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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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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며 수도사였던 루터가 수녀원을 뛰쳐나온 수녀와 결혼한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루터는 본래 사제들이나 수녀들의 독신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다. 루터는 줄곧 그들의 결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1523년 생선을 실어 나르는 포장마차 한 대가 먼 길을 달려 비텐베르크 성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포장을 들어올렸을 때 마차에는 생선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9명의 수녀들이 숨어있었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녀원을 빠져나와 루터를 찾아온 것이다. 루터는 이들에게 함께 살아갈 가족을 찾아주거나 결혼 상대를 찾아 결혼시키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비텐베르크대학 가까이에 있던 수도원에서 기숙하며 수도사 차림으로 지냈다.
수녀원을 탈출해서 비텐베르크로 왔던 수녀 중 한 명이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그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 태어나서 10세 때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수녀원에 맡겨졌다. 그후 수녀원에서 성장했고 다른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왔다. 비텐베르크로 온 뒤 루터는 카타리나를 위해 몇 번 중매를 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사되지 않았다. 루터는 처음에는 카타리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16년이라는 나이차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1525년 6월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때 루터의 나이는 42세,신부는 26세였다. 후일 루터는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주님은 갑자기 나를 결혼으로 몰아넣으셨다.” 오늘날도 루터의 결혼기념일이 돌아오면 비텐베르크 도시 전체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루터의 결혼식을 재현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루터는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에게만은 달랐던 것 같다. 결혼 초기 루터의 글을 보면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라는 뜻의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또한 부인의 이름이 카타리나였으므로 애칭으로 ‘캐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애칭도 점차 ‘케테’로 변했다. 케테란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가정살림에는 전혀 무관심했고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루터의 명성은 높았지만 당시 대학교수의 봉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루터의 집안은 대식구였다. 자신의 자녀 6명과 많은 조카들,병으로 죽은 친구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다.
루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끊이지 않았고 여행이 쉽지 않은 시대였음으로 손님들은 금방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유 없는 살림에 식솔은 많고 식사 준비,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끊이지 않았다. 틈을 내어 닭과 돼지도 치고 채소도 심어 가계에 보탬을 줘야 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불평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든 일을 감당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문제였다. 건장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루터 집안의 식탁은 언제나 공동식사였다. 학생 방문객 동료교수들로 식탁은 언제나 붐볐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기록한 것이 유명한 루터의 ‘식탁대담’(Tischreden)이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시중을 드는 주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3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두 딸을 잃는 슬픔도 경험했다. 루터는 부정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1000년 동안 어느 주교에게도 허락지 않으셨던 크나큰 축복을 내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녀들은 독일과 보헤미아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내게는 소중하고 귀합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1523년 생선을 실어 나르는 포장마차 한 대가 먼 길을 달려 비텐베르크 성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포장을 들어올렸을 때 마차에는 생선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9명의 수녀들이 숨어있었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녀원을 빠져나와 루터를 찾아온 것이다. 루터는 이들에게 함께 살아갈 가족을 찾아주거나 결혼 상대를 찾아 결혼시키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비텐베르크대학 가까이에 있던 수도원에서 기숙하며 수도사 차림으로 지냈다.
수녀원을 탈출해서 비텐베르크로 왔던 수녀 중 한 명이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그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 태어나서 10세 때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수녀원에 맡겨졌다. 그후 수녀원에서 성장했고 다른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왔다. 비텐베르크로 온 뒤 루터는 카타리나를 위해 몇 번 중매를 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사되지 않았다. 루터는 처음에는 카타리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16년이라는 나이차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1525년 6월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때 루터의 나이는 42세,신부는 26세였다. 후일 루터는 자신의 결혼에 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주님은 갑자기 나를 결혼으로 몰아넣으셨다.” 오늘날도 루터의 결혼기념일이 돌아오면 비텐베르크 도시 전체는 축제분위기가 되고 루터의 결혼식을 재현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루터는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에게만은 달랐던 것 같다. 결혼 초기 루터의 글을 보면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라는 뜻의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또한 부인의 이름이 카타리나였으므로 애칭으로 ‘캐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애칭도 점차 ‘케테’로 변했다. 케테란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가정살림에는 전혀 무관심했고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루터의 명성은 높았지만 당시 대학교수의 봉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루터의 집안은 대식구였다. 자신의 자녀 6명과 많은 조카들,병으로 죽은 친구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다.
루터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끊이지 않았고 여행이 쉽지 않은 시대였음으로 손님들은 금방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유 없는 살림에 식솔은 많고 식사 준비,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끊이지 않았다. 틈을 내어 닭과 돼지도 치고 채소도 심어 가계에 보탬을 줘야 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불평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모든 일을 감당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문제였다. 건장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할 때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루터 집안의 식탁은 언제나 공동식사였다. 학생 방문객 동료교수들로 식탁은 언제나 붐볐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기록한 것이 유명한 루터의 ‘식탁대담’(Tischreden)이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시중을 드는 주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3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두 딸을 잃는 슬픔도 경험했다. 루터는 부정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1000년 동안 어느 주교에게도 허락지 않으셨던 크나큰 축복을 내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녀들은 독일과 보헤미아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내게는 소중하고 귀합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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