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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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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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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예수님께서 탁월한 교수법을 활용하시는 위대한 교사임을 우리는 새삼 본문을 통해 깨닫습니다. 메시지 내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르치시는 방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교수법은:
교육자 중심이 아니라 학습자 중심이며,
주입식이 아니라 대화식 교육이며,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입니다. 메시지 내용 못지 않게 예수님의 탁월한 교수법에 주목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단계에 걸쳐 주님의 훌륭한 가르침의 과정과 방법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 단계에서는 율법교사의 도전적 질문에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어느 날 예수님께 중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질문자의 도전적 자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짐짓 거창한 종교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불순한 동기를 모르실 까닭이 없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못된 동기에 신경을 쓰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들 같으면 적대적인 태도를 나무라거나 시비를 걸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는 아주 정중하게 질문자의 질문에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주님의 교사 철학이 나타납니다. 질문자 또는 학습자가 단순한 객체나 피교육자가 아니라, 주체적 해석자로 높여 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대화식 교수법이 단순한 대화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해석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질문자는 모멸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의 인식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입니다. 객관적 사실이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인간이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지요. 성서의 본문도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읽는 자가 일정하게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 원칙을 주님께서는 아시고 질문자의 해석을 물으신 것입니다. 성서의 개성적 해석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기 해석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 대답에 대해 주저 없이 정답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교수법이 더욱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학습자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첫 단계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올바른 해석만으로는 안 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해석 이상의 수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실천의 문제입니다. 진리는 해석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성서 읽기가 갖는 한계를 주님은 보여 주신 것이지요. 헌데 주님의 교수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째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그 탁월함이 나타납니다.
둘째 단계는, 율법교사의 재도전으로 시작합니다. 율법 전문가로서 그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자기가 패배한 것 같으니까, 자기 입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짐짓 더욱 까다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먼저 이 질문의 형태와 그 질문 뒤에 숨어 있는 질문자의 태도에 주목합시다.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정적(靜的)인 질문, 존재 동사(Be 동사)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기를 중심 축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도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보면 그의 파격적 발상법과 함께 그의 탁월한 교수법에 놀라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천재적인 드라마 작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단숨에 3막으로 이뤄진 드라마를 보여 주심으로써, 율법교사의 틀린 질문을 바로 잡아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첫째 막에서 주님은 강도 떼의 못된 짓과 피해자의 아픔을 등장시킵니다. 이웃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얘기를 시작하는 듯 합니다. 율법교사의 얼굴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이웃을 아는 것과 강도 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는 특정상황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고 실천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즉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사람을 두들겨 패고, 사람을 물건처럼 버리는 악독한 집단이 판치는 상황에서 비로소 〈이웃〉 문제와 〈이웃 사랑〉 문제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하태평 상황에서는 이 문제가 절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참된 주체와 모델을 제시하시기 위해, 짐짓 거짓 주체, 가짜 모델을 먼저 보여 주십니다. 면밀한 교수법이지요. 이 점도 놀랍습니다. 제2막의 주인공이 바로 가짜 모델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지요. 율법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시면서 진짜 이웃 사랑 실천자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제3막의 주인공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너무나 상식 밖의 인물입니다. 제2막의 주인공들이 가장 혐오했던 쌍놈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도 파격적인 발상에서 나왔습니다. 율법교사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시는 주님의 교수법 앞에 어리둥절 놀라고 있는 율법교사를 상상해 보십시오. 왜 주님은 깜짝쇼를 하듯이 놀라게 했을까요?
그것은 명확합니다. 사마리아인만이 내 이웃이 누구냐를 묻지 않고, 스스로 이웃되기를 작정하고 이웃되는 행동을 바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be 동사〉가 문제가 아니라 실천 동사가 중요했습니다: 〈보았습니다〉, 〈함께 아파했습니다(compassion)〉, 〈가까이 갔습니다〉.
둘째 단계의 클라이맥스는 당신의 마지막 질문에서 잘 나타납니다. 〈네 의견에는〉라고 물으시면서 끝까지 질문자인 율법교사의 해석을 존중해 주시면서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기서 주님의 이 질문형태와 율법교사의 질문 형태를 비교해 보십시오. 〈나의 이웃〉에서 〈남에게 이웃되는 것〉으로 전환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전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정답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으리만큼, 진리는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습자의 인격과 해석 능력을 존중해 주시면서도 그로 하여금 진리에 스스로 접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탁월한 교수방법입니까? 얼마나 훌륭한 교사이십니까?
