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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 막달라 마리아
본문: 요한복음 20: 1- 18
오늘은 예수님의 여제자이며,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교훈을 얻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받는' '높다' '괴로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으로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간 여인입니다.
마리아가 살고 있었던 막달라는 '망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 탈무드의 증언에 의하면 막달라 지방은 염색과 직물공장, 생선저장 및 가공과 조선업 등이 발달한 상당히 부유한 상업의 중심지였고 이곳 주민의 대부분은 이교도였다고 합니다. 부도덕하고 성적 비행이 심하여 후대 이도시의 몰락을 방종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유한 고급창녀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와 갈릴리 여행에 동행한 것 등으로 볼 때 근거가 희박합니다. 당시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병에 시달렸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부도덕하다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어쨋든 일곱 귀신 들렸던 그녀는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았는데, 그녀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나서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했던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겼습니다.(눅8:2-3)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시는 주님을 울면서 쫓아갔습니다.(눅23:27-28)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가고, 떠났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 있었고(마27:56),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고 울면서 있었습니다.(요19:25) 그리고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 보았고(눅23:55), 장례 모습을 참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향유를 준비하여 주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주기도 하였는데 안식일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체에 향유를 부으려고(요20:1) 밝기도 전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해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안 찾아간다'고 합니다. 사람은 잘변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히13:8)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 생전, 십자가의 죽음, 무덤까지 따라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정열과 사랑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변함없이 뜨겁게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은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영광을 받을 때나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때도 변함없이 참고 견디며 주님을 사랑합시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기분이 좋지 않아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긴 줄 알고, 무덤 밖에서 울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이 땅에서 보기 싫은 것 중 하나가 사람의 시체일 것입니다. 새벽 아직 밝기도 전에, 공동묘지에서 여성이 남자의 시체를 찾는 것은 희생으로 봉사하려는 마음이 없이는 못할 일입니다.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전체를 다해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과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막16:9, 요20:11-18) 그녀는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전도에도 참여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에도 동행했습니다.(막15:41)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을 따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에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의 자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초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고 남자들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최초로 무덤에 간 것은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무덤에 갔다고 했습니다. 이때 요한은 젊고 게다가 영적으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뒤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을 재확인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요한이 제일 먼저 달려갔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의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뛰어도 피곤치 않으리라"는 말씀처럼 요한은 힘이 펄펄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나 열심은 막달라 마리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마리아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있었다는 점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무덤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무덤은 더 무섭습니다. 굴속에 시체를 두기 때문에 무덤에 간다는 것은 여간 무섭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자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남자들도 다 돌아갔는데 혼자 남아서 무덤에서 서성댄다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둘째로, 마리아가 "울면서"있었다는 점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의 거울이고, 그 표현입니다. 물론 눈물 중에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여인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물은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눈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셋째로, 마리아가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는 점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찾지 않을까 해서 무덤 속을 들여다 본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처럼 강한 마리아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2) 마리아의 주님 사랑의 결과
첫째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는 마리아는 두 천사를 만납니다.
요한복음 20장 12절에 보면 마리아는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만납니다. 여러분들은 천사들을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직 천사들을 못 보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와 성자시대에는 쉐키나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완성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신약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천사들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둘째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4절을 보면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는 보았는데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가복음 16장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주님은 마리아가 전에 알고 있었던 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주님이 그곳에 계시라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눈물을 많이 흘려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에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마침내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어떻게 알아보았을까요? 주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마리아야"하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전에 늘 부르시던 음성으로 친히 그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거절
아마 이때 열심장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붙잡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직도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것 같고, 게다가 부활 후 주님은 과거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교제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4) 마리아의 즐거운 심부름 성취
또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니 마리아는 주님과 제자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영광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주신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승천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18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증거는 제자들에게 첫째 놀라움을 주었고, 둘째 기쁨을 주었고, 셋째 소망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전해 줍시다.
2.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물론 본문 2절의 '우리가'란 표현이 보여 주듯이 예수님의 무덤까지 간 여인들은 더 있었습니다.(눅23: 55- 눅 24:1) 하지만 이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마가 역시 이와 동일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막16: 9)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체를 보이셨을까요? 어떻게 하여 그녀는 이같이 큰 은혜를 맛볼 수 있었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함께 살펴봅시다.
