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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따라가는 이를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성도들은 신앙의 집을 세우고 있습니다.
집을 건축하려면 건축에 필요한 자제가 다 준비되어 있다 하여도
기둥을 세워야 다음 공사를 계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신앙생활 하는 것에는 집의 기둥과 같이
귀중하고 튼튼히 서 있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 16:24. 말씀입니다.
집의 기둥은 다른 부분과 달라서 집 전체를 떠받히고 있습니다.
기둥을 세우지 않는 건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조건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고 하는 어떠한 행위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상급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성도에게는 반드시 순서적이고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통치를 받지 않는 목회자가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든 신앙을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존경받을 하나님의 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로 시작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합니다.
시대의 직분(서기관, 제사장 등등)과 관계없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일컬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믿음이나, 행위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합니다.
공 예배에 잘 참석하고, 교회생활을 잘합니다.
기도도 잘하고, 많이 합니다.
헌금도 많이 합니다.
맡은 일에 충성도 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면 상급이 없습니다.
헛수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행하는 어떤 행함도
하나님의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큰 교회 목사님이나, 작은 교회 목사님이나, 성도들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라고 말한다면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려져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많은 목회자나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서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인지
아닌지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다수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속이고 있고, 성도들은 속고 있습니다.
알고 속이는 목회자들도 있겠으나,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떤 일을 하여도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상급이 없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복음전파, 교회부흥, 교회건물 크게 짓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분명하게 여기까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공로자들의 명예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지만,
자기 시인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죄를 대속하시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음을 감사하고 모든 일에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함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기도 영광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참된 신앙고백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
지금의 많은 목회자들이 행하고 있는 마음으로의 신앙고백이고,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가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들을 속인다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앞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속임 수 입니까?
또는 통곡할 속임 수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행치 않는 목회자는 추악 자체입니다.
행하는 가식을 볼 줄 아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닌 것은 틀린 것입니다.
자기를 알리는데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부끄러운 행위들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부족한 것이 잘못 지적한다고 하실는지 모르지만,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역행하고 있는 본인은 발견하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의 대세의 흐름은 자기 자랑, 자기 시인에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사랑할까? 자기를 알릴 수 있을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실제로 보며, 실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자기를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변명이 있다면, 변명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고 있다는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목회자님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시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치 않는 목회자가 훌륭하게 보이십니까?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주위의 이들을 함께 망하게 하는
아주 나쁜 영적 소경들입니다.
목회자라해도 순간, 순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고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당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징벌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여도 신앙은 아니라고 말씀은 지적합니다.
기독교의 부흥이 멈추었다고 또는 쇠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부흥을 외처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흥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신앙을 성도들은 닮아갑니다.
당연한 것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일에도 대표원리를 적용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교회에서 성도의 대표는 목회자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의 대표도 목회자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말 안 듣는다고 불평하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들을 양육하고 세운이가 누구입니까?
누워서 침 밷는 경우 아니겠습니까?
목회자가 참 목회자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순종하는 것이 1순위입니다.
목회자들이 기준의 순위를 바꾸었습니다.
성도들은 모르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가 무엇을 잘하여야 참 목회자인가를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성취욕과 성도들의 바람이 맞는데서 비롯되는 현상이고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종교 지도층과 유다 백성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민이라는 자만심으로 종교 지도층은 계속
하나님의 축복만을 예언하였고, 백성들은 종교 지도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신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들의 예언은 달콤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종교지도자)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너무나 같은 상황입니다.
목회자들은 대부분 자기 성취욕에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고,
훌륭히 성공할 것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멋있고, 성공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추악하고 불의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만큼 추악하고 불의한 것은 없습니다.
송장이 들어있는 관을 겉에서 회칠한다고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속에서는 썩고 있습니다.
죄는 미화시킬수록 추악해지고 불의해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목회자들이 모르거나,
알면서도 관을 회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목회자들이 복음을 바로 전하는데,
성도들은 믿음에 문제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죄악 되며,
세상이 어두운 경우는 없습니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어두움은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어두움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요.
혼탁한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성도들은 자기 또는, 가족들과 친척과 주위 사람들을
자랑하려는 마음들이 가득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현 시대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이익과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계 3:10),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냉정히 버리셨습니다(삼상 15:26).