영생을 얻는 길이 불한당에 의해 억울하게 피해 받은 이름 없는 민중에게 이웃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임을 설득력 있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요, 이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주님께서는 대화 방법을 통해 학습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위대한 우리 교사 예수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십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교육자 중심이 아니라 학습자 중심이며,
주입식이 아니라 대화식 교육이며,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입니다. 메시지 내용 못지 않게 예수님의 탁월한 교수법에 주목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단계에 걸쳐 주님의 훌륭한 가르침의 과정과 방법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 단계에서는 율법교사의 도전적 질문에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어느 날 예수님께 중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질문자의 도전적 자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짐짓 거창한 종교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불순한 동기를 모르실 까닭이 없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못된 동기에 신경을 쓰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들 같으면 적대적인 태도를 나무라거나 시비를 걸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는 아주 정중하게 질문자의 질문에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주님의 교사 철학이 나타납니다. 질문자 또는 학습자가 단순한 객체나 피교육자가 아니라, 주체적 해석자로 높여 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대화식 교수법이 단순한 대화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해석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질문자는 모멸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의 인식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입니다. 객관적 사실이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인간이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지요. 성서의 본문도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읽는 자가 일정하게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 원칙을 주님께서는 아시고 질문자의 해석을 물으신 것입니다. 성서의 개성적 해석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기 해석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 대답에 대해 주저 없이 정답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교수법이 더욱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학습자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첫 단계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올바른 해석만으로는 안 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해석 이상의 수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실천의 문제입니다. 진리는 해석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성서 읽기가 갖는 한계를 주님은 보여 주신 것이지요. 헌데 주님의 교수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째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그 탁월함이 나타납니다.
둘째 단계는, 율법교사의 재도전으로 시작합니다. 율법 전문가로서 그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자기가 패배한 것 같으니까, 자기 입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짐짓 더욱 까다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먼저 이 질문의 형태와 그 질문 뒤에 숨어 있는 질문자의 태도에 주목합시다.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정적(靜的)인 질문, 존재 동사(Be 동사)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기를 중심 축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도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보면 그의 파격적 발상법과 함께 그의 탁월한 교수법에 놀라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천재적인 드라마 작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단숨에 3막으로 이뤄진 드라마를 보여 주심으로써, 율법교사의 틀린 질문을 바로 잡아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첫째 막에서 주님은 강도 떼의 못된 짓과 피해자의 아픔을 등장시킵니다. 이웃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얘기를 시작하는 듯 합니다. 율법교사의 얼굴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이웃을 아는 것과 강도 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는 특정상황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고 실천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즉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사람을 두들겨 패고, 사람을 물건처럼 버리는 악독한 집단이 판치는 상황에서 비로소 〈이웃〉 문제와 〈이웃 사랑〉 문제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하태평 상황에서는 이 문제가 절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참된 주체와 모델을 제시하시기 위해, 짐짓 거짓 주체, 가짜 모델을 먼저 보여 주십니다. 면밀한 교수법이지요. 이 점도 놀랍습니다. 제2막의 주인공이 바로 가짜 모델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지요. 율법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시면서 진짜 이웃 사랑 실천자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제3막의 주인공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너무나 상식 밖의 인물입니다. 제2막의 주인공들이 가장 혐오했던 쌍놈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도 파격적인 발상에서 나왔습니다. 율법교사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시는 주님의 교수법 앞에 어리둥절 놀라고 있는 율법교사를 상상해 보십시오. 왜 주님은 깜짝쇼를 하듯이 놀라게 했을까요?
그것은 명확합니다. 사마리아인만이 내 이웃이 누구냐를 묻지 않고, 스스로 이웃되기를 작정하고 이웃되는 행동을 바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be 동사〉가 문제가 아니라 실천 동사가 중요했습니다: 〈보았습니다〉, 〈함께 아파했습니다(compassion)〉, 〈가까이 갔습니다〉.
둘째 단계의 클라이맥스는 당신의 마지막 질문에서 잘 나타납니다. 〈네 의견에는〉라고 물으시면서 끝까지 질문자인 율법교사의 해석을 존중해 주시면서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기서 주님의 이 질문형태와 율법교사의 질문 형태를 비교해 보십시오. 〈나의 이웃〉에서 〈남에게 이웃되는 것〉으로 전환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전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정답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으리만큼, 진리는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습자의 인격과 해석 능력을 존중해 주시면서도 그로 하여금 진리에 스스로 접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탁월한 교수방법입니까? 얼마나 훌륭한 교사이십니까?
영생을 얻는 길이 불한당에 의해 억울하게 피해 받은 이름 없는 민중에게 이웃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임을 설득력 있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요, 이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주님께서는 대화 방법을 통해 학습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위대한 우리 교사 예수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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