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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얻는 3대 원천

누가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1843 추천 수 0 2008.12.26 1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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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13-14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http://john316.or.kr 
제목:평화를 얻는 3대 원천
본문:누가복음 2장 8-14
설교:이한규 목사 20061210

<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

1980년, 은퇴한 한 노부부가 핵전쟁의 위협이 없는 곳에서 노년을 평안하게 보내려고 세계 각국을 연구하면서 가장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연구를 거듭하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정보를 얻은 끝에 마침내 가장 평화롭게 살 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은 아르헨티나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영국령 포클랜드 섬(Falkland Islands)이었습니다.

노부부는 곧 그곳으로 이사하고, 1981년 성탄절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카드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너무 행복합니다. 이곳은 지상낙원입니다.” 노부부는 그곳이 지상낙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상황은 전혀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계속되는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불안을 타개할 목적으로 1978년의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같은 민족주의적 이벤트를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1982년 3월 19일 아르헨티나 민간인의 무단상륙을 둘러싼 분쟁을 빌미로 그해 4월 1일 영국령 포클랜드를 침공했습니다.

그때 아르헨티나 군부는 오판을 했습니다. 당시에 영국도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대서양의 작은 섬과 관련된 영토분쟁에 영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당시 영국 총리가 ‘철의 여인’ 대처라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대처 행정부는 즉시 정면 대응을 선포해서 그 작은 섬에서 2차 대전 이후의 최대의 해상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 74일 만에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종료되었지만 그 동안 지상 최대의 낙원은 지상 최대의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노부부는 여생을 평화롭게 살려고 그곳으로 이사했다가 평화는 얻지 못하고 지옥의 공포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곳에도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주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무력에 의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소외된 지역의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재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야망을 이루려고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대단한 정치력을 가지고 정치를 한 것도 아니었고, 잘 조직되고 세력 있는 추종자들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계신 곳에는 평화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하지만 이 세상에는 절대적 평화가 없습니다. 어떤 환경도 완벽한 평화는 주지 못합니다. 남의 처지를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때는 죽을 지경으로 당하는 자기만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 중에도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 평화를 얻는 3대 원천 >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마음의 평화를 얻는데 꼭 필요한 3가지 원천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겸손(humility)

왜 사람들이 평화를 얻지 못합니까? 자신을 지나치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를 원하면 자신을 믿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무엇을 하려는 시도를 그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We cannot be full of pride and full of the Holy Spirit at the same time).

정저지와(井底之蛙)란 말이 있습니다. 즉 ‘우물 안의 개구리’란 뜻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 위에 있는 하늘만 볼 수 있습니다. 그 개구리는 파랗게 보이는 작은 원이 전 우주인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작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화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고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깨달을 때 주어집니다.

우리는 나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영혼의 동맥 경화증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참 적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할 때 우리의 영혼은 커지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결국 삶의 지경도 넓혀지게 됩니다.

가끔 회의를 할 때 보면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절대적인 문제가 아닌 상대적인 문제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이 좁고 교만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런 높은 마음과 생각을 부단히 깰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깨는 것은 알을 깨는 것과 같은 아픔을 주지만 그 아픔은 성장의 좋은 기회가 됩니다.

어느 날, 노자의 스승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 곁에 가면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데 그렇게 되는 비결이 있습니까?” 그때 노자의 스승이 입의 비유를 들어 말했습니다. “노자야! 입 속의 딱딱한 이빨과 혀가 좁은 곳에서도 조화롭게 지내듯이 너희들도 남을 찌르지 않고 부드럽게 살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진정 평화와 치유를 원하면 항상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때로 어떤 분야의 우물에서 크게 성공했어도 ‘우물의 중심’은 될 수 있어도 ‘우주의 중심’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성공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두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인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면 높은 마음도 필요 없고, 높은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깊은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퍼시 쉘리(Percy Shelley)가 1817년에 쓴 ‘오지만디어스(Ozymandias)’란 시가 있습니다. 오지만디어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반대한 애굽 왕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엄청난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쉘리는 애굽 사막에 남아 있는 오지만디어스의 비문을 참고해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 이름은 왕 중의 왕 오지만디어스다. 너희 능력자들아. 내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오지만디어스는 “내 위업을 보라!”고 했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사막에 널브러져 폐허가 된 거대한 건축물과 모래뿐입니다. 그의 동상에서 몸통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거대한 두 다리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모래에 절반쯤 파묻혀 있는데 찌푸린 표정과 주름잡힌 입술, 그리고 냉소적인 표정은 그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오지만디아스의 위대한 기념비는 지금은 인간의 헛된 교만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참된 평화는 성공과 성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겸손할 때 주어집니다.

