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누가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2025 추천 수 0 2008.12.23 16:23:04
.........
성경본문 : 눅6:37-38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http://john316.or.kr 
제목: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본문:누가복음 6장 37-38절
설교:이한규 목사

<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

최근에 우리 사랑칼럼 사역 팀이 사역을 하면서 인터넷상에서 저의 사랑칼럼이 익명 혹은 다른 사람이 저자로 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너무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출처 문제와 관련된 글을 써서 한번쯤은 그 문제를 상기시키라!”는 요구들이 있어서 결국 그 글을 써서 저의 홈페이지에 방문해서 원하는 사람만 내부적으로 보도록 게시했습니다.

그런데 메일 발송을 담당한 형제님이 실수로 그 글까지 사랑칼럼을 받는 분들에게 메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날 아침 그 사실을 발견하고 메일을 받는 분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주위에서 아무리 성화를 해도 “차라리 그 글을 쓰지 말 것을...”하고 후회가 되었고, 아내도 “빨리 사과 메일을 다시 발송하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속으로 “이제 메일을 받고 기분 나쁜 사람들이 무더기로 수신 거부를 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 사과 메일을 보내야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발송을 담당하는 형제가 많은 수고를 하는데 그런 실수로 그 형제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것은 잘못이고, 그런 실수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고, 그런 실수를 통해서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실수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집시다.”

그날 무더기 수신 거부 사태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수신 거부를 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격려의 답장을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힘써주세요”, “그렇게 수고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편하게 받기가 송구스럽습니다”, “땀 흘림의 과정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등등의 수많은 격려의 답장을 받고 마음이 한결 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실패와 잘못된 일 앞에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목회자로부터 불편하게 들리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요즘 성도들이 가장 불편하게 듣는 말이 물질적 헌신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헌신 얘기도 기쁘게 들을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도 몇 주 전 수요일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십일조 설교를 했습니다. 돈 얘기는 저도 싫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할 때는 항상 기도합니다. “하나님! 담대히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왜냐하면 혹시 한 사람이라도 그 문제로 시험 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재정부 담당 집사님들이 아니더라도 “목사님이 십일조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헌신은 믿음의 성장 및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들을 때 섣부른 판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공동체나 어떤 말씀이 내가 생각한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다 배척해 버린다면 내 앞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한 환경이 힘든 환경이라도 내 인생에 절대적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가지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

1867년 미국은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달하는 알래스카 땅을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샀습니다. 그때 미 의회는 아무 쓸모없는 땅을 의회 의결도 없이 거액에 샀다고 국무장관 슈워드와 대통령 앤드류 존슨을 소환해 맹공격했습니다. “얼음이 그렇게 필요합니까? 왜 쓸데없이 얼음 땅을 720만 달러씩이나 주면서 샀습니까?”

그때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미 산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의회에서 의결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토론이 길어지고, 방송이 떠들고, 소문이 퍼지고, 그러면 러시아가 팔지 않겠다고 하거나 값을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국무장관과 의논해서 그냥 사버렸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결국 의회가 조사단을 파견해 알래스카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금과 은과 백금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었고, 풍요한 어장과 울창한 산림이 있었고, 무진장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코가 납작해진 미국 의회는 대통령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당신의 사과를 되돌려 드립니다. 알래스카는 얼음 창고가 아니라 보물창고였습니다. 정말 잘 사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안을 가지고 비판을 알 때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더 많이 알려고 하고, 조금 더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음 창고인 줄 알았던 것이 보물 창고가 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단순한 판단으로 무조건 비판하고 배척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비판 중에는 정당한 비판도 있지만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한 비판도 있습니다. 저희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의 창시자인 A B Simpson 목사님이 19세기 말에 선교에 대해 도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헌신하자 당시에 어떤 목사님은 사소한 것까지 꼬투리를 잡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비난의 근본적인 이유는 헌금 때문이었다고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 출신으로 20세기의 최대 복음주의적 영성신학자인 토저(A. W. Tozer) 목사님은 진단했습니다. 우리는 비판 문제에 있어서 감정적 개입을 배제하고 최대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성도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성도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이 구절에서 “비판치 말라!”는 말은 비판 자체를 전면 부정한 말씀이 아니라 “비판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옳게 판단하고 용기 있게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만 하거나 잘 알지 못하면서 섣부르게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비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판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나 비판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비판을 잘 받아들이면 개선의 기회를 얻습니다. 다윗은 비판을 잘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우리야의 아내를 간음한 것을 지적하자 그는 회개했습니다. 반면에 헤롯은 세례 요한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간음한 것을 지적하자 오히려 세례 요한을 잡아 죽였습니다. 비판을 잘 받지 못하면 개선의 기회를 잃습니다.

