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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2:2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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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요즈음 우리 사회는 온통 구조조정의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기업, 금융, 정부 및 정부출연기관, 공공단체, 심지어 대학과 예술계까지도 구조조정의 무풍지대로 남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역으로만 여겨졌던 군대까지도 구조조정을 한다하고, 국민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정쟁만 일삼고 있는 국회는 아예 퇴출시켜버리자는 여론까지 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미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언제 자기 자리가 없어질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전면적인 구조조정이 없이는 모두가 공멸하고 살아남기 어렵다는 절박한 생각 아래 구조조정을 절대절명의 국가적 과제로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남의 빚 얻어다가 흥청망청 파티를 즐긴 대가를 이제 본격적으로 치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남의 얘기할 때는 구조조정을 외치다가도 정작 자기 회사, 자기 은행, 자기 기관이 거론될 때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통 분담을 얘기하다가도 자기 집단만은 아니올시다며, 서로 상대방에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입니다. 이번 5개 은행의 퇴출시 은행원들의 무책임한 행태는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경위야 어떠하던, 누구의 책임이던,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밥을 먹여 주던 고객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마저 저버리고 자기 퇴직금부터 챙기고 싸보타주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실망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전례 없던 은행 퇴출을 맞아 허탈해 하며 실직의 위기에 발버둥치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핑계와 책임전가는 끝이 없는 법입니다. 이런 상태를 보면서 식자들은 일본 사람들이었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가상적 질문을 던져 봅니다. 얼마전 일본의 한 증권회사가 망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던 그 사장과 직원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기에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이번 은행의 폐쇄조치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총체적 문제를 단적으로 노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풍토, 누구든지 할 말이 있고 모두가 나만은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뻔뻔스러움이라고 할까요?
구조조정의 회오리 가운데 종교계, 우리 기독교계는 어떻습니까? 얼핏 보면 종교계만은 구조조정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사회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종교는 더 번창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선 당장은 기독교계도, 교회도 헌금 수입이 줄어들면서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임대료 수입에 의존해오던 각종 종교 단체들이 무척 곤란을 겪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는 헌금 수입이 격감하여 아주 많은 수의 목사를 해고하는 을 했다는 기막힌 얘기도 들립니다. 하기야 종교계도 구조조정을 해야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종교계야말로 구조조정의 대상 제 1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품경제처럼 종교계도 실속 없이 거품만 부풀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거품경제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자기 구실 못하고 거품사회와 더불어 함께 놀아난 거품종교에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습니다. 종교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물적 팽창의 논리에 사회 전체와 함께 놀아났으니 종교계라고 구조조정 안하고 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상업화된지 오래 된 한국 종교, 날로 번창하던 종교산업이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드디어 사양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냐 하는 위기 아닌 위기 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교회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어왔지만, IMF위기를 맞아 한국 종교계는 속되게 말해서 예수 팔아먹던 장사, 부처 팔아먹던 장사가 이제는 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더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위기라 해도 종교가 위기를 대하는 태도와 기업이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 종교의 구조조정은 기업의 구조조정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정신이 달라야 하며,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같은 논리, 같은 정신으로 종교가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 바로 이것 자체가 종교계의 비극이며, 이것이야말로 종교가 진정한 의미의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종교의 구조조정은 단순히 거품을 제거하는 일이나 규모를 축소하는 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당한 경제적 위기도 단순히 경제적 논리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안 되고 우리 한국인들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의 근본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습니다. 하물며 종교가 위기를 대하는 방식이야 두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종교가 지금까지 그 본래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왔다면, 지금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종교는 활동을 축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사업을 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에 세속의 제도나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계와 기독교계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구조조정은 기업들처럼 보다 높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한 구조조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예산에서 거품을 빼고 각종 활동을 축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보다 높은 이윤 추구를 위해, 그리고 보다 세찬 도약과 성장을 위해 효율성, 생산성,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논리를 종교가 따른다면 그것은 종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간과하는 일입니다. 나는 신학교 교과목 가운데서 제일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교회 성장론'이라는 과목입니다. 