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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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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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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차옥숭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한 학생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제 연구실로 찾아왔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 가깝게 모시던 목사님 때문에 실망이 크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교회에 찾아왔는데 직장을 잃고 몸도 아프게 된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5000원만 달라고 구걸하는데, 자기가 모시는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묻고서, 아니라고 하니까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학생의 이야기만 듣고 그 목사님의 속마음을 다 알 수 없기에 “글쎄다.” 하며 다른 이야기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동료 선생님들과 차를 마시면서 그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서 그 목사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양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은 가끔 구걸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젊은 사람일 경우에는 구걸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고, 그러다가 혹시 내가 모르는 딱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복잡해져서 찜찜한 기분으로 돈을 주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아예 잔돈을 바꾸어다 놓고 사무실에서 수없이 찾아오는 걸인들에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정한 간격으로 찾아오는 걸인 한 분이 교회 사무실 직원이 바쁜 일이 있어서 사무실을 비운 사이에 다녀가셨는지, 다음번에 찾아와서 “내가 오는 날이 수요일 오후 시간인 줄 알면서 어떻게 그 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 있느냐”고 야단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연구실에 찾아와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지만 돕지 않으면 안 될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에서, 전철에서 만나는 구걸하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조적인 해결 방안은 없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으로 그러한 부담으로부터 온전히 해방을 받을 수 있게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북한의 비참함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북한 용천 참사에 이곳저곳에서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 일부에서는 북한을 돕는 일은 통일을 방해하는 일이라거나, 북한체제가 무너져야 통일을 앞당길 수 있고 그래야 북한동포들이 근본적인 어려움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한편을 생각합니다.
장자가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습니다. 이에 감하후는 말하기를 “좋네, 내가 장차 내 봉읍으로부터 사금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으면 3백금쯤 꾸어주어도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장자는 화를 내며 안색을 고치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이리로 올 때에 도중에서 누가 부르는 자가 있어 돌아다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 속에 한 마리의 붕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놈을 보고 묻기를 ‘붕어야, 너는 왜 그러니’ 하자 그 붕어는 말하기를, ‘저는 동해의 파신(波臣)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저를 살릴 수 없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좋다. 나는 바야흐로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 땅으로 가는데, 거기서 서강(西江)의 물을 터 놓아 너를 맞아가게 해주마. 그래도 좋겠는가’라고 하자, 그 붕어는 화를 내고 안색을 고치며 말하기를, ‘저는 지금 제게 있어야 할 물을 잃어, 저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저는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으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찌감치 재빨리 건어물 가게로 가셔서 저를 찾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처럼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지 옳지 않은지, 이 행동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것인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밤새워 고기를 낚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미리 준비해두시고 조반을 먹게 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렇게 묻고 답하기를 세 번씩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던 날 새벽에 세 번씩 스승을 부인하였습니다. 연약한 여종 앞에서 형편없이 무너져버린 그는 스승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철저한 자기 좌절과 통한에 사로잡혀 통곡을 하고 웁니다.
