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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얻는 길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784 추천 수 0 2008.09.18 14: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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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8:31-3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9.14 

베드로의 신앙고백


오늘 말씀은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7절 이하에 보도된 그 사건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빌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을 향해서 길을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제 베드로가 성큼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31절에 그리스도와 거의 비슷한 의미인 '사람의 아들'이 받아야 할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원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에게 고난과 부활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했을까요? 물론 고난과 죽음을 말리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말씀도 함께 하셨다는 걸 보면 베드로의 행동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린 것은 부활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또는 예수님이 고난과 부활을 함께 말씀하셨지만 베드로의 귀에는 부활이라는 말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들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별로 자신들에게 실제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만 들리거나,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말만 들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선생님이 그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서 처단된다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어떤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권력자들을 끌어내리고 명실상부하게 유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베드로를 비롯한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즉 '사람의 아들'에 대한 생각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주 소박한 생각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거나 죽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자기 선생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걸 내버려둘 제자는 없습니다. 또한 그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신앙적 차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깨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랐습니다. 그것도 서운할 정도로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할 정도로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이렇게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의 태도로서는 정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책망했다는 것은 결국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문제가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왜 칭찬하신 걸까요?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책망받은 이 두 사건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별개의 사건을 성서 기자들이 편집과정에서 한 데 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신 것을 보면 베드로가 갖고 있던 그 당시의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 표상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간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그리스도 사건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


예수님은 그 문제를 34절 이하에서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34,35).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인데도 여기서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그 당시의 십자가는 반국가사범들에게만 해당된 처형방식이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반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국가는 로마를 뜻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상징적인 차원에서 언급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후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말씀에 이런 십자가라는 용어를 보탰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그 당시의 모든 정황을 완벽하게 잡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그 근본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지키려고 하면 잃게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을 뜯어말리려 했던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거의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모든 힘을 쏟습니다. 조금 생각이 깊거나 낮거나 상관없이 거의 자기를 지켜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조금 과격한 사람들은 출세하고 돈 버는 일을 통해서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착하게 사는 것으로 자기의 생명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결국 자기 생명을 잃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대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사람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조금이라고 정직하게 들여야 본다면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든다면, 먹거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쌀과 사과 농사를 짓습니다만 그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태양과 탄소와 물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차원에서 물리 화학적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그런 먹거리가 생산됩니다. 우리의 육체에 속한 생명을 지켜내는 일도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우주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인간이 과학의 힘으로 그런 우주적 생명 사건을 조작하거나 진작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작용할 뿐입니다. 더구나 인간이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결국 자연과 우주는 인간의 최소 생존 조건을 허물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소비를 만족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과학이라면 어느 날이 이르면 결국 인간의 생명을 송두리째 앗아갈 것입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의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옳습니다. 우리의 이기심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지켜내려는 삶의 태도인데, 그 이기심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입니다. 사람은 혼자만의 힘으로 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면 결국 죽게 됩니다. 겉으로는 잘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점점 황폐화의 길을 걷습니다. 잘난 척하는 교만한 마음은 끊임없이 자기를 나타낼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 대상이 있으면 목에 힘을 주고,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런 정신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겉으로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것이나 똑같습니다. 즉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역시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지켜낼 만한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생명에 대해서 무능력한 존재인 인간이 자기의 업적과 성취에서만 생명을 확인하려고 하게 될 때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집중


