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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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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순님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2003.8.24 여름수련회 "평화기원 예배" 말씀증거
"네 가지 주제의 평화 이야기" [요한복음서 14:27]
둘째 이야기, "평화, 사회적 모성(母性)의 출산" - 최순님 자매
긴긴 세월 동안 우리에게 평화란 없었습니다. 오천년 역사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36년의 어두웠던 일제 강점기, 또 6·25의 비극과 4·19, 5·16, 그리고 광주 항쟁...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2003년 봄, 이제 작아졌다는 이 지구촌의 식구들은 후유증이 언제 가실지도 모르는, 그러기 때문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만 했던 전쟁을 그저 망연히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삶터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폭력이 계속되는 이라크 사람들의 삶은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비극의 흔적을 시시때때로 일깨워 주고 있지요. 그런 요즈음 저는 우리에게 평화란 어쩌면 한낮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하고, 평화를 이 척박한 현실에서 이루고자 애썼던 수많은 이들이 흘렸던 피가 허사는 아니었던가 하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느새 자살률이 매우 높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성적에 대한 비관으로, 극심한 가정의 불화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을 마치 전쟁 치르듯 연일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앞질렀다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직접적인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급속한 사회 변동과 가치관의 갈등, 그리고 공동체의 해체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등의 원인에서 비롯되었겠지요. 그러나 더 깊숙이 숨어 있는 원인은 서로에 대한 냉담함과 잔인함은 아닐는지요. 혹자들은 그들의 자살 이유를 어설프게 꿰어 맞춰 봅니다. 그리고는 그 자살을 시도할 용기로 세상을 더 잘 살아 보지 그랬느냐는 충고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약하고 여린 심성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웠던 그들만의 억울함이나 소외된 감정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우리들은 그런 어설픈 충고로 그들을 모독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 높은 자살률이라는 우리 사회의 엄연한 불행의 지표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려니 하고 빨리 무감해지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런데 지나치게 마음이나 쓰는 것은 감상주의자들 아니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걱정거리일까요? 전문가들은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대화를 통해 고통을 함께 할 누군가가 주위에 없다는 것이 자살의 한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의 일상이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이웃의 외로움과 고통을 적당히 아니면 아예 외면해도 괜찮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관계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저 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별도 돌멩이도 원자도 물도 아니다. 그것들의 서로 예속됨, 상호 작용,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가 우주를 구성한다. 그 어떤 세포도 혼자서는 존재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곳이 가정이고. 또 서로 상호 의존하는 아름다움을 배우는 곳 또한 가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천성적으로 독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으로부터의 도피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는 "한 집안의 주인은 부인이다"라고 하셨고 테레사 수녀님은 "어머니는 가정의 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라는 말의 어원도 자식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없이 기쁜 마음과, 자식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을 지켜보며 더없이 쓰려하는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의 평화는 곧 어머니의 내면의 평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 이 모든 말들에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저는 이면에서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평화로운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심장노릇을 잘 못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평화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고 자신을 용서하며 자신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싹이 트는 것이기 때문에, 늘 고르지 않은 심장 박동을 가진 제 자신과 평화를 맺는 과정이야말로 제게는 가장 혹독한 시련처럼 여겨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누군가와의 결속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아이들, 자신과 배우자, 자신과 종교 공동체 사이에 명확한 구분선을 긋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묶어두는 관계를 통해서만 자아를 조절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성의 특성은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퍼주고 떠나가시며 우리가 홀로 남는 외로움이 안타까워서 우리에게 언제나 도우시는 영을 남겨주신 예수님의 본성과 몹시 비슷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폭력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예수님의 관계맺음의 방식과 자신을 바깥세계에 쉽게 확산시키는 특성을 가진 여성의 관계 맺음의 방식은, 평화를 지향하는 공존의 관계에 핵심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되며, 경쟁과 지배의 관계에 핵심을 둔 남성의 관계 맺음방식과는 뚜렷이 구별되어 보입니다. 만약 신성에 도달하는 조건이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한없는 사랑을 퍼주는 자비의 마음이라면, 모성을 지닌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느 정도 신성에 도달할 조건은 갖춘 것 같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소멸되지 않는 폭력과 분열은 세상을 지배와 복종, 정복과 착취의 상하 수직적으로 인식하는 남성적 인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면 그것이 지나친 여성주의적 시각일까요?
우리가 타인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삶을 지향함으로써, 지금까지 세상을 약육강식의 경쟁 터로 왜곡시켜 온 것이 사실이고, 사랑과 친절, 우정 그리고 삶의 의미보다는 생존과 외부적 성공, 효용성과 승리주의를 중시하는 남성적 사회풍조를 만들어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성을 지닌 여성은 언제나 어린이와 노인 또 병자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보살핌의 문화를 일구며 보살핌의 윤리를 실천해 왔습니다. 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이며 심장이라고 규정한 말씀에는, 여성적 사고방식이나 관계 맺음의 방식에 세상조차 바꿀 잠재적인 힘과 아름다운 가치를 있다는 것을 앞서 꿰뚫어 보신 깊은 통찰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기 위해, 나누는 생활을 하는 여성적 관계 맺음의 방식이야말로, 이 지배와 정복이라는 폭력적 사회관계를 나눔과 보살핌의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라고 보여 집니다.
