고 목적있는 의지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다.
당신은 모든 책임의 짐을 그리스도께 가져가 거기 남겨둘 것을 선택하는가? 당신은 근심과 두려움이 영원히 마치는 것을 선택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권면한다."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3),"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이 일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 안에 이루실 일이다. 디도서 3장 5절은 이 일이 성령의 사역임을 나타낸다.
우리가 자신을 변명하고 책임을 벗어나려고 하기를 한번에 모두 기꺼이 끝내버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체로 던져버리면 길이 열려지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시게 된다. 우리는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주님과 그의 한량없으신 자원을 찬미할 정도로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이 "그의 넘치는 은혜"를 펼치도록 기회를 드리게 될 때 우리의 연약함을 기뻐하기조차 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의 항상 넘치는 양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초자연적일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끝가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성령께서 주 예수의 돕는 은혜를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우리 안에 함께 거하셔서 영혼의 일상적인 그리고 시시각각의 필요들을 해결해 주시며 긴장과 피로를 제거해 주신다. 그가 마음의 안식을 약속하지 않으셨던가?"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정규적인 기분전환과 평온은 육체적인 수준에 가치있는 공헌을 할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찌어다"(시 46:10)는 구절은 이 달음질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거의 마음에 두지 않는 법규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일으킨 대부분의 문제거리들은 침착하고 조용할 능력이 없는데 기인하는 것이다"라고 파스칼은 쓰고 있다. 만일 우리가 기분전환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보다 더 바쁜 것이다. 주 예수는 산정(山頂)의 고요를 계속 구하셨다. 그는 제자들 에게 기분전환(relaxation)을 위해 따로 떨어져 지낼 필요성을 마음에 새기게 하셨는데 그의 충고를 무시하면 우리 자신이 손해를 입게 된다. 한 임무에서 다른 임무로 옮길 때는 한가한 마음을 가지는 능력을 탐내도록 하자.
최근에 하나님의 신자들 중의 한분이 자기를 나타내보이는 한 문장으로 기도를 끝냈다."유쾌하게 새날을 맞겠습니다."유쾌하게 !
피로감도 없고 떨리는 긴장도 없이 - 충분하신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마음일 뿐이다.
-열린편지/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오스왈드 샌더스 중에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과로와 긴장은 우리 시대의 한 특징이다. 모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괴하는 일에 순응하고 있다. 사실을 말한다면, 믿는 영혼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정을 제공하신다고 굳게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조리에 너무도 쉽게 순응해 버린다.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목사들과 선교사들일지라도 신경성의 해로운 긴장에서 결코 제외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울며 기도하고 자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머무는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같아 보인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렇게 될 필요도 없다.
허드슨 테일러 박사는 선교사로 일하게 된 초기와 중국대륙 선교부를 창설한 후 몇년동안, 이러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당시의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전에 고생하며 괴로움을 당했던 사람인데 근래에는 영혼의 휴식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그 후에 그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급진적으로 변화된 간증을 할 수있었다."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내게 맡겨진 일의 양이 너무 많거나, 책임이 몹시 중하거나, 극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의 일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은 모두 내게서 사라졌다."하나님께는 편애의 죄가 없으시므로 그가 자녀들 중 하나에게 하신 일이라면 모두에게도 기꺼이 하실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긴장이란 단어는 "뻣뻣하여 팽팽해진 상태에서 정신적 과로, 투쟁의 격렬함, 근육긴장을 일으키는 신경성 불안이 생기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신경적 긴장이 모두 해로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프의 줄은 필요한 만큼 팽팽해야만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정확하게 음악적인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가장 높은 성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가치있는 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이용할 때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정한 정도의 긴장이 포함된다.
누가복음 12장 50절에는 우리 주님이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는 말씀도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긴장해야 할 필요가 있으셨다.