교회 성장을 당연한 목표로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과목이기에 그것이 무엇을 가르치겠는지 너무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나라 신학교에만 있는 과목일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목사들도 신도수가 늘지 않고 준다면 당연히 고민할 것이며, 타개책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놓고 공공연하게 신학교에서 교회 성장론을 가르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종교계, 기독교계의 진정한 구조조정은 활동과 재정의 축소가 아니라 잘못된 정신, 잘못 설정된 목표와 방향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반성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거품이 꺼지는 것을 위기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구조조정으로 대응하려는 한심한 작태, 이것이 진정한 위기입니다. 만약에 기업의 논리를 그대로 종교에 적용하여 구조조정으로 대응한다면, 지금은 하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하지만 호시절이 오면 또 다시 양적 확장을 하겠다는 생각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계, 교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구조조정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몇 달 전의 얘기이지만, MBC 방송 시사프로 2580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모 교회 목사의 비리를 - 여자 관계, 엄청난 재산 축적과 초호화판 주택 등 - 고발하다가 곤욕을 치르고 오히려 그 교회 신도들 때문에 방송사가 완전히 백기를 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바로 고 변선환박사를 종교재판으로 파직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꽁꽁 닫친 기독교의 문을 열고자 평생 고군분투한 변박사를 부흥사들을 동원해서 교단에서 몰아낸 주역이었기에 그 사람이 고발 프로의 주인공이었음을 알았을 때 별로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한심한 것은 우선 자기 목사와 자기 교회를 모독했다고 항의하는 신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그 고발 프로가 기독교를 음해했다고 교단 차원에서 항의를 했다는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종교가 뭐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몰지각하고 한심한 일을 자행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포리어바흐의 기독교 비판, 에리히 프롬의 권위주의적 종교 비판과 같이 기독교는 정말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모든 좋은 것 - 이성, 사랑, 창의성 등 - 을 몽땅 하나님께 양도함으로써 인간을 말도 못할 죄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비하하고 비인간화하는 종교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는 병신도라는 말이 정말 맞는가 봅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계기로 삼아 교회의 회개와 갱신 운동을 펼쳐도 시원치 않을 터에 집단 이기주의를 발동하여 오히려 비리 목사를 두둔하니, 도대체 신앙이란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됩니다. 얼마 전 한신대학의 채수일 목사님께서 우리들에게 '돈이 뭐길래'라는 설교 말씀을 해 주신 기억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작태를 보면서 '종교가 뭐길래'라는 질문을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돈과 종교는 얼핏보면 상반되는 것 같지만 둘다 자칫하면 인간을 소외시키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도 우리는 예수님 당시 종교에 의해 소외된 인간, 비인간화된 인간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종교의 희생제물이 되어버린 비인간화된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본래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율법이란 하나님의 은총, 사랑의 표현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율법도 역시 인간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고대 노예 사회에서의 인권 개념이 들어 있고, 심지어 동물과 토지의 쉴 권리까지도 인정하는 놀라운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출애굽기 19, 21장.
그런데 이렇게 좋은 안식일, 참으로 인간을 쉬게 하고 살리는 안식일의 근본취지와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안식일에 지켜야 되는 까다로운 조항들이 점점 더 불어나고 경직되게 해석됨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에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위해서 제정된 것인데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 같은 역리현상이 전개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역리를 고발하고 인간 해방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서 그는 대담하게 당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던 일들 - 밀 이삭을 뜯어먹은 일, 손 오그라진 자를 고쳐주는 일 - 을 서슴치 않고 행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동물도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동물보다 귀한 인간의 병을 못 고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에 묶여서 벌벌 떨고 있는 꽉 막힌 당시 지도자들, 비인간화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느꼈으며, 그들의 완고함, 답답함에 화도 나고 불쌍한 마음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셨다." 방송국을 점거한 모 교회 신도들의 행동을 보고 우리들이 느끼는 마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예수께서는 2,000년 전에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과 행동으로써 율법화된 종교, 경직화된 종교로부터 인간 해방을 선언하고 실천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께서는 종교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그 근본 이유, 목적, 취지, 정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인간이 종교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아마도 본래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이었으리라고 나는 대담한 추측을 해 봅니다. 예수는 종교에 구속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쩔쩔매는 어리석은 인간들, 소외된 인간들을 해방시키고, 그러한 소외를 강요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 어리석음, 한심한 작태를 고발하다가 결국 그들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감리교회 목사 극히 일부가 이번 문화방송 보도 사건에 항거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변선환 박사가 교단에서 축출될 때 침묵했던 그 사람들, 이번에도 또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교회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나 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조금도 과장 없이 오늘날 한국의 교회와 종교계에 그대로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련만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에 열을 올려 온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실상입니다. 