지구 한편에서는 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채로 삶을 지탱하고 있고, 우리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의 위협으로 시달리면서, 귀중한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 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엉킨 실타래처럼 뭉쳐진 우리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풀어내는 길은 무엇일까요? 상처를 달래고 치료하는 엄마의 마음을 품고 그 엄마의 마음을 사회적 모성으로 확산시켜 실천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써 앙갚음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비폭력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에서도 그동안 잉태했던 사회적 모성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한없이 출산시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가지 주제의 평화 이야기" [요한복음서 14:27]
둘째 이야기, "평화, 사회적 모성(母性)의 출산" - 최순님 자매
긴긴 세월 동안 우리에게 평화란 없었습니다. 오천년 역사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36년의 어두웠던 일제 강점기, 또 6·25의 비극과 4·19, 5·16, 그리고 광주 항쟁...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2003년 봄, 이제 작아졌다는 이 지구촌의 식구들은 후유증이 언제 가실지도 모르는, 그러기 때문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만 했던 전쟁을 그저 망연히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삶터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폭력이 계속되는 이라크 사람들의 삶은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비극의 흔적을 시시때때로 일깨워 주고 있지요. 그런 요즈음 저는 우리에게 평화란 어쩌면 한낮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하고, 평화를 이 척박한 현실에서 이루고자 애썼던 수많은 이들이 흘렸던 피가 허사는 아니었던가 하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느새 자살률이 매우 높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성적에 대한 비관으로, 극심한 가정의 불화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을 마치 전쟁 치르듯 연일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앞질렀다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직접적인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급속한 사회 변동과 가치관의 갈등, 그리고 공동체의 해체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등의 원인에서 비롯되었겠지요. 그러나 더 깊숙이 숨어 있는 원인은 서로에 대한 냉담함과 잔인함은 아닐는지요. 혹자들은 그들의 자살 이유를 어설프게 꿰어 맞춰 봅니다. 그리고는 그 자살을 시도할 용기로 세상을 더 잘 살아 보지 그랬느냐는 충고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약하고 여린 심성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웠던 그들만의 억울함이나 소외된 감정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우리들은 그런 어설픈 충고로 그들을 모독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 높은 자살률이라는 우리 사회의 엄연한 불행의 지표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려니 하고 빨리 무감해지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런데 지나치게 마음이나 쓰는 것은 감상주의자들 아니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걱정거리일까요? 전문가들은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대화를 통해 고통을 함께 할 누군가가 주위에 없다는 것이 자살의 한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의 일상이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이웃의 외로움과 고통을 적당히 아니면 아예 외면해도 괜찮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관계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저 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별도 돌멩이도 원자도 물도 아니다. 그것들의 서로 예속됨, 상호 작용,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가 우주를 구성한다. 그 어떤 세포도 혼자서는 존재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곳이 가정이고. 또 서로 상호 의존하는 아름다움을 배우는 곳 또한 가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천성적으로 독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으로부터의 도피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는 "한 집안의 주인은 부인이다"라고 하셨고 테레사 수녀님은 "어머니는 가정의 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라는 말의 어원도 자식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없이 기쁜 마음과, 자식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을 지켜보며 더없이 쓰려하는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의 평화는 곧 어머니의 내면의 평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 이 모든 말들에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저는 이면에서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평화로운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심장노릇을 잘 못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평화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고 자신을 용서하며 자신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싹이 트는 것이기 때문에, 늘 고르지 않은 심장 박동을 가진 제 자신과 평화를 맺는 과정이야말로 제게는 가장 혹독한 시련처럼 여겨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누군가와의 결속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아이들, 자신과 배우자, 자신과 종교 공동체 사이에 명확한 구분선을 긋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묶어두는 관계를 통해서만 자아를 조절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성의 특성은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퍼주고 떠나가시며 우리가 홀로 남는 외로움이 안타까워서 우리에게 언제나 도우시는 영을 남겨주신 예수님의 본성과 몹시 비슷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폭력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예수님의 관계맺음의 방식과 자신을 바깥세계에 쉽게 확산시키는 특성을 가진 여성의 관계 맺음의 방식은, 평화를 지향하는 공존의 관계에 핵심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되며, 경쟁과 지배의 관계에 핵심을 둔 남성의 관계 맺음방식과는 뚜렷이 구별되어 보입니다. 만약 신성에 도달하는 조건이 자기를 철저히 버리고 한없는 사랑을 퍼주는 자비의 마음이라면, 모성을 지닌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느 정도 신성에 도달할 조건은 갖춘 것 같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소멸되지 않는 폭력과 분열은 세상을 지배와 복종, 정복과 착취의 상하 수직적으로 인식하는 남성적 인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면 그것이 지나친 여성주의적 시각일까요?
우리가 타인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삶을 지향함으로써, 지금까지 세상을 약육강식의 경쟁 터로 왜곡시켜 온 것이 사실이고, 사랑과 친절, 우정 그리고 삶의 의미보다는 생존과 외부적 성공, 효용성과 승리주의를 중시하는 남성적 사회풍조를 만들어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성을 지닌 여성은 언제나 어린이와 노인 또 병자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보살핌의 문화를 일구며 보살핌의 윤리를 실천해 왔습니다. 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이며 심장이라고 규정한 말씀에는, 여성적 사고방식이나 관계 맺음의 방식에 세상조차 바꿀 잠재적인 힘과 아름다운 가치를 있다는 것을 앞서 꿰뚫어 보신 깊은 통찰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기 위해, 나누는 생활을 하는 여성적 관계 맺음의 방식이야말로, 이 지배와 정복이라는 폭력적 사회관계를 나눔과 보살핌의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라고 보여 집니다.
지구 한편에서는 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채로 삶을 지탱하고 있고, 우리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의 위협으로 시달리면서, 귀중한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 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엉킨 실타래처럼 뭉쳐진 우리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풀어내는 길은 무엇일까요? 상처를 달래고 치료하는 엄마의 마음을 품고 그 엄마의 마음을 사회적 모성으로 확산시켜 실천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써 앙갚음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비폭력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에서도 그동안 잉태했던 사회적 모성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한없이 출산시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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