(1)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녀는 갈릴리에서 온 많은 여인들과 함께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습니다. 또 에수님이 묻힌 무덤의 장소까지 알아 두었다가 안식일이 지나가자 무섭게 이 여인들과 함께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덥으로 갔습니다. 그뿐입니까? 본문 10, 11절을 보면,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까지 왔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곧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그냥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고, 무덤까지 따라가며, 끝내 시신까지도 잃지 않겠다는 마음,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되 "예수님이 죽었다고"고 생각되는 상황, 혹은 예수님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이러한 사랑과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2) 믿음의 형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사신이 없음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가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그녀는 즉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로 달려가 이를 알렸습니다. 물론 무덤에 같이 갔던 여인들도 이를 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로 갔습니다.(눅24: 8. 9)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먼저 달려가 이를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듣고 무덥에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결코 제자들을 잊지 않고 찾아가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18절) 천사들로부터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다른 여인들이 무서워 떨며 아무 말을 못할 때(막16:8), 막달라 마리아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과 믿음의 형제들을 찾아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린 것입니다.(막16: 10)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가 믿음의 형제들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렇듯 믿음의 형제를 잊지 않는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는 은혜를 베푸사 그녀로 하여금 받은 바 은혜를 믿음의 형제들에게 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께 대한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변치 맙시다. 어떠한 일시적인 감정에서 사랑하지 말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끝까지 지속적인 사랑을 합시다. 참된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2.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삶의 일대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영적인 병을 치유받은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마리아는 자신의삶을 온전히 예수님께 헌신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순례여행을 좇으며 그의 재산을 바쳐 도왔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바쳐 헌신합시다.
3.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마리아는 일곱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동시에 그 영혼도 죄악에서 벗어 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영혼같이 우리 영혼도 죄악에서 해방되었는가를 돌아봅시다.(롬8:2)
4. 구속함 받은 마리아는 주님을 섬기기로 다짐하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힘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를 대속해 주신 주님을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습니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 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6)
5. 일평생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제자들도 주를 버리는 상황에서 연약한 이 여인은 결단코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어떠한 태도로 주님을 뵈올 것입니까?(엡6:13)
6.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치료된 뒤에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들린 일곱 귀신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정신병이나 광기에 가까운 우울증 혹은 간질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하버트 록키어가 쓴 책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귀신이 완전히 들렸다가 예수님의 치유능력으로 깨끗하게 낫게 되었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이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좇아다니던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나가서 증거한 사람이 바로 사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로서 자격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비천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귀신의 지배 속에 살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의 능력으 로 자유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녀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의 형제를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마음을 가집시다.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마22: 37- 40) 이렇게 할 때 우리 역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큰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 기도: 나의 소망이신 하나님,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허무와 무의미함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눈물과 절망 속에 있는 나를 친히 찾아오셔서 새롭게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의 삶에서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소서. 저에게 막달라 마리아 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처럼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의 모든 자녀에게 약속하신 영광의 그날이 속히 오길 간절히 원합니다. 영원토록 주님만을 찬양하는 그때가 올 수 있도록 현재 맡겨진 하나님 나라 사명에 모든 열정을 다하게 하소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본문: 요한복음 20: 1- 18
오늘은 예수님의 여제자이며,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교훈을 얻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받는' '높다' '괴로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으로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간 여인입니다.
마리아가 살고 있었던 막달라는 '망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 탈무드의 증언에 의하면 막달라 지방은 염색과 직물공장, 생선저장 및 가공과 조선업 등이 발달한 상당히 부유한 상업의 중심지였고 이곳 주민의 대부분은 이교도였다고 합니다. 부도덕하고 성적 비행이 심하여 후대 이도시의 몰락을 방종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유한 고급창녀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와 갈릴리 여행에 동행한 것 등으로 볼 때 근거가 희박합니다. 당시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병에 시달렸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부도덕하다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어쨋든 일곱 귀신 들렸던 그녀는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았는데, 그녀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나서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했던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겼습니다.(눅8:2-3)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시는 주님을 울면서 쫓아갔습니다.(눅23:27-28)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가고, 떠났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 있었고(마27:56),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고 울면서 있었습니다.(요19:25) 그리고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 보았고(눅23:55), 장례 모습을 참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향유를 준비하여 주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주기도 하였는데 안식일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체에 향유를 부으려고(요20:1) 밝기도 전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해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안 찾아간다'고 합니다. 사람은 잘변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히13:8)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 생전, 십자가의 죽음, 무덤까지 따라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정열과 사랑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변함없이 뜨겁게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은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영광을 받을 때나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때도 변함없이 참고 견디며 주님을 사랑합시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기분이 좋지 않아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긴 줄 알고, 무덤 밖에서 울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이 땅에서 보기 싫은 것 중 하나가 사람의 시체일 것입니다. 새벽 아직 밝기도 전에, 공동묘지에서 여성이 남자의 시체를 찾는 것은 희생으로 봉사하려는 마음이 없이는 못할 일입니다.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전체를 다해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과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막16:9, 요20:11-18) 그녀는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전도에도 참여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에도 동행했습니다.(막15:41)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을 따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에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의 자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초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고 남자들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최초로 무덤에 간 것은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무덤에 갔다고 했습니다. 이때 요한은 젊고 게다가 영적으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뒤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을 재확인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요한이 제일 먼저 달려갔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의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뛰어도 피곤치 않으리라"는 말씀처럼 요한은 힘이 펄펄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나 열심은 막달라 마리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마리아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있었다는 점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무덤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무덤은 더 무섭습니다. 굴속에 시체를 두기 때문에 무덤에 간다는 것은 여간 무섭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자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남자들도 다 돌아갔는데 혼자 남아서 무덤에서 서성댄다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둘째로, 마리아가 "울면서"있었다는 점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의 거울이고, 그 표현입니다. 물론 눈물 중에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여인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물은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눈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셋째로, 마리아가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는 점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찾지 않을까 해서 무덤 속을 들여다 본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처럼 강한 마리아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2) 마리아의 주님 사랑의 결과
첫째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는 마리아는 두 천사를 만납니다.