무엇을 위한 신앙인지는 묻지 않고 오직 자기 교회만을 키우고 살찌게 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간주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늘어나고 기독교와 불교의 교세는 확장되어 우리 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신자라 하는데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온 사회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한국에서는 종교산업이 번창해 온 것이 사실이며 개업만 했다 하면 성업중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종교 비지네스가 이제 IMF 사태를 맞아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는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종교는 우상으로 변해 버리고 인간을 삼켜버리는 괴물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종교를 믿는다" "기독교를 믿는다"라는 말을 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이것부터 인간 소외를 수반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 신학, 제도, 예전, 성직자, 성경 등 종교의 모든 것은 다 역사적 산물로서 인간이 만든 것이며, 그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 세상의 종살이로부터 풀려나 자유인으로 살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어떤 지상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의 자녀로서 당당히 살게 하려는 데에 종교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 제도와 율법으로 우리를 얽매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을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종교 자체로부터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것을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종교는 참으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종교의 최종목표는 역설적으로 그 자체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비워서 초월적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선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지월, 즉 종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합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문자와 경전에 얽매어서 손가락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하나님을 만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며,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기보다는 교회와 제도에 묶어서 우리를 구속합니다. 종교의 마지막 유혹은 바로 자기를 우상화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성스러운 권위, 절대 권위로써 자기를 감싸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억압하는 제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종교의 교리, 경전, 신학, 예전, 제도, 조직 등 모두 다 필요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도 그런 것을 최소화한다고 하지만 역시 그런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사용하면 모두 좋은 은총의 수단이요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이 있지만, 종교가 무서워서 종교를 피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사고가 날까봐 차 운전을 아예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돈이 뭐길래, 종교가 뭐길래, 가끔 이렇게 묻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돈을 섬기고 종교를 섬기는 종노릇하지 않고 주인 노릇하려면 가끔씩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돈 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며, 종교 없는 세상도 없을 것입니다. 다 잘만 사용하면 유용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은총의 수단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해 줄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이 세계와 초월적 실재, 인간과 하나님을 매개해 주는 가시적인 은총의 수단들이 필요합니다. 불가시적 세계를 믿게 할 가시적 싸인들과 상징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은총의 수단, 매개체 가운데 최고의 존재입니다. 그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싸인 포스트의 역할을 할 다양하고 풍부한 매개체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 종교는 더 훌륭한 종교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종교는 여러 가지 방법과 다양한 매개체들을 통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며, 우리를 세상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무미건조한 개신교보다는 다채로운 예식과 상징체계를 가진 카톨릭이 더 훌륭한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개체는 어디까지나 매개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매개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종교는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권위적 존재로 변할 가능성 또한 많아지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새길교회는 그런 매개체들을 최소화하고 간소화해서, 줄이고 털어서 종교의 본질,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종교의 종살이가 지겹고 제도화된 종교에 실망해서 종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최소한의 교회생활을 하려고 모인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일찍부터 구조조정을 해버린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교회 생활, 최소한의 종교 생활을 하려는 것이 우리 새길교회 신자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최대한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교회생활은 최소화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은 최대화하는 교회를 우리들은 원합니다.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닫힌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향해 열린 교회, 예수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우리는 추구합니다.
감리교회에 이용도 목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우리 민족의 절망적인 시대에 태어나서 한 시대를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간 목사였습니다. 그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술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많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야 했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고,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애국운동에 가담하면서 수많은 옥고를 치렀고, 1933년 10월 2일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예수와 같이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나라 기독교 100년 역사상 이용도 목사만큼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살다간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과격한 말을 서슴치 않는 부흥사요, 신학사상이 의심받는 신비주의자로 알려져 교계에서 이단으로 몰리면서 박해받고 배척 당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그 사람만큼 깊이 깨닫고 몸으로 실천한 사람은 바울 이후에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할 정도의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는 예수의 정신, 예수의 생명, 예수의 십자가를 조금도 가감 없이 문자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자기의 육적인 삶, 세상적 정욕, 이전의 생명을 철저히 끊어버리고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끓어버리고 다만 당신과 당신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불구자를 만들어 주소서.
아주 나라는 관념을 없이하여 주소서. 그리고 나의 속에는 오직 주님만이 살아 계시옵소서. 주가 움직이어 내가 움직이게 하여 주옵소서.
신앙이란 곧 생명의 역환의 일이외다. 세상에 살던 나의 죄악의 생명은 하늘에 사는 예수의 생명과 바꾸어지고 물을 바라던 나의 생명은 영을 원하는 그 생명과 바꾸어지고 . . . 신앙생활이란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이었습니다. 믿는다 하여도 이 생명의 역환이 없이! 그는 아직 사망에 거하는 자 올시다.