어느 교회에 큰 교회(모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정죄하였음)에 다니던 집사가
이사하여 가까운 개척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는 개척교회 목사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가 먼저 다니던 교회의 문제들을 자세하게 조목조목
설명하며 알려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나서 집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여러 부분에서 틀리고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그 교회는 성도가 몇 만 명이에요.
목사님은 그 집사에게 수차례 권면하셨으나,
목사님의 말씀을 안 듣고 엉뚱한 소리하므로
그러면 그 교회로 가라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는 복음의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의한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3: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도 필요하지만, 말씀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긍국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리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말씀에
순복하여야 합니다.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진실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세워지는 신앙은(마 16:24)
말씀에 순복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만큼이 자기의 신앙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 하지
말아야 하며, 하라고 하는 말씀에는 자기에게 손해가 되도 순복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올바른 신앙과 자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실체가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 이라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서 만 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연하여 설명한다면, 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 1:27).
소외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것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 손익에 따라서 마음과 행동이 흔들리지 말아야
온전한 믿음과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믿음은 “온전한, 참” 믿음을 말씀하신 의미로
해석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을 참으로 각성하여야 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야 2:22).
목회자들과, 하나님을 믿는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러한 때에, 나의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비추어 점검하여야 합니다.
도래할 영생의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생각하고
많은 고뇌를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실하시며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비추어보아 정확한 답을 찾아야하며
하나님께 순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더 잘 믿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자기가 자기를 좋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 됩니다.
자기는 자기를 잘 아는 것 같아도 자기를 스스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이
사실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는 날로 교회가 많아지고 성도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을 사실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을 믿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보이는 현상으로 믿는 성도의 수가 적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일 뿐, 진실된 믿음과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부터 성숙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말할 때에, 자기를 부인하므로 진정한 겸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 8:13).
백부장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백부장은 자기의 높은 신분을 부인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하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은,
백부장이 자기를 낮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백부장이 낮추었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 성숙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이 믿음의 크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으로,
자기 PR을 잘하여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교훈이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상반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마 16:24)과 세태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 세속화되지 않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방법에 따르는 것이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순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교인들과 관계도 좋으며, 성경지식도 많고,
충성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품행 바르고,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모든 것이 좋은 편입니다.
안타깝게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가식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어떠한 행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경건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자기의 유익과 관계되어 유익이 되면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자기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손상을 입으면 경건의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성도는 손익과 관계없이 경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넓고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순서에 의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라가는 성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좇으려는 사람은 기본적이고, 의무적으로 반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성도들도 모이면 가족들 자랑과
자기 자랑하는데 치중합니다.
자기를 시인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자기의 좋은 점을 나타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되고 자기에게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낸다는 것은, 자기 자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롬 1:30)에서 죄를 설명하면서, 자랑하는 자요. 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전 13:4)에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것은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치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은 모든 것을 다 잘하더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있어서 건축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제를
준비해 놓고 신앙의 집의 기둥을 세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집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지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범사에 감사”(살전 5:18)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영광은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지식의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수지에 물을 채우드시 많은 책을 읽어 많은 지식을 지식 그릇에
채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좋은 물을 채운 저수지는 참 좋은 저수지입니다.
그 저수지에서 나오는 물은 농사에 유용하게 쓰이고,
식물들을 잘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폐수로 채워진 저수지가 있다면, 그 물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물을 가두는 저수지가 있는가하면 폐수를 버리는 하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자아에 신령한 영적 지식이 채워질 수 없는 것이고,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에게 진리의 지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현 시대는 잘 웃기고, 기교 많고, 수단 좋은 설교나,
강의를 즐겨 듣습니다. 그리고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기이하게 나타날 현상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에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에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며 주에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8:22-23).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겠다고 단언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외면하셨고, 그것은 불법이니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하나님을 경외하고”의 뜻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상황과 정도에 따라 변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딤후 3:1-2),”
자존심은 자기를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사랑함에서 형성되는 대표적인 마음이 자존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자기를 존경하는 것은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다른 이를 사랑하지 못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먼저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순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신앙고백을 우리는 반드시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자기 치적의 자랑은 자기와 주위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시인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이들이 변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 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31).
주안에 자랑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주안에서의 자랑은 십자가 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자랑이 많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고후 11:17).
사도바울은 자기의 자랑이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롬 1:30).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자기 자랑은 참 사랑이 될 수 없고 죄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고후 11:16).
