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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강남순............... 조회 수 2403 추천 수 0 2008.05.19 15: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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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3:3-15 
설교자 : 강남순 교수 
참고 : 새길교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 희망적 삶의 패러다임 -
불확실성의 시대

많은 사람들이 현대를 '포스트(post)-시대'라고 규정을 합니다. '탈'이나 '후기'등으로 번역되는 이 '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포스트 모던 시대' '후기산업주의 시대,' '탈 이데올로기 시대' '포스트 크리스천 시대' 등으로 현대사회가 지닌 특성들을 표현합니다. 왜 이러한 다양한 이름의 '포스트'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각기 다른 내용을 지칭하면서도 이들이 갖는 공통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모호성'과 '불확실성'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스트-시대'란 고유의 독자적이고 분명한 특성을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명명하는 것과의 단절과 연속, 부정과 긍정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단절과 연속, 부정과 긍정의 특성 때문에 '포스트∼'로 규정되는 이 시대는 '역설적 시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종교는 이전에 누렸던 절대적 권위를 상실하고,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던 위치를 다른 것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현대인의 구체적인 삶의 물음에 민감하게 관심하지 않던 종교가 이렇게 삶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자업자득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틸리히는 현대의 신학은 사람들이 가지는 실존적 물음에 '대답하는 신학'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저는 설교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종교가 주변화된 시대에, 확실한 무엇인가를 선포해야 하는 '설교'란 이런 의미에서 가장 어렵고 고민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 믿고 천당'이라는 구호에 따라서 크리스천이기를 선택한 이들은 어쩌면 행복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대체 현대사회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현대사회에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확실성을 선포하는 설교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설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현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절망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IMF라는 경제적 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대인간의 정신세계나 생태계 등 다양한 삶의 차원이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주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암담함과 절망스러움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절망에 대한 강한 느낌 때문에 저는 오늘 '희망'에 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칸트는 그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중의 하나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입니다. 저는 그 물음에서 '나'를 '우리'라고 바꾸어서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계몽주의사상을 신봉하는 칸트에게서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개체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식의 출발점이 되지만, 이제 인간의 개체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동시에 인간의 상호연관성과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완성이 된다는 생각이 현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으며 저도 그것에 동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집단적, 사회적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가를 압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라는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생각해 볼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우리의 희망의 원리로 삼아야 할까요? 아니, 어떠한 삶 속에서 우리의 희망을 볼 수 있을까요? 조셉 켐벨(Joseph Campbell)은 그의 책,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찾고 있는 것은 정형화된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그로 인해 희망을 가지게 하는 삶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것,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 이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허무와 공허를 넘어서게 하는 작은 감동들, 작은 푸근함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작은 감동과 푸근함들이 모여서 이 삶의 공허와 허무를 넘어서는 강한 희망의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감동 없이 이렇게 매일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혹 섬뜩한 생각이 들어. . ." 저는 이 편지를 읽고서 현대인들의 절망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감동을 상실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였을 때는 한 공기의 쌀밥과 한 그릇의 고기 국에서도 사람들은 감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지금 우리는 그러한 생존적인 감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이상하게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언제나 그 다음의 욕구를 가지게 됩니다. 끊임없이 불만만 하는 존재라는 거지요. 그래서 사실상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네크로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의 인간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저는 오늘 에리히 프롬이 그의 책, {희망이냐 절망이냐}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죽은 것에 대한 사랑'(necrophilia)과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biophilia)을 지닌 존재라는 설명을 하고 싶습니다. 