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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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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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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 |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들이 예수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깨달은 것을 우리의 오늘 상황으로 끌어다 새롭게 그 깨달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는 억울하고, 재수 없는 끔찍한 죽음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존파의 살인행위와 그들에 의해 죽은 억울한 죽음 그리고 온씨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젊은 여성들의 죽음,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합니까? 이와 같은 죽음을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러한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성서상황, 예수님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때의 억울한 죽음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하였나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제국의 폭력에 맞서 당시 폭력으로 대응하려 했던 세력에 대해 폭력저항은 결국 폭력의 악순환을 낳게 됨을 경고하시고 제도폭력이나 저항폭력 시대에 사랑만이 이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다가오는 미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면서 를 깨닫도록 역설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서는 두 가지 비극적 죽음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던 갈릴리인들을 쳐죽인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수로공사를 했던 유대인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억울한 죽음과 재수 없는 죽음의 사건인데 이 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응에서 오늘 우리 상황에서 겪는 죽음의 비극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잡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에서 배우기에 앞서 우리는 당시의 지배세력들이 지녔던 죽음에 대한 해석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참상의 원인은 죄라고 강조했습니다. 죄가 참상을 낳는 원인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이른바 죄인들을 정신적으로 압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인식의 횡포였습니다. 3단 논법에 의한 상징적 폭력이기도 했습니다.
죄인은 참상을 당한다. 갈릴리인은 죄인이다.
고로 갈릴리인은 참상을 당해 마땅하다.
이와 같은 인과응보의 강조는 언제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죄인들〉에게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횡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주요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죄 -> 죽음〉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비극이 차별 없이 찾아옵니다. 가라지와 벼가 함께 자라듯 비가 만인들에게 내리듯, 기쁜 일과 슬픈 일은 차별 없이 만인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죄인들〉에게만 비극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무고한 백성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강요하는 폭력제도와 폭력세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끊어버리는 사랑의 힘임을 주님은 강조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으로 살인범죄를 단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폭력제도에 대한 폭력저항도, 살인행위에 대한 제도폭력도 모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닙니다. 남에게 고통과 참상을 안겨다주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은 마침내 참담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가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셨습니다. 교만, 독선, 탐욕으로 폭력을 구사하는 세력은 궁극적으로 망할 것이나 이것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강화하는 세력도 비극을 맞게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A.D.70년에 예루살렘의 함락을 주님은 미리 내다 보셨습니다.
셋째로, 가해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재수 없이 참상을 겪는 사람들은 그 비극의 한 가운데서 자기성찰(省察), 자기혁신(革新)이라는 회개의 계기를 찾아야 합니다. 비극을 관찰하는 구경꾼도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갱신(更新)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이나 사회가 비극과 참상 속에서 항상 더욱 성숙해지고 향상되며, 역사는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놀라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남의 비극을 보고 비극의 주인공을 죄인으로 몰아붙여 그들에게 이중적 고통을 주는 일은 삼가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정죄를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참상과 죽임을 당한 분은 바로 우리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역설하시고, 위선과 독선을 비판하셨다 해서 극형을 받게되고 제자들로부터도 배신당하셨던 우리 주님이시기에 그 주님만이 억울한 슬픔과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참 위로와 격려를 주실 수 있고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항렬 속에 끼어 계셨고, 이번 소씨 부부의 처참한 죽음 속에서도 실존해 계셨습니다. 소씨 부부나 다른 희생자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가 있어 그러한 참상을 당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 가해자와 함께 제 3자들인 우리들도 모두 회개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만, 독선, 탐욕을 십자가에 달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씨 부부의 죽음은 우리에게 값지게 살고 값지게 죽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케 하는 회개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억울한 죽음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때 그 장소에 없었기 때문에 소씨 부부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고 다행스럽게 여기거나 감사할 것이 아니라, 소씨 부부의 억울한 죽음 속에서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기혁신의 계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소씨 부부는 그들의 죄가 모든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기 때문이 아니다. 