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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 2004 년 11월 21일 발행 (부정기 발행)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바울의 자랑 김재성/ 민들레성서마을지기
고전 9:1-18
지난 호에서 한 목회자가 목사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목사도 농사든 빵 만들기든 뭐든 해서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설교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읽으면서, 농촌 목회자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그들의 설교의 자유 문제 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목회 외에 또 다른 일을 가지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회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힘든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또, 목회자가 다른 일을 가지면 목회에 소홀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사도 바울도 꼭 같은 문제로 고민했다. 그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갔는지 보는 것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비용으로 군에 복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 떼를 치고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 밭을 가는 사람은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서 밭을 갈고, 타작을 하는 사람은 한 몫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7-12a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변호하고 적대자들을 고린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운 이후에 그 교회에 들어와서 목회자 역할을 하면서 교회를 장악하려고 한 자들이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예수를 전하면서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바울은 사도 자격이 없다고 모함을 하였는데, 특히 바울이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동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비난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뭔가 부족한 구석이 있으니까 노동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떳떳하다면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앞의 인용문 마지막 구절에서, “다른 사람들”은 바로 이 적대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그곳의 목회자로서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이런 비난을 염두에 두고서,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그들보다 훨씬 더 교회의 부양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런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12b절).
그런데, 바울이 그 교회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이 어찌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줄 수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R. F. 호크의 연구(『바울 선교의 사회적 상황』, 55-63)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그는 당시 철학자들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식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것은 강의료를 받는 것, 부하고 권력 있는 자의 가정에 입주하는 것, 구걸, 그리고 근로이다.
앞의 두 가지는 비교적 많은 수입을 보장받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강의료를 받지 않았으며 적은 돈으로 만족했다. 그는 강의료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였는데, 강의료를 받음으로써 그들이 돈을 내는 사람에게 매여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의 가정교사가 된 철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보장받았고, 부자들의 쾌락주의적 생활양식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호사스런 음식과 향기로운 향료와 값비싼 옷과 아름다운 여인들, 그리고 많은 돈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노예의 삶을 살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낭비, 사치,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무수한 부당한 대우에 몸을 맡겨야 했다. 예를 들면, 잔치에서 맨 끝자리에 앉는다든지, 음식이나 포도주의 가장 좋지 않은 것을 대접받는다든지, 환관들의 감시를 받는다든지, 매달 첫날에 노예들과 나란히 줄을 서서 봉급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민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마게도니아 왕 아켈라우스의 궁정에 입주하라는 초청을 거부하였다. 디오게네스를 비롯한 견유학파 철학자들도 이런 삶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구걸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구걸은 실행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쉽게 남용되기도 하였다. 생계의 네 번째 방법은 근로이다. 그것은 기술직일 수도 비기술직일 수도 있었지만 어느 것이든 손으로 고되게 일하는 것이었다. 자기 생계를 위하여 근로하는 철학자는 비교적 적은 수였다. 철학자들은 강의료를 받거나 가정에 입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근로는 철학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이었다.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은 이 가운데 네 번째 유형에 속하며, 바울의 적대자들이 교회의 부양을 받은 것은 가정에 입주하는 유형에 속한다.