이라크 후세인이 왜 미국과 전쟁을 불사했습니까? 반대자들을 다 처형해버리니까 아무도 그의 잘못을 지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부하들이 다 전쟁에서 이긴다고 하니까 진짜 이길 줄 알았습니다. 독재자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비판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고 듣기 싫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잠시 망설이며 한 마디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독이 되는 소리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서는 칭찬을 했습니다. 그 장로님 말처럼 칭찬을 잘못 받아들이면 독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비판을 잘 받아들이면 약이 됩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바로 할 수 있는 분별력, 비판을 바로 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비판을 잘 받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처럼 비판은 필요하지만 비판을 잘 할 수 있는 기술과 재치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 비판하면 인간관계에 큰 상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이 비난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비판과 비난은 다릅니다. 바른 비판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비난은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가끔 보면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용기 있고, 정확하고, 빈틈이 없고, 깨끗한 분입니다. 그런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사람 때문에 문제는 더 꼬이고 교회는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은 자기 잘못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른 비판을 했는데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비판은 바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판을 지혜롭게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바른 비판도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해버리면 비판의 효과는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을 잘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머리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감정이 뒤틀리면 이성도 뒤틀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과 장로님이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이 주일 예배 때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 중에 신문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런 감정적인 태도에서는 좋은 결론이 나올 수 없습니다. 비판을 잘 하려면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비판을 잘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잘 감싸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판하는 사람은 상대의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들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판을 할 때 그것이 정당한 비판인지 아니면 감정을 건드리는 비난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이 담긴 비판은 진짜 비판이고 사랑이 없는 정죄는 비난입니다.

사랑도 없이 상대방의 약점만 찾아 비판하는 비판중독자가 되면 안 됩니다. 올바른 비판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나 비판 중독자는 남의 허물을 찾으면 기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비판할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의 장점도 함께 생각하면서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비판이 건전한 비판이 될 수 있습니다.

2.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37절 중반부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사람이 비판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스스로 교만하게 되어서 마치 자신이 죄인을 심판하는 것처럼 남을 정죄하는 잘못까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비판은 잘못을 바로 잡도록 돕는 것이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나는 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치려고 합니까?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본능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그 착각에 사로잡히면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구세주에게 감사한 마음도 없게 됩니다. 그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실 비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비판이 발전되어 나타나는 정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을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의 더 깊은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결국 “격려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비판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비판보다 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격려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비판의 목적이라면 가장 좋은 비판은 바로 격려입니다.

어느 날, 여리고에서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예수님도 자신을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그 말에 삭개오는 순식간에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고, 자기가 잘못을 네 배로 갚아 보상하겠다고 했습니다.

문제를 고치는 것이 비판의 목적입니다. 예수님도 삭개오의 잘못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고 “회개하라!”고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멸시하는 그의 집에서 하루를 머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삭개오는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얼마나 좋은 비판입니까? 가장 좋은 비판은 약점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격려입니다.