인간 속에는 다양한 품성들이 선천적으로 또는 문화-사회적으로 형성이 되는데, 크게 보자면 두 가지 즉 '부패한 것, 죽은 것, 파괴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과,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nekros'는 그리스어로 시체, 죽은 자, 지하세계의 주민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는 그러한 죽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며, 바이오필리아(biophilia)는 그 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이 점점 죽은 것을 사랑하는 '네크로필러스'(necrophilous)한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가장 명백한 특징이 되어 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산업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기계적이며 생명이 없는 인공물에 점차 마음이 더 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것의 예로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보다 자동차를 더욱 아끼는 것이라든지, 사물을 보는 것(seeing)보다는 사진 찍어서 주시(looking)하기를 더 선호하는 예를 들었습니다. 저는 지난 여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이 운전하는 택시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관광가이드를 많이 하는 그 분의 말에 따르면, 한국사람들은 열두 시간 자동차를 타고 그랜드캐년에 도착해서는 두어 시간 동안만 머물면서 몇 군데 사진만 부산하게 찍곤, 그 다음 유명한 관광지로 가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엄청난 신비를 담고 있는 거대한 그랜드캐년을 정말로 보고(seeing) 느끼는 것보다는 사진 찍어서 이곳에 갔다왔다는 증거물을 만드는 것, 즉 '물체화' 시키는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다는 겁니다. 또한 생명보다는 기계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하게 되는 것의 예는 아마 컴퓨터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에 이르러서 수많은 사람들이 -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어른까지 - 컴퓨터 매니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기계적인 것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보다 앞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예들의 자체가 네크로필러스한 경향의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종류의 행동들이 생명에 대한 관심이나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삶을 풍요하게 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대체하는 것이 될 때에 그것은 네크로필러스한 성질을 띠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살아있는 구조를 분리시키고 해체시키는 '죽음에의 본능'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저는 프로이드처럼 이것을 생물학적인 본능이라고 간주하기보다는 이러한 성향을 확장시키는 문화 - 사회적 상황에 보다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네크로필러스한 성향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예들은,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힘과 폭력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시몽느 베이유(Simone Weil)는 이것을 '인간을 시체로 변모시키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즉 힘과 폭력이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결책은 파괴일 뿐, 결코 공감적인 노력이나 모범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네크로필러스한 성질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존재적 상황과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아무 것도 창출할 수 없고, 아무런 변화를 만들 수 없고, 고립의 상황에서 헤어 나오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누군가와 진정한 대화나 교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그 사람은 네크로필러스한 성향을 확장시키게 됩니다. 치명적인 무능력과 허무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창조할 수 없는 생명을 오히려 파괴하는 행위로서 자기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화초나 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을 꺾어 버리는 것에 더욱 쾌감을 느낍니다. 네크로필러스한 사람의 특징은 사람을 때린다든지 죽인다든지 등의 강력한 파괴적 양태를 띠기도 하지만 영어로 'wet-blanket'이라고 표현되는 은근한 양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불이 났을 때 그 불을 끄기 위해 사용되는 '젖은 담요'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기를 주지 않고 오히려 그 생기를 빼앗는 사람, 기쁨을 빼앗는 사람, 사람들의 활기를 죽이는 사람, 흥을 깨는 사람들은 네크로필러스한 사람의 성향을 다분히 지닌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사람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데,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듣는 이들을 생기 있게 만들고, 새로운 삶의 자극을 주고, 뭔가 푸근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반대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는 용어로 말하자면, '바이오필러스한 사람'과 '네크로필러스한 사람'의 차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즐겨하는 컴퓨터 게임들이나 만화들이 사실상 이러한 네크로필리아의 문화를 자극하고 강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목을 치고,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점수를 올리게 되는 이러한 게임들은 어른들의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네크로필리아의 문화'입니다. 이러한 것에 빠져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어떻게 작은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네크로필러스한 것에 필요한 것은 강한 팔이나 무기, 또는 파괴적인 언어와 폭력의 행사만 있으면 됩니다. 생명을 창출하는 것, 생기를 불어넣는 것보다는 파괴하고 생기를 죽이는 것은 훨씬 간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택합니다. 네크로필리아를 넘어서는 '살아있는 것에의 사랑'인 바이오필러스(biophilous)한 성향은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네크로필리아를 넘어서서 바이오필리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삶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적 삶 - 바이오필리아의 삶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를 살아있음의 감동을 주는 삶의 양식, 희망적 삶의 패러다임이 무엇인가를 보게 합니다. 네크로필리아를 넘어서는 바이오필리아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의 답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본문은 네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성만찬을 베푼 것이 그 중심이 되어 있는 반면,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성만찬 예식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가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기독교전통의 예식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발을 씻긴 행위가 주는 의미는 잊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던 예수는,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과의 마지막 자리에서 참으로 기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의 공생애를 매듭짓는 거창한 설교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지저분한 발을 씻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도대체 자신들보다 높은 위치에 계신 선생님께서 자신들을 씻기다니요. 