이 네 가지 유형 가운데 두 가지가 특히 대조를 이룬다. 가정에 입주하는 유형은 부와 사치를 누리기는 하지만 집주인에게 매이고, 근로하는 유형은 힘들기는 하지만 자유롭다.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지 않고 노동을 하겠다고 한 것은, 복음 전하는 사람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가정 입주형보다는 근로형을 바람직한 것으로 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 비교를 그대로 목회 현장에 적용해서, 바울의 적대자들이 그들을 부양하는 교회에 얽매였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본다면 교회의 부양을 받는 모든 목회자들이 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 자신도,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13-14절). 목회자가 교회의 부양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의 부양을 받는 것이 가정 입주형과 같은 유형이라는 점에서, 가정 입주 철학자들이 부자들의 삶에 끼어들어 타락할 수 있었듯이,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는 목회자들도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가정에 입주한 철학자들이 집 주인의 종이 되어 그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호사를 누렸듯이, 바울의 적대자들은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 일부 쾌락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자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고후 11:4). 여기서 “다른”이라는 형용사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다른”, 자신들의 부유함과 쾌락주의를 정당화해 주는 사이비 그리스도론이다. 그들은 그 대가로 교회부터 부족함이 없는 물질적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과 신도들 사이를 이간질시켰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상을 왜곡하고 복음을 변질시켰다. 그들이 부단히 자기들도 바울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였다. 자기들이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 만큼 겉모습을 위장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고후 11:12-13). 바울은 그들의 위장을 벗기고 그들이 교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잘라 없애버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참 기발하고도 간단하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손으로 노동하면서 선교를 하겠다는 것이다(고후 11:12a).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탄로시키고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들을 “거짓 사도”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부른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말이다. 겉모습을 봐서는 진짜와 가짜가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짜와 진짜는 확연히 구별된다. 정품 타이어나 재생 타이어나 저속으로 갈 때는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속으로 달릴 때 정품 타이어는 멀쩡하지만 재생 타이어는 펑크가 난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적대자들이 말씀 선포하는 것이나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이나 목회를 하는 데서는 바울의 흉내를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손으로 노동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가죽 제조업을 뜻한다. 그것은 “밤낮으로”(살전 2:9) 즉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가죽, 칼, 송곳 등을 가지고 “손으로” 하는 고된 노동이다(고전 4:12). 당시 이런 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었으며, 자유인들이 생계 때문에 이런 일을 할 경우에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당시의 키케로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이런 노동은 영혼을 고양시킨다거나 남들에게 덕을 베풀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인에게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다이쓰만 같은 학자는, 바울이 그의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대필하게 하고 자신은 끝에 가서 큰 글자로 서명만 한 것은(갈 6:11) 아마도 고된 노동 때문에 그의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은 자유인이지만 스스로 종이 되었고(고전 9:19), 비천해졌고(고후 11:7), 이 세상의 쓰레기나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한다(고전 4:13). 사람들은 이런 것이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노예나 다름없이 산 바울의 실제 삶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흉내낼 수가 없다. 여기에서 그들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들은 예수를 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다른” 것을 전했다는 것은 겉으로는 예수를 전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목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와 사치와 향락이다. 그들은 그러한 것이 보장되는 한에서만 복음 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이 보장되지 않거나, 행여 바울 같이 손으로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면, 복음 전하는 일은 그들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그들에게서 복음 전하는 일은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해야만 하며,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한다(16절). 복음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 은혜 받은 사람이 당연히 담당해야 할 사명이지, 자랑하거나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쓰지 않고 손으로 노동을 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복음 전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부양을 받는 일이 복음 전하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한 것도, 복음을 수단화하는 적대자들을 의식하여, 어떤 경우에도 복음 전하는 것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어법이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진다고 보았다.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17-18절).
여기서 ‘삯’(misthos)은 금전적 대가가 아니라 ‘보상’의 의미이다.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직무’가 아니며 ‘자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대가를 받으면 나중에 하나님께 받을 보상이 없고 지금 값없이 전하고 받을 것을 받지 않아야 나중에 보상이 있다는 사고를 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자선을 베풀 때 아무도 모르게 하여 자선을 숨겨두어야 은밀한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한 말씀(마 6:4)과도 같다. 가정 입주 철학자들은 엄격히 말해서 고용된 사람들이었고, 자유가 없는 노예들이었다. 바울의 적대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부와 사치와 향락을 얻는 목적을 위해 교회에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진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실 보상 이외에는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거듭해서 그것이 아무도 헛되게 할 수 없는 “나의 자랑거리”라고 말하고 있다(15절, 고후 11:10).
오늘날 목회자들은 자꾸만 눈에 보이는 업적을 자기의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겠다.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신도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대표적인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의 자랑거리는 그것과 다른 것이다.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을 위해서 밤낮없이 손으로 노동을 하여 노예같이 비천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 그래서 그렇게 고생하고 또 누리지 못하는 만큼 나중에 하나님께 받을 상이 크다는 사실, 바로 이것을 자랑거리로 여겼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전하는 사람이 받을 진정한 보상이요 자랑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몇 개가 서울에 있노라고 자랑들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진정한 자랑이 아니다. 그런 교회 목회자들은 이미 엄청난 부와 성공을 누리고 있다. 자식과 후계자에게 엄청난 부를 세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다. 오히려 오늘날 버려지고 노인만 남은 농촌의 목회 현장을 지키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 글을 시작할 때 한 목회자의 고민을 언급하였다. 그가 목회만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도 자립하기 위해 또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복음 선포의 자유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침해받지 않으려는 충정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그의 적대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복음 선포 자체의 순수성을 지켜내려고 한 것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절대로 가정 입주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고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립하는 데서 복음은 생명력 있게 전파될 수 있다.(월간 <홀씨>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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