3. 힘써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 3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님은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이 원한을 가지고 복수하면 짐승처럼 됩니다. 반면에 용서하기 힘들 때 용서하면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만큼 그 사람도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의 시각으로 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그 사람이 싫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존재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감정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어떻게 용서를 잘할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정직해질수록 자신의 허물이 더 보이게 됩니다. 형제들의 눈에 티가 보일 때 그것을 뽑으려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먼저 우리 눈에 있는 훨씬 큰 들보부터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회개와 용서가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 회개와 용서가 병든 영혼과 병든 세상을 치유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사람 간의 차이를 용납해야 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카펫을 까는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 색으로 붉은 카펫을 깔자고 했고, 다른 분들은 희망의 색인 푸른 카펫을 깔자고 했습니다. 그 일로 싸움이 커져서 교회가 갈라져 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때 붉은색을 주장한 사람들은 갈보리 교회를 세웠고, 푸른색을 주장한 사람들은 늘 푸른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비본질적인 문제라면 넉넉한 마음으로 그 차이를 용납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희생은 반드시 공동체를 살립니다. 몇 년 전에 한 아버지가 보험금을 노리고 아들 손가락을 잘랐다가 구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버지를 인간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도 뒤늦게 깨닫고 감옥에서 아들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판사가 풀어주었고, 집 나간 어머니도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아이의 용서로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용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해결책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잘못이 없고 상대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것은 사람관계에서의 잘잘못일 뿐입니다. 그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는 우리를 더 잘못된 것으로 보시고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것입니다. 상대가 저지른 어떤 잘못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가족들 모임이 있어서 대전에 내려가는데 갑자기 차 뒤에서 첫째 딸 은혜가 큰소리로 짜증을 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첫째 딸 은혜 잘못보다 둘째 딸 한나 잘못이 더 컸습니다. 한나가 짓궂게 장난을 치니까 순진한 은혜가 그것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약이 올라서 큰 소리로 “하지 마!”라고 짜증을 낸 것입니다. 저는 부모 앞에서 큰소리치는 태도를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때 한나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는데 며칠 후에 한나한테 그때 뭐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언니한테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미안해서 옆에서 “하나님! 언니가 아빠한테 야단맞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때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을 통해서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은혜와 한나 사이의 관계에서 잘못은 한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큰소리로 자기의 정당한 주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한나의 잘못보다 한나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부모 앞에서 큰소리친 은혜가 더 잘못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보다 은혜가 더 야단을 맞게 된 것입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생길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보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말로 상처를 주고 복수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가해자의 잘못보다 피해자의 용서하지 않는 잘못을 더 크게 보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가해자보다 용서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더 크게 내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요새 자기가 잘못했다는 소리는 없고 다 “네 탓이다!”라는 소리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심판자는 문밖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가 심판자가 되는 길을 버리고 용서함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최상의 복수입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는 넘치는 감사와 평안과 신기한 축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4. 주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본문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은 ‘주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시고, 예수님은 자신 전체를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는 자를 기뻐하시고, 주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물론 주는 것은 물질만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38절 하반부 말씀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한 것은 쉽게 말하면 “헤아리지 말라!”는 말이고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알아주고 이해해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만 주지 말고 정신적인 것도 많이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섭섭함을 느낍니까? 