요한복음 20장 12절에 보면 마리아는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만납니다. 여러분들은 천사들을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직 천사들을 못 보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와 성자시대에는 쉐키나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완성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신약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천사들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둘째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4절을 보면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는 보았는데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가복음 16장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주님은 마리아가 전에 알고 있었던 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주님이 그곳에 계시라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눈물을 많이 흘려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에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마침내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어떻게 알아보았을까요? 주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마리아야"하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전에 늘 부르시던 음성으로 친히 그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거절
아마 이때 열심장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붙잡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직도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것 같고, 게다가 부활 후 주님은 과거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교제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4) 마리아의 즐거운 심부름 성취
또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니 마리아는 주님과 제자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영광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주신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승천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18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증거는 제자들에게 첫째 놀라움을 주었고, 둘째 기쁨을 주었고, 셋째 소망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전해 줍시다.
2.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물론 본문 2절의 '우리가'란 표현이 보여 주듯이 예수님의 무덤까지 간 여인들은 더 있었습니다.(눅23: 55- 눅 24:1) 하지만 이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마가 역시 이와 동일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막16: 9)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체를 보이셨을까요? 어떻게 하여 그녀는 이같이 큰 은혜를 맛볼 수 있었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함께 살펴봅시다.
(1)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녀는 갈릴리에서 온 많은 여인들과 함께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습니다. 또 에수님이 묻힌 무덤의 장소까지 알아 두었다가 안식일이 지나가자 무섭게 이 여인들과 함께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덥으로 갔습니다. 그뿐입니까? 본문 10, 11절을 보면,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까지 왔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곧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그냥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고, 무덤까지 따라가며, 끝내 시신까지도 잃지 않겠다는 마음,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되 "예수님이 죽었다고"고 생각되는 상황, 혹은 예수님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이러한 사랑과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2) 믿음의 형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사신이 없음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가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그녀는 즉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로 달려가 이를 알렸습니다. 물론 무덤에 같이 갔던 여인들도 이를 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로 갔습니다.(눅24: 8. 9)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먼저 달려가 이를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듣고 무덥에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결코 제자들을 잊지 않고 찾아가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18절) 천사들로부터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다른 여인들이 무서워 떨며 아무 말을 못할 때(막16:8), 막달라 마리아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과 믿음의 형제들을 찾아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린 것입니다.(막16: 10)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가 믿음의 형제들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렇듯 믿음의 형제를 잊지 않는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는 은혜를 베푸사 그녀로 하여금 받은 바 은혜를 믿음의 형제들에게 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께 대한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변치 맙시다. 어떠한 일시적인 감정에서 사랑하지 말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끝까지 지속적인 사랑을 합시다. 참된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2.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삶의 일대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영적인 병을 치유받은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마리아는 자신의삶을 온전히 예수님께 헌신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순례여행을 좇으며 그의 재산을 바쳐 도왔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바쳐 헌신합시다.
3.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마리아는 일곱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동시에 그 영혼도 죄악에서 벗어 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영혼같이 우리 영혼도 죄악에서 해방되었는가를 돌아봅시다.(롬8:2)
4. 구속함 받은 마리아는 주님을 섬기기로 다짐하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힘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를 대속해 주신 주님을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습니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 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6)
5. 일평생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제자들도 주를 버리는 상황에서 연약한 이 여인은 결단코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어떠한 태도로 주님을 뵈올 것입니까?(엡6:13)
6.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치료된 뒤에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들린 일곱 귀신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정신병이나 광기에 가까운 우울증 혹은 간질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하버트 록키어가 쓴 책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귀신이 완전히 들렸다가 예수님의 치유능력으로 깨끗하게 낫게 되었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이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좇아다니던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나가서 증거한 사람이 바로 사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로서 자격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비천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귀신의 지배 속에 살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의 능력으 로 자유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녀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의 형제를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마음을 가집시다.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마22: 37- 40) 이렇게 할 때 우리 역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큰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 기도: 나의 소망이신 하나님,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허무와 무의미함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눈물과 절망 속에 있는 나를 친히 찾아오셔서 새롭게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의 삶에서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소서. 저에게 막달라 마리아 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처럼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의 모든 자녀에게 약속하신 영광의 그날이 속히 오길 간절히 원합니다. 영원토록 주님만을 찬양하는 그때가 올 수 있도록 현재 맡겨진 하나님 나라 사명에 모든 열정을 다하게 하소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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