자존심을 버리면 문제가 없으며, 있는 것도 해결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음에 의한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는 말씀에 따라 성도들은 기뻐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을 때는 기뻐합니다.
어느 정도의 나뿐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면 성질을 내며, 걱정 근심하며, 실망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어느 상황에서 기뻐하고,
나뿐 상황에서는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어떠한 모든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이 자기의 신앙수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어떻게 의도하든
예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 7:22-23).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신앙이 절실한 때입니다.
하나님께 불평, 불만, 원망, 실망, 좌절, 이러한 것들은 신앙과는
정반대의 것들입니다.
현실의 상황을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내었거나, 정욕으로 쓰려 하였거나,
기도하지 않았거나, 응답을 받지 않고 추진한 결과들입니다.
물론 어느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자족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현재 상황에서 자족하는 성도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상을 받지 못합니다.
인간의 방법과 생각에 의한 것들은 사람에게는 인정받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실에서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성도가 은혜를 받고 믿습니다. 하고 목회 길로 갔더니,
바로 낭떠러지이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레베이터를 타려면 이용하는 원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10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려면,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에레베이터가 와서 멈추고 문이 열리면 타서, 1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고,
1층에서 멈추어 문이 열리고 내리면 됩니다.
이것이 에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10층에 있는 사람이 억지로 에레베이터 문을 열고 뛰어 내리면 곧
바로 낭떠러지이고 끔직한 사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어떠한 행동도 이와 같은 결과를 맞습니다.
종교개혁을 외치지만 막상 내용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개혁만을 강조합니다.
내용을 지적하여도 아주 미미한 수준에서 그칩니다.
그것은 무엇을 개혁하여야 하는지 모르거나, 자신이 개혁대상이기
때문이거나, 주위를 살피는 것은 결과적으로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은 종교개혁 시대가 아니고,
신앙개혁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신앙개혁은 목회자부터입니다.
신앙개혁은 크게 넷으로 요점을 집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에 교단마다, 목회자들마다 다 조금씩 다르며
문제가 많음을 많은 분들이 지적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일치하는 선포자의 신앙생활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개혁은 반듯이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해석과 하나님의 말씀증거와 일치되는 말씀 선포자들의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목회자가 신앙개혁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신앙개혁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목회자가 신앙개혁을 하지 않는데, 성도들이 신앙개혁을 할 수 없는 근거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지 못하며, 특히 조직신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개혁은 하나님 말씀에서 틀린 것을 고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하며 말씀을 체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조직신학을 알아야 합니다.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힘겨루기가 됩니다.
교회에서 제도 등을 개선(일종의 부분적인 신앙개혁)하기 위하여
목회자와 생각을 달리한다면 그 교회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자기편을 만들고, 세력을 동원하게 되고,
투쟁하게 되는 데 이때쯤이면 누가 옳고, 누가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양쪽에 형태와 크기는 다르겠으나, 다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선하자는 측은 목회자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유가 있고,
개선하지 않는 측은 그 자체가 원인이 됩니다.
주장대로 치닫게 되면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습한다 하여도 반목이 있기 때문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교회가 분리되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이러한 상황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신앙 중심사상의 형성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에 핵심입니다.
신앙개혁은 반듯이 순서에 의하여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세우는 신앙이나
신앙개혁은 진정한 것이 못되며, 그 자체가 신앙개혁 대상의 1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말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을 좇고자하는 성도들에게 전제조건입니다.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둘 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것이
현 실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따라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큰 손해가 있었다는 말에
왜 그렇게 바보 같으니?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하는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데 자기의 손익을 생각하면 아니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낮추어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자기에 유익을 구치 말라. 짐을 서로 지라. 주라. 섬기는 자가 되라.
참아라. 종이 되라.
이러한 말씀들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키려면 자기가 먼저 손해 당하지 아니하고는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에 반드시 채워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가능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험난한 세상을 이기며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영력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인격의 소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철저히 굴복하므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화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이 자기 신앙 수준입니다.
우리의 주위를 보십시오?
과연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인이 얼마나 있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에 목회자가 솔선수범하여야 함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목회자만큼 자기를 나타내고자 힘쓰고 애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은 반드시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실에서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말씀에 순복 없는 신앙성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낮은자 전규성 목사
http://www.참사랑.kr/
wjs918@hanmail.net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따라가는 이를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성도들은 신앙의 집을 세우고 있습니다.