자기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내가 알아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 인정해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서로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주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실질적으로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우리의 물질을 나누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을 쌓아놓고 이웃과 나누지 않는 것은 형제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선한 일을 위해 자기의 호주머니를 잘 비우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능력도 나타나고, 기도의 능력도 나타나고, 문제 극복의 능력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총회에 갔을 때 중국 농아사역 선교보고를 하며 우리에게 수화찬양을 가르쳐준 이진구 목사님이라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농아 사역을 하고, 중국에 있는 2700만 명의 농아를 위해 세계 최초로 농아를 위한 지하신학교를 세운 분입니다. 나이는 드셨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수하게 사역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지난 12월에 선교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요새 중국 공안의 감시가 심해져서 지하신학교 운영이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농아교회를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허락한 삼자교회로 허가받고, 그 안에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교회 허가를 받으려면 반드시 단독교회 건물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일에 약 10만 불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사연을 적어 내려가면서 이 목사님이 “목사님! 한번만 건축비를 도와주세요!”라고 간절한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달 간 인터넷에 소식을 띄웠는데 반응하는 분이 한분도 없었습니다. 괜히 목사님에게 미안해졌습니다. 우리 교회 선교위원회에서도 지출해야 될 곳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고민하는데 이틀 전에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인터넷에 올린 이진구 목사님 기도제목에 누가 반응이 있었어요?” 제가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내의 질문을 받고 “이제야 한 사람이 반응하는군!”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그런 질문을 할 때에는 꼭 마음속에 어떤 작정을 하고 묻기 때문입니다. 재작년에 아이들 영어학원을 그만두게 하면서 매달 약 35만원씩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것은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려고 항상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흐뭇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영어를 더 못하게 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교인들이 좀더 선교에 분발해야 됩니다. 금년 교회 표어가 “더욱 많이 선교합시다!”입니다. 우리는 자녀 학원 보내는 것이나 다른 어떤 생활의 필요보다 선교를 더 우선순위에 놓고 실질적으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선교후원 이곳 클릭)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교하며 살면 망하고 손해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30장 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책임을 지시고 지켜주시기 위해서 적극 나서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그런데 주실 때에도 그냥 주시지 않고 풍성하게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는 손길은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갚아주심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비판과 정죄를 주의하고, 힘써 용서하고, 힘써 주는 삶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331 요한복음 밀알 하나의 운명 요12:23-26  홍근수 목사  2004-10-13 2766
330 요한복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차옥숭 자매  2004-08-27 3559
329 요한복음 하나님의 긍정 file 요20:19-23  장윤재 박사  2003-10-03 3102
328 요한복음 비움으로 얻는 평화- 여름 수련회 요14:27  황종선 형제  2003-09-07 3063
327 요한복음 민중 연대에 기반한 평화운동 - 여름 수련회 요14:27  황재홍 형제  2003-09-07 2724
326 요한복음 평화, 사회적 모성(母性)의 출산 - 여름 수련회 요14:27  최순님 자매  2003-09-07 2856
325 요한복음 조화(harmony)의 하나님 요14:27  고동호 형제  2003-09-07 3039
324 요한복음 날마다 새 사람 요1:43-5  장기천 목사  2003-09-07 3640
323 요한복음 고정관념을 깨라 요9:1-3  한태완 목사  2007-11-12 3360
322 요한복음 쉴만한 물가로 요7:37-39  한태완 목사  2007-11-08 2789
321 요한복음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요4:23-24  한태완 목사  2007-11-07 3240
320 요한복음 발을 씻기는 자가 됩시다. 요13:1-17  한태완 목사  2007-11-08 2698
319 요한복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 막달라 마리아 요20:1-18  한태완 목사  2007-11-08 2521
318 요한복음 신앙의 4단계 요6:63-71  강종수 목사  2007-07-29 2557
317 요한복음 성령을 받으면 요16:7-15  강종수 목사  2007-07-08 2294
316 요한복음 기독교 믿음의 본질 요20:27-31  강종수 목사  2007-04-15 2544
315 요한복음 기독교의 하나됨 file 요17:14-23  강종수 목사  2007-01-21 2683
314 요한복음 예수교인의 지성 file 요14:26-27  강종수 목사  2006-12-03 1945
313 요한복음 성령으로 살자 file 요14:16-17  강종수 목사  2006-10-01 2326
312 요한복음 예수의 평안으로 승리하라 file 요16:28-33  강종수 목사  2006-09-24 2593
311 누가복음 주인과 품꾼 눅15:11-24  조용기 목사  2009-02-12 1560
310 누가복음 종말의 징조-(3)지진,기근,염병 [1] 눅21:11  강종수 목사  2009-02-08 3673
309 누가복음 작은 예수가 되십시오 눅2:1-7  이한규 목사  2008-12-26 2167
308 누가복음 평화를 얻는 3대 원천 눅2:13-14  이한규 목사  2008-12-26 1843
307 누가복음 용서의 능력과 축복 눅23:32-43  이한규 목사  2008-12-23 2083
306 누가복음 삭개오가 축복받은 이유 눅19:1-10  이한규 목사  2008-12-23 3046
» 누가복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눅6:37-38  이한규 목사  2008-12-23 2025
304 누가복음 내 신앙의 성적표 눅16:1-2  전원준 목사  2008-11-22 2203
303 누가복음 더디 믿는 신앙 눅24:13-27  전원준 목사  2008-11-08 1876
302 누가복음 아빠자궁의 힘 눅6:36  한완상 형제  2008-10-26 1744
301 누가복음 마리아의 노래 눅1:46-56  정용섭 목사  2008-10-19 1711
300 누가복음 오복(五福)과 팔복(八福): 눅6:20-26  서광선 목사  2008-10-05 1867
299 누가복음 주님을 붙들 때 눅5:25-29  김남준 목사  2008-10-01 2036
298 누가복음 기다림 혹은 게으름 눅14:15-24  최창모 교수  2008-09-29 1896
297 누가복음 새 길을 걷는 사람들 눅13:24-27  홍근수 형제  2008-09-29 1487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