2. 믿음(believing)

요새 사람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마치 믿지 않아야 똑똑한 줄 알고 끊임없이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끝없는 회의주의자나 모든 사실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평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얻기 원하면 어느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의문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런 고백이 없다면 삶은 고통과 절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믿겠다고 하면 어떤 것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이해를 초월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평화와 믿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다고 해서 의문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지 않고 의문의 여지도 남겨두십니다. 의문이 전혀 없다면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의문이 있으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문도 남겨두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문은 믿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낳게 하는 것이다(Doubt does not bury faith, it gives birth to faith).”라?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의문이 있고, 풍랑이 있어도 그 안에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풍랑 속에서 고요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제자들이 풍랑으로 무서워하자 주님은 마가복음 4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동화를 잘하고 환경대로 삽니다. 남에 한 대로 나도 합니다. 남이 미워하면 나도 미워합니다. 그런 사람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둘째, ‘환경에 항거하는 비판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반발하며 비판과 반항을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길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라고 하는 것을 지는 것으로 보고 “아니요!”라고 해야 자기 존재가 확인된다고 봅니다. 그처럼 반항으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사람에게는 보람된 내일이 열리지 않습니다.

셋째, ‘환경을 다스리는 초월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일이 못된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과 섭리를 믿고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그처럼 환경을 초월해야 인격자가 되고, 그를 통해 환경이 변화되는 기적적인 역사도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무리 풍랑이 심해도 흔들리지 않고 편하게 잘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소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까지 비행기 타고 가면서 불안해서 한숨도 못 잡니다. 조종사를 믿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배우자와 살면서 배우자를 믿지 못합니다. 얼마나 피곤한 삶입니까? 문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입니다. 결국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최선의 경우를 생각하고, 아무리 풍랑이 심해도 “이 풍랑에는 결국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크고 선하신 뜻이 있다!”고 믿고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능력은 풍랑 속에서 고요함과 평화를 누리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믿지 않는 이웃에게 도전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일전에 라디오에서 짐 엘리엇(Jim Elliot)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이 미국 대학생 선교회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집회 때 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인격적이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1956년 남미 인디안 부족에게 선교하러 가서 얼마 되지 않아 29세의 나이로 순교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호신용 권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젊은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의외로 담담했고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선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멋지게 살려고 했던 남편이 가장 원하던 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이런 말씀으로 설교를 끝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그 설교가 끝나자마자 집회에 참석했던 수많은 청년들이 감격 가운데 울부짖으며 자신도 십자가를 지며 살겠다고 소리치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소리를 듣고 저도 엄청난 감격 가운데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감동시킵니까? 고통 중에서도 노래가 있는 삶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무엇이 능력입니까? 인생의 큰 풍랑 중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삶이 바로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확고히 믿으면 어느 누구도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3. 드림(surrender)

사람들은 보통 ‘얻는 것, 받는 것, 누리는 것’은 좋아하고, ‘잃는 것, 주는 것, 희생하는 것’은 꺼려합니다. 바로 그런 성향 때문에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정말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면 포기를 잘해야 합니다. 평화는 손해를 보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정이나 나라나 세계에 평화가 없는 이유는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어느 날, 인도 북부의 아타르파라테스 지방에 ‘무자파르 나가르’라는 사람이 땅을 파다가 고대 왕국의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금덩이만 500kg을 비롯해서 다이아와 루비 등 수많은 보화들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평화롭던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재물이 생기면 평화가 생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드리려는 삶에 주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드림(surrender)이란 단순히 ‘준다(give)’는 것보다 한 차원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give’는 ‘주는 것’을 통칭할 때 쓰는 말이지만 ‘surrender’는 ‘자신의 마음(mind)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will)까지 드리는 것’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주는 것’도 자신에게 기쁨을 주지만 ‘자신을 드리는 것’은 자신에게 기쁨뿐만 아니라 마음의 깊은 평화까지 줍니다.