집을 건축하려면 건축에 필요한 자제가 다 준비되어 있다 하여도
기둥을 세워야 다음 공사를 계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신앙생활 하는 것에는 집의 기둥과 같이
귀중하고 튼튼히 서 있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 16:24. 말씀입니다.
집의 기둥은 다른 부분과 달라서 집 전체를 떠받히고 있습니다.
기둥을 세우지 않는 건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조건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고 하는 어떠한 행위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상급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성도에게는 반드시 순서적이고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통치를 받지 않는 목회자가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든 신앙을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존경받을 하나님의 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로 시작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합니다.
시대의 직분(서기관, 제사장 등등)과 관계없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일컬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믿음이나, 행위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합니다.
공 예배에 잘 참석하고, 교회생활을 잘합니다.
기도도 잘하고, 많이 합니다.
헌금도 많이 합니다.
맡은 일에 충성도 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면 상급이 없습니다.
헛수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행하는 어떤 행함도
하나님의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큰 교회 목사님이나, 작은 교회 목사님이나, 성도들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라고 말한다면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려져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많은 목회자나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서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인지
아닌지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다수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속이고 있고, 성도들은 속고 있습니다.
알고 속이는 목회자들도 있겠으나,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떤 일을 하여도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상급이 없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복음전파, 교회부흥, 교회건물 크게 짓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분명하게 여기까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공로자들의 명예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지만,
자기 시인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죄를 대속하시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음을 감사하고 모든 일에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함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기도 영광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참된 신앙고백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
지금의 많은 목회자들이 행하고 있는 마음으로의 신앙고백이고,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가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들을 속인다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앞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속임 수 입니까?
또는 통곡할 속임 수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행치 않는 목회자는 추악 자체입니다.
행하는 가식을 볼 줄 아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닌 것은 틀린 것입니다.
자기를 알리는데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부끄러운 행위들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부족한 것이 잘못 지적한다고 하실는지 모르지만,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역행하고 있는 본인은 발견하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의 대세의 흐름은 자기 자랑, 자기 시인에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사랑할까? 자기를 알릴 수 있을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실제로 보며, 실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자기를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변명이 있다면, 변명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고 있다는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목회자님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시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치 않는 목회자가 훌륭하게 보이십니까?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주위의 이들을 함께 망하게 하는
아주 나쁜 영적 소경들입니다.
목회자라해도 순간, 순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고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당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징벌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여도 신앙은 아니라고 말씀은 지적합니다.
기독교의 부흥이 멈추었다고 또는 쇠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부흥을 외처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흥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신앙을 성도들은 닮아갑니다.
당연한 것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일에도 대표원리를 적용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교회에서 성도의 대표는 목회자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의 대표도 목회자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말 안 듣는다고 불평하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들을 양육하고 세운이가 누구입니까?
누워서 침 밷는 경우 아니겠습니까?
목회자가 참 목회자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순종하는 것이 1순위입니다.
목회자들이 기준의 순위를 바꾸었습니다.
성도들은 모르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가 무엇을 잘하여야 참 목회자인가를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성취욕과 성도들의 바람이 맞는데서 비롯되는 현상이고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종교 지도층과 유다 백성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민이라는 자만심으로 종교 지도층은 계속
하나님의 축복만을 예언하였고, 백성들은 종교 지도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신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들의 예언은 달콤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종교지도자)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너무나 같은 상황입니다.
목회자들은 대부분 자기 성취욕에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고,
훌륭히 성공할 것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멋있고, 성공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추악하고 불의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만큼 추악하고 불의한 것은 없습니다.
송장이 들어있는 관을 겉에서 회칠한다고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속에서는 썩고 있습니다.
죄는 미화시킬수록 추악해지고 불의해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목회자들이 모르거나,
알면서도 관을 회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목회자들이 복음을 바로 전하는데,
성도들은 믿음에 문제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죄악 되며,
세상이 어두운 경우는 없습니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어두움은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어두움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요.
혼탁한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성도들은 자기 또는, 가족들과 친척과 주위 사람들을
자랑하려는 마음들이 가득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현 시대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이익과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계 3:10),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냉정히 버리셨습니다(삼상 15:26).