고기잡고 있던 베드로 요한 등 일곱 제자를 찾아오신 예수는 베드로에게 어떤 잘못도 추궁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네 이웃을, 버림받고 고통 속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먹이고 돌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신비주의자였던 이용도 목사는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행하면서 사랑을 행하고 있다는 의식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폐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함도 아니요, 모든 슬픈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함도 아니요, 또한 나를 천당에 보내 주시겠는고로 예수를 사랑함도 아니라 아무 조건도 없이 그저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어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찍이 가르치시기를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은 곧 나에게 행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려면 형제를 사랑하고 그들을 섬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라.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사랑하라 내가 선을 행한다 의를 행한다 하는 계획조차 없이 사랑하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사랑하라. 이런 형제의 사랑이야말로 참 봉사(奉仕) 하늘의 사랑일지니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이 하늘의 사랑을 실행하여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피터스 목사가 증언하는 이용도목사의 이야기를 한 토막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이전에 가졌던 가장 행복했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어느 날 그는 거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성찬을 나누는 것과 같았다. 거지들이 가끔 문전으로 와서 찬밥 한 덩어리를 받아 가곤 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쳐다보시며 문밖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면, 내가 네게로 와서 너와 내가 같이 식사를 할 것이다.’ 그때 그는 쌀 한줌을 주면서 주님을 문 밖으로 내보냈다. 시무언은 아내에게 이제 다음 거지가 찾아오면 안으로 맞아들여 정성껏 대접하여 천사를 대접하는 것처럼 하자고 말했다. 어느 날 식사가 조그만 상에 차려진 순간 시무언은 한 거지가 살며시 떠밀려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달려 나가 그를 안으로 데려왔다. 그 거지는 어리둥절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거지는 곧 안심하고 미안해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시무언은 그 거지 앞에 자신의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놓았다. 그 사람은 어쩔 줄 몰랐다. 보통 10집을 방문하면 한 집 정도가 거지에게 적선하였기 때문이다. 시무언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환희를 그때 느꼈다고 말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어느 스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꽃은 물 속의 오염 물질을 빨아들여 그것을 양분으로 삼고 물을 정화시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동물들까지 그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게 해주시오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 자비입니다. 티벳 언어는 말 자체가 대승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받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원했던 스님이 병에 걸리면 걸렸다고 하지 않고 병 받았다고 합니다. 살아서도 안락, 죽어서는 천당, 이것은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사랑이나 자비심은 다른 사람과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직접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심이 깊어지면 지옥의 중생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느껴져 혼자 극락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이 다 비기 전에는 극락에 가지 않겠다고 서원을 했던 지장은 부처의 원력이 인격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죽어 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아 주고 편안함과 안식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그것이 죽어서도 이어집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테레사 수녀님은 천당이 아니고 지옥에 계신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이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어서도 지옥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선행이라는 것이 결국 이기심의 발로로 멈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의 하느님이신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고통당하는 네 형제의 고통을 느끼고 나누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서울 강남구 대치동 889-5 샹제리제센터 A동 808호(135-280)
전화: 555-6959 e-mail: tosaegil@empal.com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교회에 찾아왔는데 직장을 잃고 몸도 아프게 된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5000원만 달라고 구걸하는데, 자기가 모시는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묻고서, 아니라고 하니까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학생의 이야기만 듣고 그 목사님의 속마음을 다 알 수 없기에 “글쎄다.” 하며 다른 이야기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동료 선생님들과 차를 마시면서 그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서 그 목사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양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은 가끔 구걸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젊은 사람일 경우에는 구걸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고, 그러다가 혹시 내가 모르는 딱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복잡해져서 찜찜한 기분으로 돈을 주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아예 잔돈을 바꾸어다 놓고 사무실에서 수없이 찾아오는 걸인들에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정한 간격으로 찾아오는 걸인 한 분이 교회 사무실 직원이 바쁜 일이 있어서 사무실을 비운 사이에 다녀가셨는지, 다음번에 찾아와서 “내가 오는 날이 수요일 오후 시간인 줄 알면서 어떻게 그 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 있느냐”고 야단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연구실에 찾아와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지만 돕지 않으면 안 될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에서, 전철에서 만나는 구걸하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조적인 해결 방안은 없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으로 그러한 부담으로부터 온전히 해방을 받을 수 있게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북한의 비참함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북한 용천 참사에 이곳저곳에서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 일부에서는 북한을 돕는 일은 통일을 방해하는 일이라거나, 북한체제가 무너져야 통일을 앞당길 수 있고 그래야 북한동포들이 근본적인 어려움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한편을 생각합니다.
