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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의 서두에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 있어?”라고 묻는다. 그리고 “있어” 혹은 “없어”라고 대답한다. 주로 이성간의 사랑에 대해 이런 문답은 행해진다. 이는 아직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사랑할 대상만 찾는다면 언제든지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할 능력이 ‘충분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에리히 프롬은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는 좀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기술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기에 앞서 ‘사랑의 기술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데에 목을 매지만, 정작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는 그만큼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대학교 4학년 여름에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철없던 막내 아들은 아버지가 혼자서 감당했을 육체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반드시 아버지는 나을 거라고, 다시 일어나서 걸으실 거라고 무작정 믿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뒤늦게 도착한 영안실에서 그제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문객이 모두 돌아간 텅빈 영안실 식당에서 넘어가지 않는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넣으며, 나는 아버지께 한 번도 사랑한다고 혀를 놀려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누나들 앞에서 눈물을 감추며 간신히 버텼는데, 더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고백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안타까워 하며 살게 되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만큼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사랑한다고 말함으로써 서로의 감정을 교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늦은 귀가를 하다가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라디오를 들었다. 진행자는 '사랑은 표현할 때 비로소 전해진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사랑의 기술이란 게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 시작이 '표현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어 그 라디오 진행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하면 그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서 싫어한다고. 또 어떤 사람은 표현의 의미를 과소평가한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귀에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기 마련이라고. 그러니까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해주라고.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는 남으셨다. 어렸을 땐 어머니가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내게 어려운 분이셨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게 하지 못했던 사랑 고백을 어머니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요새 과감하게 ‘안 하던 짓’을 한다. 그게 바로 ‘사랑의 능동태’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등 뒤에서 어머니를 꼬옥 안아드리기도 하고, 기습적으로 뽀뽀를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징그럽다며 ‘강하게’ 저항하시지만, 어느새 어머니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사랑의 기술은 바로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쑥스럽다거나 익숙하지 않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조금만 표현하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하자. 분명 기쁨이 커질 것이다.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뺨을 비비며 사랑한다고 말하자. 매일 매일 사랑을 고백해도 사랑의 표현은 모자라다.
(김태우/ 오 마이 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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