어느 교회에 큰 교회(모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정죄하였음)에 다니던 집사가
이사하여 가까운 개척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는 개척교회 목사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가 먼저 다니던 교회의 문제들을 자세하게 조목조목
설명하며 알려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나서 집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여러 부분에서 틀리고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그 교회는 성도가 몇 만 명이에요.
목사님은 그 집사에게 수차례 권면하셨으나,
목사님의 말씀을 안 듣고 엉뚱한 소리하므로
그러면 그 교회로 가라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는 복음의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의한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3: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도 필요하지만, 말씀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긍국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리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말씀에
순복하여야 합니다.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진실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세워지는 신앙은(마 16:24)
말씀에 순복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만큼이 자기의 신앙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 하지
말아야 하며, 하라고 하는 말씀에는 자기에게 손해가 되도 순복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올바른 신앙과 자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실체가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 이라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서 만 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연하여 설명한다면, 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 1:27).
소외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것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 손익에 따라서 마음과 행동이 흔들리지 말아야
온전한 믿음과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믿음은 “온전한, 참” 믿음을 말씀하신 의미로
해석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을 참으로 각성하여야 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야 2:22).
목회자들과, 하나님을 믿는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러한 때에, 나의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비추어 점검하여야 합니다.
도래할 영생의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생각하고
많은 고뇌를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실하시며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비추어보아 정확한 답을 찾아야하며
하나님께 순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더 잘 믿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자기가 자기를 좋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 됩니다.
자기는 자기를 잘 아는 것 같아도 자기를 스스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이
사실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는 날로 교회가 많아지고 성도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을 사실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을 믿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보이는 현상으로 믿는 성도의 수가 적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일 뿐, 진실된 믿음과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부터 성숙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말할 때에, 자기를 부인하므로 진정한 겸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 8:13).
백부장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백부장은 자기의 높은 신분을 부인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하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은,
백부장이 자기를 낮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백부장이 낮추었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 성숙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이 믿음의 크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으로,
자기 PR을 잘하여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교훈이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상반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마 16:24)과 세태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 세속화되지 않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방법에 따르는 것이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순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교인들과 관계도 좋으며, 성경지식도 많고,
충성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품행 바르고,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모든 것이 좋은 편입니다.
안타깝게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가식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어떠한 행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경건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자기의 유익과 관계되어 유익이 되면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자기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손상을 입으면 경건의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성도는 손익과 관계없이 경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넓고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순서에 의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라가는 성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좇으려는 사람은 기본적이고, 의무적으로 반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성도들도 모이면 가족들 자랑과
자기 자랑하는데 치중합니다.
자기를 시인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자기의 좋은 점을 나타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되고 자기에게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낸다는 것은, 자기 자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롬 1:30)에서 죄를 설명하면서, 자랑하는 자요. 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전 13:4)에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것은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치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은 모든 것을 다 잘하더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있어서 건축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제를
준비해 놓고 신앙의 집의 기둥을 세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집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지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범사에 감사”(살전 5:18)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영광은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지식의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수지에 물을 채우드시 많은 책을 읽어 많은 지식을 지식 그릇에
채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좋은 물을 채운 저수지는 참 좋은 저수지입니다.
그 저수지에서 나오는 물은 농사에 유용하게 쓰이고,
식물들을 잘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폐수로 채워진 저수지가 있다면, 그 물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물을 가두는 저수지가 있는가하면 폐수를 버리는 하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자아에 신령한 영적 지식이 채워질 수 없는 것이고,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에게 진리의 지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현 시대는 잘 웃기고, 기교 많고, 수단 좋은 설교나,
강의를 즐겨 듣습니다. 그리고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기이하게 나타날 현상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에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에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며 주에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8:22-23).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겠다고 단언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외면하셨고, 그것은 불법이니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하나님을 경외하고”의 뜻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상황과 정도에 따라 변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딤후 3:1-2),”
자존심은 자기를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사랑함에서 형성되는 대표적인 마음이 자존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자기를 존경하는 것은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다른 이를 사랑하지 못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먼저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순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신앙고백을 우리는 반드시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자기 치적의 자랑은 자기와 주위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시인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이들이 변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 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31).
주안에 자랑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주안에서의 자랑은 십자가 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자랑이 많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고후 11:17).
사도바울은 자기의 자랑이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롬 1:30).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자기 자랑은 참 사랑이 될 수 없고 죄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고후 11:16).