이렇게 자기의 생명과 예수의 생명이 역환 되는 삶을 위해 그는 3가지를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고통은 나의 선생 : 고통이 올 때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 평안할 때보다 더 많으며 또 참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빈곤의 나의 애처 : 가난함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나를 떠나지 않나니 나는 건방진 부보다 착한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천은 나의 궁전 : 나는 높은데 처하여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은 늘 겸비하여 낮은 데 처해 있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비천은 늘 내가 처하여 있을 궁전이 됩니다. 고통과 빈곤과 비천을 좋아하게 되면 다 되는 때입니다.
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이용도 목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나는 인생을 헛살았구나, 예수를 잘못 믿고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온 몸을 휘감습니다. 십자가의 길, 철저한 자기부정의 길, 이것만이 진정한 종교의 구조조정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서 자기는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세상을 위한 존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이요 교회의 진정한 존재 이유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구조조정의 회오리 가운데 종교계, 우리 기독교계는 어떻습니까? 얼핏 보면 종교계만은 구조조정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사회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종교는 더 번창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선 당장은 기독교계도, 교회도 헌금 수입이 줄어들면서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임대료 수입에 의존해오던 각종 종교 단체들이 무척 곤란을 겪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는 헌금 수입이 격감하여 아주 많은 수의 목사를 해고하는 을 했다는 기막힌 얘기도 들립니다. 하기야 종교계도 구조조정을 해야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종교계야말로 구조조정의 대상 제 1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품경제처럼 종교계도 실속 없이 거품만 부풀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거품경제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자기 구실 못하고 거품사회와 더불어 함께 놀아난 거품종교에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습니다. 종교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물적 팽창의 논리에 사회 전체와 함께 놀아났으니 종교계라고 구조조정 안하고 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상업화된지 오래 된 한국 종교, 날로 번창하던 종교산업이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드디어 사양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냐 하는 위기 아닌 위기 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교회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어왔지만, IMF위기를 맞아 한국 종교계는 속되게 말해서 예수 팔아먹던 장사, 부처 팔아먹던 장사가 이제는 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더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위기라 해도 종교가 위기를 대하는 태도와 기업이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 종교의 구조조정은 기업의 구조조정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정신이 달라야 하며,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같은 논리, 같은 정신으로 종교가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 바로 이것 자체가 종교계의 비극이며, 이것이야말로 종교가 진정한 의미의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종교의 구조조정은 단순히 거품을 제거하는 일이나 규모를 축소하는 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당한 경제적 위기도 단순히 경제적 논리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안 되고 우리 한국인들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의 근본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습니다. 하물며 종교가 위기를 대하는 방식이야 두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종교가 지금까지 그 본래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왔다면, 지금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종교는 활동을 축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사업을 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에 세속의 제도나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계와 기독교계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구조조정은 기업들처럼 보다 높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한 구조조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예산에서 거품을 빼고 각종 활동을 축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보다 높은 이윤 추구를 위해, 그리고 보다 세찬 도약과 성장을 위해 효율성, 생산성,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논리를 종교가 따른다면 그것은 종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간과하는 일입니다. 나는 신학교 교과목 가운데서 제일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교회 성장론'이라는 과목입니다. 교회 성장을 당연한 목표로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과목이기에 그것이 무엇을 가르치겠는지 너무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나라 신학교에만 있는 과목일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목사들도 신도수가 늘지 않고 준다면 당연히 고민할 것이며, 타개책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놓고 공공연하게 신학교에서 교회 성장론을 가르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종교계, 기독교계의 진정한 구조조정은 활동과 재정의 축소가 아니라 잘못된 정신, 잘못 설정된 목표와 방향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반성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거품이 꺼지는 것을 위기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구조조정으로 대응하려는 한심한 작태, 이것이 진정한 위기입니다. 