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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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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용덕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참을수 없는 사랑
눅10:25-37
우리는 가끔 아주 잘 맞는 짝을 보면서, 그것들이 어우러져 내는 큰 힘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취향이겠습니다만, 저는 G. Rouault의 고통 당하고 슬픔에 잠긴 예수의 초상을 보며, J.S. Bach의 Fuga를 들을 때 가장 경건하고 깊은 종교적 분위기에 빠져듭니다. 어느 절실한 기도보다도 정신적으로 정화(淨化)되는 듯 합니다. 왜 그런지는 분명히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보다는 고통 당하고 슬퍼하시는 모습으로 큰 감동을 주시는 것 같고, 여기에 신비스러운 올간 음악이 들려 올 때 우리의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보다 깊고 절실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의 내용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것이라 그 자체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율법학자가 묻는 똑같은 상황이 마태복음 22:34-40, 마가복음 12:28-34, 누가복음 10:25-28절에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중에서 이것은 가장 기억에 남는 확실한 말씀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율법학자들에게도 이는 가장 큰 문제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여기 영생을 얻는 제일 큰 계명을, 즉 하나를 알려달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둘로 답하여 주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두 가지의 답을 질문자에게서 유도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어 둘째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 분명합니다.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힘의 원천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께서 너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라는 하나님을 곧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웃으로 보고 싶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연결하는 것은 곧 자기자신의 온 정성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저는 구체화된 하나님으로서의 이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의 내용이 이 상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구체적 실천 방향을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들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강도에게 폭행을 당해 피 흘리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다른 길로 가버렸으나, 당시 유대사회에서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제사장은 직책상, 그리고 레위인은 관습상 피 흘리는 사람을 만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도 이대로라면 그냥 지나쳐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피 흘리고 죽어 가는 사람을 놓고 자기들만의 규칙에 따라 손도 못쓰고 지나가 버리는 특수한 규범주의자들의 신앙을 넘어서는 보편적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본 맹자는 누구에게나 '남에게 참을 수 없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다고 하며 그 증거를 다음과 같이 대고 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가 놀다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사람들에게 있어 놀라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어진 마음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분별하는 사람이 스스로 선(善)을 행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이다.
인간다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불인(不忍)이라 하면 분노로 참을 수 없는 마음이나 상태를 떠올리기 쉬우나 맹자에게서 불인은 불쌍한 것을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원적인 선을 들어 하늘의 뜻(종교의 존재 이유)을 찾는 사람들도 예로부터 많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 마음도 맹자가 얘기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과 상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이라 하여 차원이 다른 법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특별한 신앙적 의미를 찾는 것은, 피 흘리고 죽어 가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마리아 사람의 위로(comfort)와 자비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피 흘리고 죽어 가는 그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작은 이웃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로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고아원에 12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답니다. 그 고아원의 원장님은 아이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항상 윗자리 하나를 비워 놓도록 하며, 여기는 예수님 자리로 지정해 놓은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그냥 주님께 감사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바람불고 비가 심히 오는 날 밤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데 문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보니 남루한 옷에 빗속을 헤매다가 지쳐 거의 쓰러져가는 또 다른 고아가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그 아이를 바로 비워놓고 있던 예수님의 자리에 앉게 하였습니다. 12명의 아이들은 그때서야 그 자리가 왜 예수님의 자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상처받고 고통 속에서 피 흘리는 우리의 이웃으로 계신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율법학자에게 가르치시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 또 다른 뜻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보살핀 사마리아 사람의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단지 피 흘리고 죽어 가는 강도 만난 사람이 아니라, 그가 곧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라고 밝혀 주려는 데 있었다고 보입니다. 상처입고 피 흘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우리가 힘이 있어서 같이 도와(com) 힘이 나게 하는(forte) 위로(comfort)를 베푸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혜택을 주는 우월자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서 주님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함께(com) 그들을 향해 가기(mittere) 위하여 우리 자신을 바쳐야(commit) 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섬김의 대상입니다. Rouault가 그린 슬픔에 잠긴 예수는 항상 고통에 빠져 신음하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통 당하는 이웃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일어나 그들을 섬기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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