자존심을 버리면 문제가 없으며, 있는 것도 해결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음에 의한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는 말씀에 따라 성도들은 기뻐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을 때는 기뻐합니다.
어느 정도의 나뿐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면 성질을 내며, 걱정 근심하며, 실망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어느 상황에서 기뻐하고,
나뿐 상황에서는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어떠한 모든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이 자기의 신앙수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어떻게 의도하든
예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 7:22-23).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신앙이 절실한 때입니다.
하나님께 불평, 불만, 원망, 실망, 좌절, 이러한 것들은 신앙과는
정반대의 것들입니다.
현실의 상황을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내었거나, 정욕으로 쓰려 하였거나,
기도하지 않았거나, 응답을 받지 않고 추진한 결과들입니다.
물론 어느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자족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현재 상황에서 자족하는 성도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상을 받지 못합니다.
인간의 방법과 생각에 의한 것들은 사람에게는 인정받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실에서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성도가 은혜를 받고 믿습니다. 하고 목회 길로 갔더니,
바로 낭떠러지이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레베이터를 타려면 이용하는 원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10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려면,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에레베이터가 와서 멈추고 문이 열리면 타서, 1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고,
1층에서 멈추어 문이 열리고 내리면 됩니다.
이것이 에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10층에 있는 사람이 억지로 에레베이터 문을 열고 뛰어 내리면 곧
바로 낭떠러지이고 끔직한 사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어떠한 행동도 이와 같은 결과를 맞습니다.
종교개혁을 외치지만 막상 내용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개혁만을 강조합니다.
내용을 지적하여도 아주 미미한 수준에서 그칩니다.
그것은 무엇을 개혁하여야 하는지 모르거나, 자신이 개혁대상이기
때문이거나, 주위를 살피는 것은 결과적으로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은 종교개혁 시대가 아니고,
신앙개혁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신앙개혁은 목회자부터입니다.
신앙개혁은 크게 넷으로 요점을 집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에 교단마다, 목회자들마다 다 조금씩 다르며
문제가 많음을 많은 분들이 지적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일치하는 선포자의 신앙생활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개혁은 반듯이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해석과 하나님의 말씀증거와 일치되는 말씀 선포자들의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목회자가 신앙개혁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신앙개혁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목회자가 신앙개혁을 하지 않는데, 성도들이 신앙개혁을 할 수 없는 근거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지 못하며, 특히 조직신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개혁은 하나님 말씀에서 틀린 것을 고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하며 말씀을 체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조직신학을 알아야 합니다.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힘겨루기가 됩니다.
교회에서 제도 등을 개선(일종의 부분적인 신앙개혁)하기 위하여
목회자와 생각을 달리한다면 그 교회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자기편을 만들고, 세력을 동원하게 되고,
투쟁하게 되는 데 이때쯤이면 누가 옳고, 누가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양쪽에 형태와 크기는 다르겠으나, 다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선하자는 측은 목회자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유가 있고,
개선하지 않는 측은 그 자체가 원인이 됩니다.
주장대로 치닫게 되면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습한다 하여도 반목이 있기 때문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교회가 분리되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이러한 상황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신앙 중심사상의 형성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에 핵심입니다.
신앙개혁은 반듯이 순서에 의하여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세우는 신앙이나
신앙개혁은 진정한 것이 못되며, 그 자체가 신앙개혁 대상의 1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말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을 좇고자하는 성도들에게 전제조건입니다.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둘 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것이
현 실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따라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큰 손해가 있었다는 말에
왜 그렇게 바보 같으니?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하는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데 자기의 손익을 생각하면 아니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낮추어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자기에 유익을 구치 말라. 짐을 서로 지라. 주라. 섬기는 자가 되라.
참아라. 종이 되라.
이러한 말씀들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키려면 자기가 먼저 손해 당하지 아니하고는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에 반드시 채워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가능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험난한 세상을 이기며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영력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인격의 소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철저히 굴복하므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화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만큼이 자기 신앙 수준입니다.
우리의 주위를 보십시오?
과연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인이 얼마나 있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에 목회자가 솔선수범하여야 함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목회자만큼 자기를 나타내고자 힘쓰고 애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은 반드시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실에서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말씀에 순복 없는 신앙성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낮은자 전규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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