요새 명상이 유행합니다. 명상의 대표적인 원리는 ‘자기 비우기’입니다. ‘자기 비우기’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포기’ 및 ‘자기 부인’과 비슷합니다. 물론 ‘자기 포기’도 어느 정도는 마음에 평화를 줍니다. 그러나 영어의 ‘surrender’는 ‘자기 포기’보다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포기’를 지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드리는 ‘자기 드림’까지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이번에 외부적으로 밝히기 싫은 얘기였지만 너무 다급한 기도제목이라 인터넷에 우리 교회의 기도제목을 올렸습니다.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그런 얘기를 누가 공개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문제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동안 인터넷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감동을 공유한 분들에게 기도제목이 있을 때 그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확신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결국 지난 월요일 인터넷에 “그런 당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의 사랑칼럼에 우리 기도제목을 첨부해 올렸습니다. 그러자 몇몇 분이 위로의 메일과 답글과 문자메시지를 주셨고, 어떤 목사님은 위로의 전화를 주셨습니다. 몇몇 분은 헌금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전혀 얼굴도 모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 저는 ‘자기 드림’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분들은 전화와 메일과 헌금을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 ‘자기’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드림’이 저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감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구청에 내야 할 금액의 3분의 1밖에 확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의 마음은 지금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멋지게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모태신앙이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자기를 드리지 않으면 신앙의 깊은 의미와 축복을 모릅니다.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반드시 ‘자기를 드리는 지점’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지 않으면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이 없이 사는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실패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3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주님은 ‘내 멍에’라고 말씀하시고, 그 멍에를 메면 마음에 안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와 십자가가 아무리 무겁게 느껴져도 하나님을 떠날 때 겪는 고통과 좌절과 속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안의 가훈과 아버지가 정한 규칙과 집안에서 해야 할 책임이 자신의 자유를 막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떠나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떠나고 보니까 겉으로는 자유를 얻은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노예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자 세상은 그를 철저히 유린했습니다. 그는 몸도 영혼도 다 빼앗겼고 큰 시련을 당하면서 동물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는 아버지 품 안에 있는 것이 참 자유이고 참 안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에게 달려와 기쁘게 맞이해주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의 삶에는 결코 손해나 불행이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른 축복도 주시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주십니다. 그처럼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주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결국 성령 충만의 제일 비결은 ‘자기를 드림(surrender)’에 있습니다.

< 평화의 기초석이 되십시오 >

우리는 자기를 드리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마음에 속삭입니다. “자기를 드리면 망할 거야. 자기를 드리면 절대 손해야. 그러면 무엇을 얻겠어. 주일성수하면 돈이 나와 밥이 나와? 그러면 더 힘들어져. 어떻게 살려고 해? 세상살이가 쉬운 줄 알아?”

그 사단의 말에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높은 사람에게도 자기를 드리면 그에 따른 보답이 있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면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사랑과 축복 이전에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 또한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도 기쁨과 평화를 주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음악용어 중에 레가토(legato)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즉 초승달 모양으로 높이가 다른 두 음표를 서로 이어주는 표가 바로 레가토입니다. 레가토가 있으면 두 개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사랑의 레가토가 되셨습니다. 그처럼 우리 믿는 성도들도 세상의 나뉜 것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사랑의 레가토들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 목사님이 들려주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강의를 끝낸 후에 미국 유명 병원의 의사인 한 나이지리아 여성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의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목사님이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이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Child who takes the anger away)’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호기심이 생겨 “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여인의 부모는 서로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조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국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몇 년 동안 가족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고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을 안으면서 부모와 조부모 사이에 있었던 분노와 적대감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자신에게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란 이름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맥도널드 목사님은 그 이름이 예수님에게도 아주 적합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분노는 녹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분노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합니까? 이제 분노를 사라지게 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더욱 마음의 중심에 놓고,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어디에 가든지 평화의 기초석을 놓는 복된 심령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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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누가복음 작은 예수가 되십시오 눅2:1-7  이한규 목사  2008-12-26 2167
» 누가복음 평화를 얻는 3대 원천 눅2:13-14  이한규 목사  2008-12-26 1843
307 누가복음 용서의 능력과 축복 눅23:32-43  이한규 목사  2008-12-23 2083
306 누가복음 삭개오가 축복받은 이유 눅19:1-10  이한규 목사  2008-12-23 3046
305 누가복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눅6:37-38  이한규 목사  2008-12-23 2025
304 누가복음 내 신앙의 성적표 눅16:1-2  전원준 목사  2008-11-22 2203
303 누가복음 더디 믿는 신앙 눅24:13-27  전원준 목사  2008-11-08 1876
302 누가복음 아빠자궁의 힘 눅6:36  한완상 형제  2008-10-26 1744
301 누가복음 마리아의 노래 눅1:46-56  정용섭 목사  2008-10-19 1711
300 누가복음 오복(五福)과 팔복(八福): 눅6:20-26  서광선 목사  2008-10-05 1867
299 누가복음 주님을 붙들 때 눅5:25-29  김남준 목사  2008-10-01 2036
298 누가복음 기다림 혹은 게으름 눅14:15-24  최창모 교수  2008-09-29 1896
297 누가복음 새 길을 걷는 사람들 눅13:24-27  홍근수 형제  2008-09-29 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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