과로는 "지나친 긴장"으로 정의되며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거나 해로운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때 생긴다.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원인들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힘든 일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오해하고들 있는데, 일 자체가 진짜 원인은 아니다. 일 자체가 힘이 든 일이라 해도 마음이 안식하고 있을 때는 건강을 가져온다.
일은 피곤을 낳지만 긴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긴장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신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사역자에게 과로한 건강상태를 유발시키는 요인들로써 적어도 다음의 네가지 요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부적격성을 느낌.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대해 영적인 자원의 부족함과 정신적 예민성을 계속 의식하는 것이 긴장을 낳게 하는 근원이다. 사실 대개는 기초가 잘 놓여있기 마련이다.
우리 중에 누가 자기의 영적인 사역에 적격인가?
완전한 적격성을 느껴야 우리의 영적인 부적격성을 느끼지 않게 되겠는가? 부족함을 의식함에 있어 우리가 양심적이면 양심적일수록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더욱 애쓰고 분투한다. 이런 면에서 가장 심하게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의무감이 지나치게 발달한 완전주의자이다. 우리가 영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과로는 더욱 격렬해지는 법이다. 우리 사역이 요구하는 바에 접하여 정신적인 준비가 부적절하다거나 훈련이 불충분하다고 의식하는 것은, 다시말해서 우리의 정신적인 자본이 너무 빈약하여 과중한 수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모두 우리를 극단으로 인도해가는 것이다.
-근심하는 태도.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습관은 영적인 열심에 대한 신경을 마비시킬 수도 있으며 위험한 내적인 긴장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걱정이 유전적인 경향성을 나타내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습관성인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며 어찌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방관해 두어 생활 형식의 일부가 된 습관을 깨뜨리는 데는 무력해 보인다.
조사, 건강, 마음의 문제들, 언어공부, 설교와 메세지의 준비, 까다로운 모임이나 면담, 사역하는 동료들과의 관계, 이 하나 하나가 근심을 더해주는 재료가 된다.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근심이란 말은 마음이 나뉘어지고 산란하여 동요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한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는 상태이다.
-두려운 마음상태.
긴장과 과로를 일으키는 일반적인 원인이다. 신경성 체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만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험이 없는 일을 맡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근심의 고뇌로 이 소심한 영혼을 채운다. 많은 경우에 그 실제적인 정당성이 인정되는 육체적인 두려움은 신경계통과 영적인 생활 양면에 원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잠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깨어있는 동안에도 이름모를 공포에 빠진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피하려던 그 상황을 오히려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두려움에는 응답지 않으시고 믿음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같은 마음에 함께 존재할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할까하는 두려움은 함정이 될 뿐 아니라 과로를 초래한다.
-다른이들에 대한 나쁜 태도(마음 가짐).
긴장을 일으키는 열매를 맺게 된다. 내적인 원한을 품고 있을 때, 때로는 거의 무의식적이지만, 시기, 질투, 악한 뜻, 증오심이 그러하듯 신경계통에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 바울이 근원적인 이유도 없이 이 파괴적인 정서를 단호히 "버리라"고 권면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죄악이고, 영혼을 파괴하며,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수많은 방향에서 우리에게 쏟아지는 피할 수 없는 중압감이 이런 원한들 중의 하나에(또는 모두에) 첨가되면 내적인 긴장이 폭발점에 도달하는 경우 가 많다.
선교분야에서는 연구시간의 부족, 편지, 면담, 가정 일, 방해물 등이 모두 긴장에 자기 몫을 첨가한다. 집이나 상담실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압박감이 지속되면, 그들은 관련이 있어서거나 호기심에서거나 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과 조용함을 뺏아간다.
여기에다 바울이 "온 교회들을 돌봄"이라고 불렀던 일, 즉 영혼들에 대한 적합한 관심과 "당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무리"를 위한 영적인 복지를 돌보는 일이 첨가되면 당신은 정신이 아찔하고 몸이 움츠러드는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힘을 빼고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열대성기후에서는, 누가 피로감없이 살 수 있겠는가?
