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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2005년) 당선작---- 기다려! 엄마
"엄마, 아직 멀었어?"
"응, 조금만 가면 돼."
엄만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한다. 운동화 속에 있는 발가락들이 꽁꽁 얼어붙었다. 벙어리장갑처럼 발가락들이 모두 없어질지도 모른다.
"엄마, 아직 멀었어?"
"으응, 조금만 가면 돼. 춥지?"
"추워 죽겠단 말이야. 입도 얼었어. 말도 안 나온다고."
엄마는 아무 말도 없다. 외할머니께서 아프다고 한다. 이 추운 겨울에.
버스도 놓치고 이렇게 걸어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다음 버스가 오후 5시에 온다니 이렇게 걸을 수밖에.
"어어? 눈 와. 엄마."
"그래, 그렇구나."
하늘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엄마 마음도 저렇게 까맣게 됐을지도 모른다. 내가 좀 참자.
"엄마, 지금 외갓집에 누가 살아?"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상용 오빠는?"
"목포에서 회사 다니잖아."
"그런데 엄만 그동안 왜 안 왔어? 외갓집에?"
"아휴, 고것 참. 말두 많네. 빨리 걷기나 하잖구. 눈 많이 오면 더 힘들어."
눈이 밑에서부터 올라와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그렇게 만들었다. 해진 장갑 밑으로 검지가 살짝 보인다. 엄마한테 아직 말 안 했다. 검지가 실 사이로 보인다고.
그 손가락으로 코를 눌렀더니 콧물이 나온다. 귀찮아서 장갑으로 콧물을 쓰윽 닦았다.
"엄마, 같이 가."
"빨리 와, 찬주야.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
아스팔트에서는 금방 녹아버리던 눈이 시골길에서는 그대로 쌓인다. 길 건너에 새로 생긴 아파트 놀이터에서도 눈은 금방 녹지 않았다. 우리 동네 골목길 밑에는 따뜻한 땅이 숨어 있나 보다. 눈이 빨리 녹으니까.
흩날리는 눈 사이로 엄마 검은 색 코트가 바람에 흔들린다.
"엄마, 아직 더 가야 돼?"
뒤돌아보는 엄마 얼굴이 꼭 심통낼 것처럼 찌그러졌다.
"찬주야, 엄마 손 잡아."
엄마는 장갑도 기차에 놓고 내려서 맨손이다. 아휴, 엄마는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엄마 손이 빨개졌다.
"엄마, 손 안 시려?"
"괜찮아. 찬주야, 너 춥지? 자 이렇게 하고....."
엄마는 내 목도리를 다시 감아줬다. 모자 위에 쌓인 눈도 떨어주고. 그것도 맨손으로. 엄마 손 시리겠다.
"엄마, 근데 외갓집에 왜 그 동안 안 왔어?"
목도리 속에 입이 숨어버려서 말이 웅웅거린다.
"으응, 엄마랑 외할머니랑 싸웠어."
"엄마도 싸워?"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입만 목도리 밖으로 내놓고 말했다. 우리 엄마가 싸우다니.
"어른들도 가끔 생각이 맞지 않으면 싸우는 경우가 있단다. 가끔."
"치이, 엄마 바보. 나더러 민지랑 싸우지 말라고 하고서 엄마는 싸운단 말이야."
잘됐다. 드디어 엄마 약점을 잡았다. 옆집에 사는 민지랑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 해 놓고 엄마가 싸웠으니.
"글쎄 말이다. 엄마 나쁘지?"
엄마가 아니라고 빡빡 우길 줄 알았는데 안 그러니까 맥 빠진다. 엄마 눈이 갑자기 빨개졌다. 엄마 머리에 눈이 내려서 하얘졌따. 엄마도 늙으면 저렇게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겠네. 속 썩이지 말아야지. 엄마랑 이제부터 싸우지도 말아야지. 숙제도 꼬박꼬박 해 놓고, 학습지도 안 밀리게 해 놓고, 민지랑 싸우지도 않고, 양파도 안 골라내고, 또 밥 먹고 바로 이 닦고.
으음, 엄마 속 썩이지 말아야 할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하지만 할 수 없지 뭐.
내 방 청소도 내가 하고, 엄마가 깨우면 발딱 일어나고, 엄마한테 말대꾸 안 하고, 이 닦을 때 세면대에 치약 안 묻힐 거고, 밥 먹을 때 식탁 밑으로 밥풀 안 흘리고, 컴퓨터 게임 오래 한 하고, 아니야 그건 좀...... 오래 하더라도 너무 가까이서 안 하고, 또 뭐가 있더라?
"아얏!"
돌부리에 걸러 넘어졌다.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조심하지 않고. 거봐, 미끄러졌잖아."
"엄마는! 난 아파 죽겠는데 빨리 일으켜 줘!"
해진 장갑 사이로 눈이 들어왔다. 차가웠다.
"왜 엄마한테 화풀이야!"
"내가 언제 화풀이했다고 그래. 그냥 빨리 일으켜달라고 했지. 정말 짜증나!"
"엄마한테 말버릇 좀 봐. 누가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라고 하던, 엉?"
엄마가 일으켜 세우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엄마도 나한테 화풀이하잖아. 외할머니랑 싸우고 괜히 나한테 그래!"
"....."
갑자기 엄마가 조용해졌다. 눈은 퍽퍽 쏟아졌다. 엄마 발자국을 따라 걷는데 발자국 위로 눈이 금방 와서 앉는다. 엄마는 더 빨리 걸어간다. 엄마 등 뒤로 하얀 새처럼 눈이 달려든다. 엄마가 까만새처럼 날아가는 것 같다. 이러다가엄마와 점점 더 멀어지겠다.