만약에 기업의 논리를 그대로 종교에 적용하여 구조조정으로 대응한다면, 지금은 하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하지만 호시절이 오면 또 다시 양적 확장을 하겠다는 생각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계, 교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구조조정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몇 달 전의 얘기이지만, MBC 방송 시사프로 2580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모 교회 목사의 비리를 - 여자 관계, 엄청난 재산 축적과 초호화판 주택 등 - 고발하다가 곤욕을 치르고 오히려 그 교회 신도들 때문에 방송사가 완전히 백기를 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바로 고 변선환박사를 종교재판으로 파직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꽁꽁 닫친 기독교의 문을 열고자 평생 고군분투한 변박사를 부흥사들을 동원해서 교단에서 몰아낸 주역이었기에 그 사람이 고발 프로의 주인공이었음을 알았을 때 별로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한심한 것은 우선 자기 목사와 자기 교회를 모독했다고 항의하는 신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그 고발 프로가 기독교를 음해했다고 교단 차원에서 항의를 했다는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종교가 뭐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몰지각하고 한심한 일을 자행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포리어바흐의 기독교 비판, 에리히 프롬의 권위주의적 종교 비판과 같이 기독교는 정말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모든 좋은 것 - 이성, 사랑, 창의성 등 - 을 몽땅 하나님께 양도함으로써 인간을 말도 못할 죄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비하하고 비인간화하는 종교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는 병신도라는 말이 정말 맞는가 봅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계기로 삼아 교회의 회개와 갱신 운동을 펼쳐도 시원치 않을 터에 집단 이기주의를 발동하여 오히려 비리 목사를 두둔하니, 도대체 신앙이란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됩니다. 얼마 전 한신대학의 채수일 목사님께서 우리들에게 '돈이 뭐길래'라는 설교 말씀을 해 주신 기억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작태를 보면서 '종교가 뭐길래'라는 질문을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돈과 종교는 얼핏보면 상반되는 것 같지만 둘다 자칫하면 인간을 소외시키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도 우리는 예수님 당시 종교에 의해 소외된 인간, 비인간화된 인간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종교의 희생제물이 되어버린 비인간화된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본래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율법이란 하나님의 은총, 사랑의 표현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율법도 역시 인간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고대 노예 사회에서의 인권 개념이 들어 있고, 심지어 동물과 토지의 쉴 권리까지도 인정하는 놀라운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출애굽기 19, 21장.
그런데 이렇게 좋은 안식일, 참으로 인간을 쉬게 하고 살리는 안식일의 근본취지와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안식일에 지켜야 되는 까다로운 조항들이 점점 더 불어나고 경직되게 해석됨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에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위해서 제정된 것인데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 같은 역리현상이 전개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역리를 고발하고 인간 해방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서 그는 대담하게 당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던 일들 - 밀 이삭을 뜯어먹은 일, 손 오그라진 자를 고쳐주는 일 - 을 서슴치 않고 행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동물도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동물보다 귀한 인간의 병을 못 고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에 묶여서 벌벌 떨고 있는 꽉 막힌 당시 지도자들, 비인간화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느꼈으며, 그들의 완고함, 답답함에 화도 나고 불쌍한 마음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셨다." 방송국을 점거한 모 교회 신도들의 행동을 보고 우리들이 느끼는 마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예수께서는 2,000년 전에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과 행동으로써 율법화된 종교, 경직화된 종교로부터 인간 해방을 선언하고 실천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께서는 종교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그 근본 이유, 목적, 취지, 정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인간이 종교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아마도 본래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이었으리라고 나는 대담한 추측을 해 봅니다. 예수는 종교에 구속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쩔쩔매는 어리석은 인간들, 소외된 인간들을 해방시키고, 그러한 소외를 강요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 어리석음, 한심한 작태를 고발하다가 결국 그들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감리교회 목사 극히 일부가 이번 문화방송 보도 사건에 항거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변선환 박사가 교단에서 축출될 때 침묵했던 그 사람들, 이번에도 또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교회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나 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조금도 과장 없이 오늘날 한국의 교회와 종교계에 그대로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련만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에 열을 올려 온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실상입니다. 무엇을 위한 신앙인지는 묻지 않고 오직 자기 교회만을 키우고 살찌게 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간주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늘어나고 기독교와 불교의 교세는 확장되어 우리 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신자라 하는데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온 사회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한국에서는 종교산업이 번창해 온 것이 사실이며 개업만 했다 하면 성업중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종교 비지네스가 이제 IMF 사태를 맞아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는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종교는 우상으로 변해 버리고 인간을 삼켜버리는 괴물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종교를 믿는다" "기독교를 믿는다"라는 말을 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이것부터 인간 소외를 수반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 신학, 제도, 예전, 성직자, 성경 등 종교의 모든 것은 다 역사적 산물로서 인간이 만든 것이며, 그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 세상의 종살이로부터 풀려나 자유인으로 살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어떤 지상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의 자녀로서 당당히 살게 하려는 데에 종교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 제도와 율법으로 우리를 얽매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을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종교 자체로부터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것을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종교는 참으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종교의 최종목표는 역설적으로 그 자체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비워서 초월적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선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지월, 즉 종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합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문자와 경전에 얽매어서 손가락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하나님을 만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며,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기보다는 교회와 제도에 묶어서 우리를 구속합니다. 