필연적인 결과들
이런 류의 피로와 긴장은 몸과 마음 양면의 혹사를 가져온다는 말은 의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피로가 지닌 곤란한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긴장 아래 살아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느낄 때 이런 분위기에서 영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로는 육체의 무기력을 나타낸다.
여러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신경성 소화불량은 그들이 먹은 음식보다는 그들이 하는 생각에 원인이 더 있지 않을까?
우리 나이에 편두통과 불면증의 경향이 있어 적절한 알약에 심각히 의존하게 되는 것은 혹사된 신경계통이 자신을 피로하도록(하나님은 결코 피로를 일으키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내 팽개친데 대하여 우리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경성으로 추정되는 많은 질환이 사실은 영적인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건설적인 목표들로 유도되어야 할 에너지가 헛되게 낭비된다.
-정신적 혼란.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기도한다. "여기 저기 허둥대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 바라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내적인 긴장들은 어차피 정신적인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런 마음으로 영적인 일들에 전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혼란은 지속성을 띄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시간에는 생각을 특별히 조절할 수 없게 되어 기둥은 놔두고 바늘같은 일,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일에 비참하게 매달린다. 잠자리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찌할지 몰라하는 것은 마음 속의 보다 깊은 불안을 증명하는 것이다.
논리의 절정은 영적인 쇠약함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이 동맹을 형성하여 영(靈)에 대항할 때 그의 쇠약해짐은 어떠하겠는가? 경험이 많고 냉정한 우리의 적은 불타는 화살로나 압박하는 구름으로나 그가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극 좋게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강점을 발휘할 독특한 기회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다. 이리하여 민감하고 심하게 눌린 영혼을 영적인 노예의 신분이 되게 한다 - 즉, 좌절감, 그리고 생활이나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 때문에 억눌려 고민하게 한다.
만병통치약
이러한 감옥에서 나오는 길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서
피로와 긴장을 없애주심으로
우리의 정돈된 생활이
하나님의 평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일에 불과한 것인가?
자신과 하나님께 처절하도록 정직해질 준비가 된 사람들, 열쇠를 찾으려고 깊이 열중해 있는 사람들이 찾을 "탈출로"는 있다. 구원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데는 다음의 단계들이 필요로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을 다시 발견함.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복잡한 인격성의 가장 깊은 필요에 응하는 길이다. 하나님이 해결책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가 관여된 일에 우리가 뛰어들 진실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계시를 허락하실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현재를 억누르고 있는 필요에 정확히 알맞도록 점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필요하는 것은 엘 샤다이(El Shaddai /모든 일에 넉넉하신 하나님), 우리가 자신의 불충분을 의식하는데 대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인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 개념과 지식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본성의 복합성과 연약함을 처리하시기에는 부적당하다. 우리는 보다 큰 하나님을 소유해야 한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을 이해하는 대신 우리의 불충분을 확대하는 것은 해로울뿐만 아니라 죄가 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았던가? 출애굽기 4장 14절에서 모세의 태도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모세가 책임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설비를 그에게 공급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을 통해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평탄한 지름길은 없다. 에베소서 1장 3절, 베드로후서 1장 3절, 고린도전서 3장 21절 같은 깜짝 놀랄 단어들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부족을 위해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이 자원들을 이용할 수있음을 믿으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그가 그 필요에 대처할 풍성한 만물을 갖추어 놓으셨다. 육체나 마음이나 영혼의 어느 영역에 있는 필요라해도 이에 넉넉히 대처하신다.
배고픈 군중에게 먹일 빵이 없다는 제자들의 문제가 그리스도에게는 걱정할 만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심이라."그는 언제나 알고 계신다.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확신을 되찾게 되면 피로는 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긴장이란 우리가 불충분한 하나님을 소유할 때만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낱 죄인으로서의 자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면 구원의 길을 따라 가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질수 있는 짐 이상을 지도록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요구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질수 있는 짐의 한계를 알고 계시다. 성경이 가르치고 또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리고 이 말에 의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일들을 할 능력이 있다."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출 18:23).
