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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
효도하겠습니다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멀고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함구하며
자녀의 크고 작은 잘못에 역정과 함께
엄격한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 아버지 상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유난이도 강한 카리스마...,
옹고집..., 구두쇠...,
자라면서 아버지의 미소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철학은 윤리 교과서 그 자체로
불의와 타협이라는 것을 몰랐고...
가족이 진 빗을 청산하고자
월남전에서 1년 6개월을 보낸 한 분이 계십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녀에게
천원짜리를 용돈으로 준 적이 한 번도없는 분,
바로 존경하는 제 아버지입니다.
당신의 재산 목록 1호인 군대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보면 헌병 모자를 쓰고
가슴에 수류탄을 단 늠늠한 아버지인데
제 어릴 적 기억은 언제나 병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빌리면
월남에서 돌아 온 직후 부산에 정착했는데
그 때부터 시름시름
원인 모를 질병으로 앓는 바람에
마흔을 못 넘길 줄 알았다고 하지요.
월남에서 항공기를 타고 드럼통에 들은 물질을
정글에 항공 살포를 하셨는데 얼마 지나면
노랗게 나무가 타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보안이라 알지 못했지만
고엽제가 원인가 아닌가 추측만 갈뿐입니다.
학창시절 완고하고 틈이 없는
짠돌이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언제나 대화 상대는 어머니였고
아버지와의 대화는 별로 기억이 없었지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6년 12월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워낙 강하셔서
여동생이 다섯살 되던 해 부터 일을 시작하셨는데
하루는 직장에 하루는 집에 계셨지요.
문제의 이날 아침은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 6시,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들고 나서다가
역시 출근 준비를 하시는 아버지께 갔습니다.
우물쭈물...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지요.
"아..버지.. 저..."
"무슨 일이냐? 학교 안 늦어?"
싸늘함이 느껴지는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
용기를 내었지요.
"아버지? 용...돈 좀 .. 주세...요"
철들면서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 내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참을 뒤적이시더니
500원짜리 동전 한 닢을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학교 늦겠다. 어서 가거라"
솔직히 재촉하시는 아버지 면전에
동전을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접어드는 아들이
처음으로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500짜리 동전 한 닢이 뭐람.
내가 초등학생 인줄 아시나..."
하루 종일 기분이 매우 나빴습니다.
평소 구두쇠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철없는 아들은 생각할 수록 분하고 또 분했습니다.
그날 저녁 11시가 조금 넘어 집에 왔는데
어머니게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오니? 춥지?"
아직도 분이 안풀린 아들은
오히려 어머니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그럼 한 겨울인데 안 추워?"
버럭 소리를 질렀지요.
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들은 몰랐습니다.
대충 씻고 책상에 앉았는데
안방에서 콜록거리며 들려오는
기침 소리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18평의 소형 옛날 아파트다 보니
방음이 안되었지요.
밤늦게 아들의 밥상을 치운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넌즈시 물으셨습니다.
"며칠 전에 용돈을 주었는데 그 새 다 썼니?"
"엄마는... 책 사보고 컵라면 사서
밥 먹다 보면 금방 없어요.
그리고 넉넉하게 주지도 않으면서..."
"그래서 아침에 네 아버지께 용돈을 달라고 했니?"
"그럼 아들이 아버지한테 용돈도 달라고 못해.
그리고 500원짜리 동전한 닢이 어떻게 용돈이야.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초등학생 인줄 아시나봐"
이렇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안방에서 연방 기침 소리가 들려왔지요.
"엄마,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네.
아버지께 꽁생원 그만하고 약좀 드시라고 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이만원을 놓고 나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 너 아침에 아버지께서 주신 500원이
어떤 돈인 줄 아니?"
"......"
"네 아버지 오늘 버스비 였어.
마침 아버지도 오늘따라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으셨던가 보더라.
저녁에 퇴근하고 오시면서
네 용돈 좀 넉넉하게 주라고 역정을 많이 내셨어"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아버지의 500짜리 동전 한 닢은
아버지의 전부 였던 것입니다.
병약한 아버지께서는 철 없는 아들에게
500짜리 동전 한 닢을 털어주시고는
왕복 10정거장이 넘는 길을 찬바람을 맞으시며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성격에 자기 것 없으면 말지
남에게 절대로 빌리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못난 아들은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밤새 가슴에 못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더우기 오늘 아침 아들의 바지 주머니속에는
천원짜리 지폐가 석장 정도 들어있었지요.
적어도 오늘 아침 만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부자였었는데...
특별히 쓸데도 없었으면서
욕심을 부렸던 아들은 아버지께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런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니,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적이
네번 있었는데 언 제인줄 아나?"
"언젠데요?"
"제일 처음 기뻤던 것은 남들이 가면
다 죽는다고 못가게 했던 월남에서
무사하게 살아와 부산항에 내리던 날이고,
둘째는 네가 태어나던 날이데이.
그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제.