그것도 가장 지저분한 발을 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참으로 중요한 기독교의 원리들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힘'이나 '지도력'은 다른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능력과 결부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란 그러한 '통제하는 힘'이나 '지배하는 힘'을 강하게 지닌 사람을 의미하곤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 보니까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사건을 앞에 두고 있는데도 자기들 중에 '누가 더 큰가?' 하는 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제자들도 힘이나 지도력을 외형적인 지배적 힘의 소유로 보는 전형적인 생각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지도력이나 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제시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그러한 지배하는 것이 아닌 '치유하는 힘'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부어주는 능력'으로서의 지도력이며,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바이오필리아의 삶이란 결국 주변의 다양한 깨어짐을 바로잡고 고치고자 하는 '치유하는 힘'이며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것의 사랑'인 바이오필러스한 삶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네크로필러스한 것들이 치유되며, 파괴적인 관계가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3절에서 15절에 보니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의 위대한 설교였으며 예배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희망적 삶의 패러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은 어떠한 모습이며, 크리스천이란 어떠한 삶의 패러다임을 지녀야 하는 가에 대한 요청성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유언처럼 남긴 것은 바로 선생이며, 주라고 간주되는 예수자신이 일반적인 통념이나 인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위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삶의 모형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과 봉사'라는 상투적인 결론을 유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결론은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오용되어 왔습니다. 예수의 두 모습, 즉 '종으로서의 예수'와 '주님(Lord)으로서의 예수'의 두 모습에서 '종으로서의 모습'은 여성들에게 희생과 봉사라는 미덕의 이름으로 강요되어 왔으며, '주님으로서의 모습'은 남성들이 교회 안에서 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지도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교회전통은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가 보이고자 하는 올바른 삶을 사실상 왜곡시켜 온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관습적으로 강요된 희생과 봉사란 사실상 예수가 보여주려는 자의적인 희생과 봉사의 의미를 왜곡시킵니다. 또한 그 봉사의 대상이 이미 기득권과 특권을 누린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기 위한 봉사라는 의미를 완전히 곡해시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서 그들의 힘과 지도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전적으로 바꾸어 놓고 계십니다. 그들이 관심해야 할 일이 누가 높으냐의 다툼이 아니라 사실상 냄새나는 발을 씻기는 일이며, 상처받은 곳을 어루만지는 일이며, 깨어진 관계의 선들을 잇는 일, 즉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바이오필리아는 거창한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구체적인 일들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이를 통해서 새롭게 이해되는 지도력이나 힘이란 더 이상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양한 관계의 '깨어짐'을 치유하는 힘이며 새로운 희망적 삶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힘, 즉 바이오필러스한 힘(biophilous power)입니다. 발을 씻기는 행위를 사실적으로 이해하든지 또는 상징적으로 이해하든지 간에 이 이야기는 예수가 보여준 삶의 방향과 일관된 무엇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인간을 구속했다'는 단순히 영웅적으로 이해된 예수는 사실상 왜 우리가 그를 따르고자 하는가의 의미를 모두 보여주지 못합니다. 예수의 삶이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basileia)와 연관되어 이해되는 분이었고, 그 공동체에서 예수의 역할은 다양한 깨어짐을 치유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깨어짐의 치유와 나눔은 단지 영적이고 정신적인 추상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때로는 문화-사회적인 배제와 차별의 경험으로, 그리고 때로는 실존적 절망감으로 상처받고 깨어진 사람들을 치유하고 어루만지는 아주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살아있음의 감동을 주는 희망적 삶의 패러다임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속한 다양한 곳에서 깨어진 것을 치유하는 데에 작은 몫을 하고자 노력하는 삶 - 이것이 바로 예수가 그의 생애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며, 우리에게 따르라고 한 삶의 모형이며, 바로 희망적 삶의 패러다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고독합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상투적인 용어가 아니라도 파괴적이며 기계적인 문화 - 즉 네크로필리아의 문화는 날이 갈수록 왕성해지고 있지만 작은 감동을 주는 일들, 관계의 깨어짐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일들, 그래서 살아있음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푸근함들이 상실되어 가고 있어서 우리는 고독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나의 절망감, 내가 지닌 상처들을 아무도 관심하지 않고, 나 또한 다른 이들의 아픔에 눈 돌리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또한 나와 무수한 끈으로 연결된 이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파괴적이고 죽은 것을 사랑하는 네크로필러스한 삶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는 바이오필러스한 삶의 패러다임을 확장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패러다임을 실천하고자 애쓸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깨어짐을 치유하기 위한 인내와 아픔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강한 희망을 가지고 이 한 주간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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