이 구절은 영속적인 원리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모두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시간들이라고 불평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낮이 12시간이 아니냐?"이 말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임무마다 그것을 성취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의미하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의 활동들 중 어떤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부과한 일들일 가능성이 크며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가 눈에 띄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기량을 경시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이와 똑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의 불성실이 현저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인준을 확보하는데 더 신경을 쓰지는 않는가?
영적인 외모를 유지하므로써 영적인 것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굉장히 피로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일쑤는 아니며 자주 소리내어 우리 자신과 고된 운명을 탓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깜짝 놀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연민은 본질상 사탄의 일임을 명백히 하셨다(마 16:23).
자아란 한낱 죄인인 것이 사실이며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참된 근원은 자아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음의 보좌를 포기하지 않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깃발이 인간 영혼의 망루 위에서 나부낄 때 피로는 청명(淸明)에게 자리를 내준다.
구원을 향한 세번째 단계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계속 구조를 받기 원한다면 태도의 급진적인 변화, 곧 순수한 마음의 재생이 따라야만 한다. 정신적인 자세가 변함없이 남아있는 한 긴장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노고에 중압감을 느낀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동정하거나 변명하는 대신, 이제는 더 이상 부드럽게 피할 수 없는 약점으로 보지 말고 나무랄 만하고 불필요한 죄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압감을 더 이상 우리를 몰아부치는 짐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충만함을 전시하기 위한 진열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이제 내가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출 6:1).
이제 우리의 눈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하나님께 고정된다. 우리의 연약함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일할 때 그에게 더 큰 영광이 돌 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변화, 마음의 갱생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어떻게 그런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은 정확하고 목적있는 의지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다.
당신은 모든 책임의 짐을 그리스도께 가져가 거기 남겨둘 것을 선택하는가? 당신은 근심과 두려움이 영원히 마치는 것을 선택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권면한다."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3),"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이 일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 안에 이루실 일이다. 디도서 3장 5절은 이 일이 성령의 사역임을 나타낸다.
우리가 자신을 변명하고 책임을 벗어나려고 하기를 한번에 모두 기꺼이 끝내버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체로 던져버리면 길이 열려지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시게 된다. 우리는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주님과 그의 한량없으신 자원을 찬미할 정도로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이 "그의 넘치는 은혜"를 펼치도록 기회를 드리게 될 때 우리의 연약함을 기뻐하기조차 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의 항상 넘치는 양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초자연적일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끝가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성령께서 주 예수의 돕는 은혜를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우리 안에 함께 거하셔서 영혼의 일상적인 그리고 시시각각의 필요들을 해결해 주시며 긴장과 피로를 제거해 주신다. 그가 마음의 안식을 약속하지 않으셨던가?"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정규적인 기분전환과 평온은 육체적인 수준에 가치있는 공헌을 할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찌어다"(시 46:10)는 구절은 이 달음질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거의 마음에 두지 않는 법규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일으킨 대부분의 문제거리들은 침착하고 조용할 능력이 없는데 기인하는 것이다"라고 파스칼은 쓰고 있다. 만일 우리가 기분전환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보다 더 바쁜 것이다. 주 예수는 산정(山頂)의 고요를 계속 구하셨다. 그는 제자들 에게 기분전환(relaxation)을 위해 따로 떨어져 지낼 필요성을 마음에 새기게 하셨는데 그의 충고를 무시하면 우리 자신이 손해를 입게 된다. 한 임무에서 다른 임무로 옮길 때는 한가한 마음을 가지는 능력을 탐내도록 하자.
최근에 하나님의 신자들 중의 한분이 자기를 나타내보이는 한 문장으로 기도를 끝냈다."유쾌하게 새날을 맞겠습니다."유쾌하게 !
피로감도 없고 떨리는 긴장도 없이 - 충분하신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마음일 뿐이다.
-열린편지/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오스왈드 샌더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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