세번째는 네가 장가들던 날이었고
마지막은 네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이었다"
아버지의 짧은 이 한마디에
아들은 다시 한 번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인생에는 나 밖에 없었는데
못난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
사랑합니다"
이글은 MBC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멀고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함구하며
자녀의 크고 작은 잘못에 역정과 함께
엄격한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 아버지 상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유난이도 강한 카리스마...,
옹고집..., 구두쇠...,
자라면서 아버지의 미소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철학은 윤리 교과서 그 자체로
불의와 타협이라는 것을 몰랐고...
가족이 진 빗을 청산하고자
월남전에서 1년 6개월을 보낸 한 분이 계십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녀에게
천원짜리를 용돈으로 준 적이 한 번도없는 분,
바로 존경하는 제 아버지입니다.
당신의 재산 목록 1호인 군대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보면 헌병 모자를 쓰고
가슴에 수류탄을 단 늠늠한 아버지인데
제 어릴 적 기억은 언제나 병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빌리면
월남에서 돌아 온 직후 부산에 정착했는데
그 때부터 시름시름
원인 모를 질병으로 앓는 바람에
마흔을 못 넘길 줄 알았다고 하지요.
월남에서 항공기를 타고 드럼통에 들은 물질을
정글에 항공 살포를 하셨는데 얼마 지나면
노랗게 나무가 타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보안이라 알지 못했지만
고엽제가 원인가 아닌가 추측만 갈뿐입니다.
학창시절 완고하고 틈이 없는
짠돌이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언제나 대화 상대는 어머니였고
아버지와의 대화는 별로 기억이 없었지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6년 12월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워낙 강하셔서
여동생이 다섯살 되던 해 부터 일을 시작하셨는데
하루는 직장에 하루는 집에 계셨지요.
문제의 이날 아침은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 6시,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들고 나서다가
역시 출근 준비를 하시는 아버지께 갔습니다.
우물쭈물...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지요.
"아..버지.. 저..."
"무슨 일이냐? 학교 안 늦어?"
싸늘함이 느껴지는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
용기를 내었지요.
"아버지? 용...돈 좀 .. 주세...요"
철들면서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 내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참을 뒤적이시더니
500원짜리 동전 한 닢을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학교 늦겠다. 어서 가거라"
솔직히 재촉하시는 아버지 면전에
동전을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접어드는 아들이
처음으로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500짜리 동전 한 닢이 뭐람.
내가 초등학생 인줄 아시나..."
하루 종일 기분이 매우 나빴습니다.
평소 구두쇠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철없는 아들은 생각할 수록 분하고 또 분했습니다.
그날 저녁 11시가 조금 넘어 집에 왔는데
어머니게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오니? 춥지?"
아직도 분이 안풀린 아들은
오히려 어머니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그럼 한 겨울인데 안 추워?"
버럭 소리를 질렀지요.
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들은 몰랐습니다.
대충 씻고 책상에 앉았는데
안방에서 콜록거리며 들려오는
기침 소리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18평의 소형 옛날 아파트다 보니
방음이 안되었지요.
밤늦게 아들의 밥상을 치운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넌즈시 물으셨습니다.
"며칠 전에 용돈을 주었는데 그 새 다 썼니?"
"엄마는... 책 사보고 컵라면 사서
밥 먹다 보면 금방 없어요.
그리고 넉넉하게 주지도 않으면서..."
"그래서 아침에 네 아버지께 용돈을 달라고 했니?"
"그럼 아들이 아버지한테 용돈도 달라고 못해.
그리고 500원짜리 동전한 닢이 어떻게 용돈이야.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초등학생 인줄 아시나봐"
이렇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안방에서 연방 기침 소리가 들려왔지요.
"엄마,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네.
아버지께 꽁생원 그만하고 약좀 드시라고 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이만원을 놓고 나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 너 아침에 아버지께서 주신 500원이
어떤 돈인 줄 아니?"
"......"
"네 아버지 오늘 버스비 였어.
마침 아버지도 오늘따라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으셨던가 보더라.
저녁에 퇴근하고 오시면서
네 용돈 좀 넉넉하게 주라고 역정을 많이 내셨어"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아버지의 500짜리 동전 한 닢은
아버지의 전부 였던 것입니다.
병약한 아버지께서는 철 없는 아들에게
500짜리 동전 한 닢을 털어주시고는
왕복 10정거장이 넘는 길을 찬바람을 맞으시며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성격에 자기 것 없으면 말지
남에게 절대로 빌리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못난 아들은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밤새 가슴에 못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더우기 오늘 아침 아들의 바지 주머니속에는
천원짜리 지폐가 석장 정도 들어있었지요.
적어도 오늘 아침 만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부자였었는데...
특별히 쓸데도 없었으면서
욕심을 부렸던 아들은 아버지께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런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니,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적이
네번 있었는데 언 제인줄 아나?"
"언젠데요?"
"제일 처음 기뻤던 것은 남들이 가면
다 죽는다고 못가게 했던 월남에서
무사하게 살아와 부산항에 내리던 날이고,
둘째는 네가 태어나던 날이데이.
그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제.
세번째는 네가 장가들던 날이었고
마지막은 네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이었다"
아버지의 짧은 이 한마디에
아들은 다시 한 번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인생에는 나 밖에 없었는데
못난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
사랑합니다"
이글은 MBC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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