장자가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습니다. 이에 감하후는 말하기를 “좋네, 내가 장차 내 봉읍으로부터 사금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으면 3백금쯤 꾸어주어도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장자는 화를 내며 안색을 고치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이리로 올 때에 도중에서 누가 부르는 자가 있어 돌아다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 속에 한 마리의 붕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놈을 보고 묻기를 ‘붕어야, 너는 왜 그러니’ 하자 그 붕어는 말하기를, ‘저는 동해의 파신(波臣)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저를 살릴 수 없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좋다. 나는 바야흐로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 땅으로 가는데, 거기서 서강(西江)의 물을 터 놓아 너를 맞아가게 해주마. 그래도 좋겠는가’라고 하자, 그 붕어는 화를 내고 안색을 고치며 말하기를, ‘저는 지금 제게 있어야 할 물을 잃어, 저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저는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으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찌감치 재빨리 건어물 가게로 가셔서 저를 찾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처럼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지 옳지 않은지, 이 행동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것인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밤새워 고기를 낚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미리 준비해두시고 조반을 먹게 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렇게 묻고 답하기를 세 번씩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던 날 새벽에 세 번씩 스승을 부인하였습니다. 연약한 여종 앞에서 형편없이 무너져버린 그는 스승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철저한 자기 좌절과 통한에 사로잡혀 통곡을 하고 웁니다.
고기잡고 있던 베드로 요한 등 일곱 제자를 찾아오신 예수는 베드로에게 어떤 잘못도 추궁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네 이웃을, 버림받고 고통 속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먹이고 돌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신비주의자였던 이용도 목사는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행하면서 사랑을 행하고 있다는 의식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폐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함도 아니요, 모든 슬픈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함도 아니요, 또한 나를 천당에 보내 주시겠는고로 예수를 사랑함도 아니라 아무 조건도 없이 그저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어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찍이 가르치시기를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은 곧 나에게 행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려면 형제를 사랑하고 그들을 섬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라.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사랑하라 내가 선을 행한다 의를 행한다 하는 계획조차 없이 사랑하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사랑하라. 이런 형제의 사랑이야말로 참 봉사(奉仕) 하늘의 사랑일지니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이 하늘의 사랑을 실행하여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피터스 목사가 증언하는 이용도목사의 이야기를 한 토막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이전에 가졌던 가장 행복했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어느 날 그는 거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성찬을 나누는 것과 같았다. 거지들이 가끔 문전으로 와서 찬밥 한 덩어리를 받아 가곤 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쳐다보시며 문밖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면, 내가 네게로 와서 너와 내가 같이 식사를 할 것이다.’ 그때 그는 쌀 한줌을 주면서 주님을 문 밖으로 내보냈다. 시무언은 아내에게 이제 다음 거지가 찾아오면 안으로 맞아들여 정성껏 대접하여 천사를 대접하는 것처럼 하자고 말했다. 어느 날 식사가 조그만 상에 차려진 순간 시무언은 한 거지가 살며시 떠밀려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달려 나가 그를 안으로 데려왔다. 그 거지는 어리둥절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거지는 곧 안심하고 미안해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시무언은 그 거지 앞에 자신의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놓았다. 그 사람은 어쩔 줄 몰랐다. 보통 10집을 방문하면 한 집 정도가 거지에게 적선하였기 때문이다. 시무언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환희를 그때 느꼈다고 말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어느 스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꽃은 물 속의 오염 물질을 빨아들여 그것을 양분으로 삼고 물을 정화시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동물들까지 그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게 해주시오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 자비입니다. 티벳 언어는 말 자체가 대승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받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원했던 스님이 병에 걸리면 걸렸다고 하지 않고 병 받았다고 합니다. 살아서도 안락, 죽어서는 천당, 이것은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사랑이나 자비심은 다른 사람과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직접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심이 깊어지면 지옥의 중생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느껴져 혼자 극락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이 다 비기 전에는 극락에 가지 않겠다고 서원을 했던 지장은 부처의 원력이 인격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죽어 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아 주고 편안함과 안식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그것이 죽어서도 이어집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테레사 수녀님은 천당이 아니고 지옥에 계신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이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어서도 지옥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선행이라는 것이 결국 이기심의 발로로 멈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의 하느님이신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고통당하는 네 형제의 고통을 느끼고 나누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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