"엄마, 기다려, 같이 가!"
"그래, 그래 알았어. 찬주야, 엄마 손 잡아."
엄마는 울고 있었다.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빨리 걸었나 보다. 바보같이 왜 울어? 나랑 싸워서 저러나? 아니야. 외할머니랑 싸워서 그래. 외할머니한테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미안하다고 얘기해봤어? 잘못했다고 말이야."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하냐?"
"아니--이, 외할머니한테 말이야."
"아니, 아직."
"엄마가 나한테 그랬잖아. 빨리 뉘우치면 된다고. 마음 속으로만 하면 나쁜 천사가 모르니까, 빨리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나쁜 천사가 도망가 버린다고 말했잖아."
"그래, 맞아. 우리 찬주 똑똑하구나. 잘 기억하고 있었네."
엄마는 맨손으로 장갑 낀 내 손을 잡아준다.
"너무너무 화가 나서 생각 못 하게 하는 나쁜 천사 말을 그대로 옮기게 되더라도 빨리 사과하면 된다며? 그러면 나쁜 천사가 다시 돌아와도 힘이 없어진다며?"
"엄마한테는 나쁜 천사가 와서 오래 살았나 봐. 아직까지 잘못했다는 말을 못했어. 그래서 지금 달려가는 거야. 그 말을 외할머니께 하려고. 엄만 바보야. 그 말을 아직까지 못하다니."
엄마는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말했다. 길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사이좋게 걸어왔다.
"엄마, 바보라고 말한 거 미안해. 그런데 뭣 때문에 싸웠어? 할머니랑?"
"엄마 잘못이야."
엄마는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하낟.
"그래, 엄마가 잘못했을 거야."
아참, 이런 말하면 엄마 마음이 더 안 좋아질 텐데. 하지만 나한테도 엄마는 잔소리 많이 하니까 할머니한테도 그랬을 거다.
"아니, 내 말은 할머니한테 그렇게 말하라는 뜻이야."
엄마는 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는지 조용하다. 아마 그 전화 때문일 거다. 엄청 큰 소리로 할머니랑 전화하더니 엄마가 울었다. 아빠 때문이었다. 그 때 엄마가 아빠 편을 들어서 그런 거다. 아빠는 돈 많이 벌어서 빨리 온다며 배를 타고 바다로 갔다. 그래놓고 2학년이 다 끝나도록 오지 않고 있다. 아빠는 바다가 그렇게 좋은가.
"아빠 때문에 싸운 거지?"
앞으로 가는 엄마 손을 다시 잡으면서 물었다.
"으응..... 하지만 아빠는 곧 돌아오실 거야."
"거짓말! 매일 온다고 하고서 일 년이 넘어도 안 오셨잖아."
"찬주야, 너 오른쪽 장갑 구멍 났니? 진작 엄마한테 말했어야지."
엄마는 내 오른손을 꼭 쥐어준다. 엄마가 알아주니 기분이 좋아진다.
"외할머니가 다 용서해 주실 거야. 아빠 때문에 싸운 거니까. 엄마도 나 잘못한 거 다 용서해주잖아. 그치?"
어제 민지가 아빠 자랑하면서 우리 아빠가없다고 놀렸다. 그래서 또 민지랑 싸웠다. 엄마는 민지랑 왜 매일 사이가 안 좋은지 모를 거야. 엄마한테 말하면 괜히 기분 나빠할까 봐 말 안 했다.
하여튼 어제 민지랑 또 싸워서 엄마 속상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엄마에게 말대꾸만 했다. 그래서 그치란 말을 잘 들으라고 더 크게 말했다. 어휴. 다해이다.
"응, 그럴 거야. 찬주야. 외할머니도 엄마를 용서하실 거야. 엄마가 찬주보다 더 어릴 때였나, 할머니가 시장에 쫓아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너무 쫓아가고 싶은 거야. 그래서 몰래 쫓아가다 길을 잃어버렸어. 처음에는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계속 걸어갔지. 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니 날이 이미 깜깜해졌지 뭐니. 어떻게 파출소에 갔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할머니가 오셨어. 엄마를 꼭 안아주셨지. 그 때도 외할머니는 엄마를 용서해 주셨단다."
"엄마, 근데 아직 안 나와? 외갓집?"
"이제 다 왔다. 조금만 참자."
장갑을 낀 내 손을 엄마 손이 꼭 붙들고 잇따. 장갑 속에 있는 따뜻한 내 손을 추운 엄마 손이 붙들고 있다. 그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엄마의 손 위로 한얀 아가새들처럼 눈이 앉는다. 엄마의 맨손을 콕콕 부리로 조며 앉는다. 엄마 손 시리겠다. 산도 하얀 머리다. 늙은 산이다. 나무들도 하얀 옷을 입었다. 따뜻하게 보이지만 속으로 덜덜 떨고 있을 거다. 엄마 손도 떨린다.
"엄마, 당산나무가 보여!"
마을 맨 앞에 서 있는 키 크고 뚱뚱한 당산나무도 하얀 옷을 뒤집어쓰고 있다.
"엄마, 외갓집 마당이 보인다!"
"그래...."
엄마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문도 보여!"
"........"
문 옆에 종이 등이 눈을 맞고 걸려 있다. 저거 우리 앞집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적에 그 집 앞에 걸린 거랑 똑같네.
안에 있는 주황색 불빛이 종이 밖으로 비친다. 한문으로 된 글씨가 종이 위에 씌어있다. 그 위로 하얀 새가 날아간다. 어마가 내 손을 놓고 달려간다.
"기다려! 엄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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