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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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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우리는 지금 큰 창고로 변질되는 듯이 보이는 한국 교회를 봅니다. 교회주의자들은 교회를 영의 이름으로 세속적 창고로 착각하고, 그 속에 온갖 재물로 가득 채우려는 듯 합니다. 쌓아 올리기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교회를 물량적으로 확장하기에 여념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런데 유럽에 가 보면 교회는 으시시한 박물관이나 무덤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곳에서는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기 힘듭니다. 큰 교회나 성당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과연 그러한 큰 건물에 사랑의 하나님이 살아 움직이실까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큰 창고같거나 낡은 박물관같은 오늘의 교회는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답답하게 가두어 두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니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사람들 사이에서 브로커(broker) 노릇을 하는 종교인들의 집회장소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힘을 빌려 죄인을 겁주면서, 그들에게 만병통치식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브로커들의 교회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듯 합니다.
그런가하면 얄팍한 카리스마를 과시하거나 거짓으로 과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오게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성곽같은 큰 교회를 만들고, 자기는 敎主처럼 행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때 교회는 절대복종을 신도들에게 강요하면서, 자기 교회 안에서만 구원이 보장되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세기말이 되니 종말론적 광기를 지닌 교주들이 더욱 날뛰는 듯 합니다.
과연 이같은 현실이 성서적입니까?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건설을 위해 일하셨을 때 난공불락같은 성곽교회를 현주소로 확고히 삼으시고, 城主가 되려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선교활동을 위시한 성서의 주요 사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여행과 순례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삶은 바로 이와 같은 여행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우리는 구약의 두 큰 사건(macro-events)을 순례의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바벨론 포로생활과 예루살렘 귀환사건입니다. 이 두 큰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규범을 제공했으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며, 그들의 신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신앙여행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 5경의 배경사건으로, 그 의미는 종교의식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유월절의 엄수가 그러한 것이지요. 그것은 한낱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 항상 그 의미를 학습시킴으로써 오늘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왕의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종착지점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해방여행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과 예루살렘 귀환사건(BC 587-539)도 이국 땅에 포로로 잡혀가 차별과 억압, 소외와 굴욕을 받았던 처량했던 나그네의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 고향 예루살렘으로 귀향하여 정의와 평화를 새롭게 세우고, 회개와 개혁을 추진했던 여행사건입니다. 히브리 말의 '회개'는 원래 귀환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나그네의 슬픔을 바벨론 땅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 잡아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의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1-4)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기쁨과 그 의미에 대해서 이사야 40장은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선언은 마가복음이 예수운동의 성격을 엄숙하게 알리는 말씀으로 재인용합니다. 거기에 길(hodos)에 대한 언급이 여러번 나옵니다. 이 길은 여행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을 바로 이 길 위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순례자 예수는 순례 공동체 운동을 펼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를 이룩하시려고 순례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같은 길 위에서 항상 움직였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뿌리내린 기득권 세력과 맞서게 됩니다. 이제 길 위헤서 선교여행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본문에 따라 따라가 봅시다.
예수님의 일행은 시몬(베드로) 집으로 가시어 마침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무상의 치료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의 치료행위에 나타나는 특징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시의 전통적 율법주의식 치료방식을 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탈무드 방법에 따르면 열병치료는 주술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시떨기 나무에 쇠칼을 머리카락으로 된 노끈으로 묶어놓고, 매일 주문 외우듯 출애굽기 3장 2-5절을 반복적으로 외워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치유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먼저 환자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고통의 현장에 바짝 다가 가시고 손으로 그 환자를 잡으셨습니다. 참으로 간단하고 신선한 恤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인간적인 접근이었습니다. 앓고 있는 환자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만지지도 않으면서 주문만 외운다고 무슨 위로와 힘이 되겠습니까?
둘째, 예수님께서는 무상의 치료를 하시면서 기존의 정결체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외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해서도 안되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서 말을 걸어도 안되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같은 여성차별적 관행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여자는 원칙적으로, 不敬하고, 不淨하고, 不潔한 존재로 맏었던 당시 관례에서 보면 예수님의 이같은 치유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 자체가 파격적인 운동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환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방식으로 병을 고치시면서도 무상으로 치유해 주셨기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시몬의 문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같이 多衆이 모이게 되면 필경 탐욕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시몬 집 대문에 이라는 문패만 달았어도 장사는 잘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되면 권력과 금력의 욕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러합니다. 게다가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들어서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시몬 일행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어떤 욕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짐작을 좀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제 1세기 지중해 문화권의 계급상황을 잠시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는 소수의 상류계급과 다수의 하류계급만이 존재했습니다. 중간계급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회통합과 안정은 그런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까닭은 두 계급이 보호자-피보호자 관계(patronage-clientage)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오야봉-꼬붕 관계,또는 주인과 고객간의 관계가 존재했습니다. 