종교의 마지막 유혹은 바로 자기를 우상화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성스러운 권위, 절대 권위로써 자기를 감싸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억압하는 제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종교의 교리, 경전, 신학, 예전, 제도, 조직 등 모두 다 필요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도 그런 것을 최소화한다고 하지만 역시 그런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사용하면 모두 좋은 은총의 수단이요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이 있지만, 종교가 무서워서 종교를 피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사고가 날까봐 차 운전을 아예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돈이 뭐길래, 종교가 뭐길래, 가끔 이렇게 묻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돈을 섬기고 종교를 섬기는 종노릇하지 않고 주인 노릇하려면 가끔씩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돈 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며, 종교 없는 세상도 없을 것입니다. 다 잘만 사용하면 유용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은총의 수단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해 줄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이 세계와 초월적 실재, 인간과 하나님을 매개해 주는 가시적인 은총의 수단들이 필요합니다. 불가시적 세계를 믿게 할 가시적 싸인들과 상징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은총의 수단, 매개체 가운데 최고의 존재입니다. 그의 말씀과 행적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싸인 포스트의 역할을 할 다양하고 풍부한 매개체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 종교는 더 훌륭한 종교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종교는 여러 가지 방법과 다양한 매개체들을 통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며, 우리를 세상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무미건조한 개신교보다는 다채로운 예식과 상징체계를 가진 카톨릭이 더 훌륭한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개체는 어디까지나 매개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매개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종교는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권위적 존재로 변할 가능성 또한 많아지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새길교회는 그런 매개체들을 최소화하고 간소화해서, 줄이고 털어서 종교의 본질,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종교의 종살이가 지겹고 제도화된 종교에 실망해서 종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최소한의 교회생활을 하려고 모인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일찍부터 구조조정을 해버린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교회 생활, 최소한의 종교 생활을 하려는 것이 우리 새길교회 신자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최대한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교회생활은 최소화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은 최대화하는 교회를 우리들은 원합니다.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닫힌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향해 열린 교회, 예수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우리는 추구합니다.
감리교회에 이용도 목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우리 민족의 절망적인 시대에 태어나서 한 시대를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간 목사였습니다. 그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술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많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야 했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고,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애국운동에 가담하면서 수많은 옥고를 치렀고, 1933년 10월 2일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예수와 같이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나라 기독교 100년 역사상 이용도 목사만큼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살다간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과격한 말을 서슴치 않는 부흥사요, 신학사상이 의심받는 신비주의자로 알려져 교계에서 이단으로 몰리면서 박해받고 배척 당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그 사람만큼 깊이 깨닫고 몸으로 실천한 사람은 바울 이후에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할 정도의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는 예수의 정신, 예수의 생명, 예수의 십자가를 조금도 가감 없이 문자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자기의 육적인 삶, 세상적 정욕, 이전의 생명을 철저히 끊어버리고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끓어버리고 다만 당신과 당신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불구자를 만들어 주소서.
아주 나라는 관념을 없이하여 주소서. 그리고 나의 속에는 오직 주님만이 살아 계시옵소서. 주가 움직이어 내가 움직이게 하여 주옵소서.
신앙이란 곧 생명의 역환의 일이외다. 세상에 살던 나의 죄악의 생명은 하늘에 사는 예수의 생명과 바꾸어지고 물을 바라던 나의 생명은 영을 원하는 그 생명과 바꾸어지고 . . . 신앙생활이란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이었습니다. 믿는다 하여도 이 생명의 역환이 없이! 그는 아직 사망에 거하는 자 올시다.
이렇게 자기의 생명과 예수의 생명이 역환 되는 삶을 위해 그는 3가지를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고통은 나의 선생 : 고통이 올 때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 평안할 때보다 더 많으며 또 참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빈곤의 나의 애처 : 가난함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나를 떠나지 않나니 나는 건방진 부보다 착한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천은 나의 궁전 : 나는 높은데 처하여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은 늘 겸비하여 낮은 데 처해 있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비천은 늘 내가 처하여 있을 궁전이 됩니다. 고통과 빈곤과 비천을 좋아하게 되면 다 되는 때입니다.
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이용도 목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나는 인생을 헛살았구나, 예수를 잘못 믿고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온 몸을 휘감습니다. 십자가의 길, 철저한 자기부정의 길, 이것만이 진정한 종교의 구조조정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서 자기는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세상을 위한 존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이요 교회의 진정한 존재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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