너희들도 자기성찰과 자기혁신을 하지 않으면 모두 그러한 참상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폭력시대에 살면서 이 말씀의 뜻을 깊이 되새겨 봅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우리 상황에서는 억울하고, 재수 없는 끔찍한 죽음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존파의 살인행위와 그들에 의해 죽은 억울한 죽음 그리고 온씨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젊은 여성들의 죽음,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합니까? 이와 같은 죽음을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러한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성서상황, 예수님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때의 억울한 죽음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하였나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제국의 폭력에 맞서 당시 폭력으로 대응하려 했던 세력에 대해 폭력저항은 결국 폭력의 악순환을 낳게 됨을 경고하시고 제도폭력이나 저항폭력 시대에 사랑만이 이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다가오는 미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면서 를 깨닫도록 역설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서는 두 가지 비극적 죽음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던 갈릴리인들을 쳐죽인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수로공사를 했던 유대인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억울한 죽음과 재수 없는 죽음의 사건인데 이 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응에서 오늘 우리 상황에서 겪는 죽음의 비극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잡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에서 배우기에 앞서 우리는 당시의 지배세력들이 지녔던 죽음에 대한 해석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참상의 원인은 죄라고 강조했습니다. 죄가 참상을 낳는 원인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이른바 죄인들을 정신적으로 압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인식의 횡포였습니다. 3단 논법에 의한 상징적 폭력이기도 했습니다.
죄인은 참상을 당한다. 갈릴리인은 죄인이다.
고로 갈릴리인은 참상을 당해 마땅하다.
이와 같은 인과응보의 강조는 언제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죄인들〉에게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횡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주요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죄 -> 죽음〉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비극이 차별 없이 찾아옵니다. 가라지와 벼가 함께 자라듯 비가 만인들에게 내리듯, 기쁜 일과 슬픈 일은 차별 없이 만인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죄인들〉에게만 비극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무고한 백성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강요하는 폭력제도와 폭력세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끊어버리는 사랑의 힘임을 주님은 강조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으로 살인범죄를 단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폭력제도에 대한 폭력저항도, 살인행위에 대한 제도폭력도 모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닙니다. 남에게 고통과 참상을 안겨다주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은 마침내 참담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가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셨습니다. 교만, 독선, 탐욕으로 폭력을 구사하는 세력은 궁극적으로 망할 것이나 이것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강화하는 세력도 비극을 맞게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A.D.70년에 예루살렘의 함락을 주님은 미리 내다 보셨습니다.
셋째로, 가해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재수 없이 참상을 겪는 사람들은 그 비극의 한 가운데서 자기성찰(省察), 자기혁신(革新)이라는 회개의 계기를 찾아야 합니다. 비극을 관찰하는 구경꾼도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갱신(更新)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이나 사회가 비극과 참상 속에서 항상 더욱 성숙해지고 향상되며, 역사는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놀라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남의 비극을 보고 비극의 주인공을 죄인으로 몰아붙여 그들에게 이중적 고통을 주는 일은 삼가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정죄를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참상과 죽임을 당한 분은 바로 우리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역설하시고, 위선과 독선을 비판하셨다 해서 극형을 받게되고 제자들로부터도 배신당하셨던 우리 주님이시기에 그 주님만이 억울한 슬픔과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참 위로와 격려를 주실 수 있고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항렬 속에 끼어 계셨고, 이번 소씨 부부의 처참한 죽음 속에서도 실존해 계셨습니다. 소씨 부부나 다른 희생자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가 있어 그러한 참상을 당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 가해자와 함께 제 3자들인 우리들도 모두 회개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만, 독선, 탐욕을 십자가에 달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씨 부부의 죽음은 우리에게 값지게 살고 값지게 죽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케 하는 회개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억울한 죽음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때 그 장소에 없었기 때문에 소씨 부부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고 다행스럽게 여기거나 감사할 것이 아니라, 소씨 부부의 억울한 죽음 속에서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기혁신의 계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소씨 부부는 그들의 죄가 모든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기 때문이 아니다. 너희들도 자기성찰과 자기혁신을 하지 않으면 모두 그러한 참상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폭력시대에 살면서 이 말씀의 뜻을 깊이 되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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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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