하류층은 상류층에게 봉사와 충성을 바치고, 상류층은 하층인을 의무적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기야 상류층 안에서도 힘의 관계에 따라 주인과 고객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중간에 브로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브로커는 윗사람에게는 봉사와 충성을 바치고, 아랫사람에게는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호자로서 상류층이 하류층을 보호해 주는 행위는 그들의 도덕적 의무라는 사실입니다(noblesse oblige). 이 의무를 잘 지킨 상류층을 위한 송덕비가 지금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보호자-피보호자 관계와 브로커 역할은 계급 갈등을 해소해 주었는데, 이같은 관습이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에서도 통용되었습니다. 바로 이같은 제 1세기 관례에 따르면, 예수께서 나사렛 본가에 현 주소를 두셨으니, 그곳에 마땅히 치유본부를 설치해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보호자-피보호자라는 상하관계를 형성했어야 정상적이라 하겠습니다. 아니면 시몬이 브로커가 되어 자기 집을 치유 신흥종교 본부로 삼아 예수의 카리스마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바로 그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떠돌아 다니신 것을 그의 가족들까지 반대했음을 성서는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문화에 따라 그렇게 했더라면, 예수님, 그 가족, 제자들 그리고 동네 모두가 이익을 챙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5절에 보면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물러 새로운 종교운동의 본부를 설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이 드러납니다. 多衆을 보시고 신흥종교 장사를 할 생각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한 곳에 정착된 개척교회를 하실 생각도 없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하기 위한 조직 근거를 마련할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중의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城主나 敎主가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주님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하고, 숭고한 모습입니까? 제가 화가라면 바로 이 예수님, 새벽에 홀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그 고결한 모습을 화폭에 옮겨 보고 싶어 견딜 수 없겠습니다. 따르는 사람들의 머리 수가 힘이요, 돈인데, 그것을 물리치신 주님의 그 고결한 모습을 오늘의 대교회 교주들은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 35절을 보면, 시몬 일행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을 본부삼아 치유 컬트(healing cult) 같은 신흥 종교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이 브로커 노릇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신흥교파의 교주로 모시고 떼돈을 벌거나 사회적 위력을 과시해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그때도 종말론적 담론이 널리 퍼져 있을 때가 아닙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기 장모의 열병이 감쪽같이 자기 집에서 나은 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직접 목도했기 때문에 그만큼 자기 집의 가치를 더 높이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피곤한 여행길에 나서기 보다는 자기 집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결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보고 뒷면에는 선생님의 그 신통한 치유능력과 신유의 권능을 맘껏 활용하여 가버나움 한 곳에 힘을 모아 보자는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 자신이 거대한 신세력의 브로커 노릇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본문을 보면 우리는 길 위로 나가시려는 주님의 단호한 의지를 읽게 됩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이 일이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순례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무상의 치유와 열린 식탁 공동체 운동을 펼치시겠다는 일입니다. 특정 장소에 고착된 선교는 하나님 뜻에 맞지 않습니다. 특정 장소나 건물이 하나님 선교의 본부가 되면, 그곳이 바로 신성시되거나 절대화되기 쉽습니다. 가 보다 더 중요해지고 이 건물이 저 건물보다 더 신성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상하의 불평등이 생기게 됩니다. 그간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화되어 온 것이 그러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루살렘 사제세력이 그같은 부당한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재생산 시키고, 심화시켰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성전을 숙정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길 위에서 열린 식탁 공동체를 친히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식탁은 그 시대 그 사회구조와 사회계급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식탁에 도무지 초대받을 수 없는 "불결한 인간들"을 주님은 초대하셨습니다. 닫쳐있던 식탁 공동체를 주님께서는 활짝 여셨고, 또 그 본부를 어느 특정 지역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동 식탁을 순례중에 활짝 여셨습니다. 순례 선교 도상에서 무료치료도 하셨습니다. 단순한 생물학적 질병(disease)만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 질병의 뿌리가 되는 아픔(illness)을 제거하셨습니다. 병의 원인으로 인식되었던 죄까지 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메시지를 배경삼아 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주는 혁명적 의미를 되씹어 봅시다. 하나님을 사랑으로 보신 예수님의 신관은 당시 문화권에서는 놀라운 인식이요 발상이었습니다. 먼저 희랍-로마의 신은 자기들끼리는 변덕스럽고 질투하는 신이면서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無心한 신이었습니다. 허나 예수님의 하나님은 함께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자궁속에 있는 자기 자식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엄마의 사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同苦의 신이지요. 얼마나 인간적인 신입니까?
더 놀라운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면서 인간위에 심판주로 군림하는 유대인들의 신과 예수님의 하나님은 너무나 달랐다는 점입니다. 객관적 범주로 인식되는 하나님이나 범주화되는 하나님을 주님께서는 거부하셨습니다. 특히 저 웅장한 예루살렘 한 복판에 있는 "성전의 지성소에 항상 거하시는 신은 예수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사제계급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던 신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라는 선언은 객관적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 범주화된 하나님의 사망 선고와도 같습니다. 개념은 죽었으나 그 사랑은 엄청난 폭팔력을 지닌 감동의 힘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스스로를 비워낼 수 있는 놀라운 힘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십니다. 참으로 약하기에 강한 그러한 분이십니다. 남을 위해서는 강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너무나 허약한 분이십니다.
바로 이같은 사랑의 하나님은 바로 예수의 순례 선교중에서 열린 식탁을 자주 마련하시어 지극히 적은자들과 나중된 자들을 초청해 주셨으며 그들의 아픔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순례여행에 가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한 가지 뜻깊은 권고를 해 주셨습니다. 곧 가볍게 여행하도록(travel light) 권고하셨습니다. 무거운 짐지고 여행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진리를 향한 여행을 하면서 세 속의 권세와 금력의 짐을 지고 다니는 자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례도상에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아라...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의 참 뜻과 그 단 맛을 누가 먼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여행하는 나그네만이 그 깊은 뜻을 깨닫고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가볍게 여행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너무 확고한 현주소를 갖고 거기에 큰 창고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무거운 짐과 현주소를 버리고 주님과 함께 순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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