대개의 경우에 신앙 세계에 있는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를 확대시키는 일에 몰두하면서 겉으로만 기독교적인 교양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다는 말씀을 아주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인 삶에서는 철저하게 자기를 확대시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용납하면서 교회 상호간에 생존 경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대교회 50개 교회 중에 한국에 과반수가 있는 상황이면서도 동시에 한국교회의 30% 이상이 미자립이라는 이 현실이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회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이 엄정한 사실 앞에서도 교회들은 생존을 위협받는 이웃 교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몸집을 키우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 대형교회는 미자립 소형교회를 우습게 보고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태도는 결국 구원과 거리가 멉니다. 이 세상 방식으로 제 목숨을 자기가 지키려는 태도이니까 말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 가능한대로 겸손하고 물질적인 욕심을 내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들은 성장주의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인의 윤리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하는 데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덕성 회복운동이라든지, '내탓이오' 운동 같은 것들을 펼쳐나갑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엄격한 청교도적인 정신에 근거해서 비도덕적인 것을 검열합니다. 동성애자와 미혼모를 죄악시하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을 청결하게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사실 이런 정도로 자기를 억제하면서 사회의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자칫하면 자기의 겸손과 도덕성이 또 하나의 자기 구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은 다른 데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길밖에는 그 어디에도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없습니다. 이 생명의 근원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사람이 구름을 잡거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36,37).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온 세상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다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길,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의 길은 곧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35). 이 말씀이 바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는 삶의 태도에 대한 해명입니다. '나와 복음'은 하나의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즉흥적으로 우리에게 순교를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목숨을 잃는다'는 말을 문자의 범주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순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늘 기독교 신앙과 순교의 양자대결에 집중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날카로움이 있습니다만 이런 대립을 이해하려면 우선 목숨을 잃는다는 말의 뜻을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앞서 설명한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에 대한 설명을 기억한다면, 이 말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나가는 일에 모든 힘을 쏟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포기합니다. 대신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집중합니다. 자기를 확대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추구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의 방식으로 자기를 이루는 일에는 소홀하게 됩니다. 그게 곧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대로 잔치 자리에 가서도 높은 자리에 앉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낮은 자리에 앉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늘 자기를 낮춥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이 세상의 질서에서 볼 때 이런 사람은 죽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는 것입니다.  


절대세계에 대한 집중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훨씬 근본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절대적인 세계로 관심을 바꾸는 것이 바로 목숨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시오. 그것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오. 당신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이외의 것들도 채워주실 것이오. 인간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는 분을 위해서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똑같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늘 주식 투자에만 신경을 씁니다. 결국 그 사람은 주식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든지 또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삶에 기쁨과 자유가 얼마나 확보되는가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국 주식으로 돈을 벌게 되는지 손해를 보든지 상관없이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생명일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빗대어서 말하자면, 주식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를 잃었다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생명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다른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생명에 참여한다고 믿습니다. 노자와 장식 식으로 말하자면 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생명을 구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단 자기가 이루는 구원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만 절대의 생명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성취할 수 있는 생명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음이 임하면 안 된다고 펄쩍 뛴 베드로처럼 자기에게 확인된 것만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뿐이지, 보이지 않는, 더 정확히 말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 보이지 않지만 정말 확실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인간이 생산한 것에만 목숨을 걸어두고 사는 사람은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때가 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부끄러움이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돈 없는 것을 가장 부끄러워합니다. 겉으로는 돈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돈이 없다는 사실을 힘들어합니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교만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최고 인기를 얻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그의 연봉에 따라서 이루어지기까지 합니다. 이미 많은 대학에서는 이런 연봉제로 교수들을 묶어두고 있습니다. 지난 추석 때 처갓집에 갔을 때 우연히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구 사람들이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박정희 전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우리와 비교해서 터무니없이 못살기 때문에 그들 체제는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력해서 이루어놓은 가시적인 토대를 생명 자체로 여긴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평화와 기쁨과 사랑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 결국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


오늘 설교의 제목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아닌 것을 생명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고난이 임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곧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은 자기 노력으로 자기를 확인하는 일에서 생명을 소유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그 절대 생명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인간적 범주 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듯 생안에 한정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여명에 대해서 모릅니다. 지금 사는 것과 죽음도 모르듯 생명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이르러야 생명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광이 무엇인지, 거룩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이르기 전인, 지금의 이 중간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생명을 우리가 성취해나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의 영이 우리의 삶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200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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