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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우리 사이

요한복음 권진관............... 조회 수 1660 추천 수 0 2008.05.29 08: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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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5:12-15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오늘 저는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와 우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가까운가? 예수가 2,000년 전에 계셨던 분이고, 우리가 한 번도 가서 살아본 적이 없는 팔레스타인에 사셨던 분이므로 우리와 멀다면 아주 먼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효험이 있는 분은 2,000년 전에 실제로 활동했던 그 분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 어떤 것도 그 분과 비교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2,000년 전의 예수는 하나님과 꼭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2,000년 전의 예수만이 효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첫째로는 자유주의자의 입장으로, 이들은 2,000년 전의 역사적 예수는 다른 모든 것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진정한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그 모든 기준이 되는 진리인 예수를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았던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모든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알고자 했습니다. 2,000년 전의 예수는 과연 어떤 분이었는가에 모든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역사적으로 살았던 그 역사적 예수를 낱낱이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특히 공관복음서들이나 요한복음서는 모두 신앙고백적으로 쓰여져 있지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역사적 예수가 기준이 되므로 그 기준을 마련하는 일에 너무 과도하게 전념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2,000년 후인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지금도 활동하시고, 함께 하시는, 신앙의 눈으로만 식별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2,000년 전에 생존했던 그 분만이 우리들의 구원자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만' 이라는 구호를 내세웁니다. 이것은 보수적인 입장인데, 오직 예수만을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이 방금 말씀드린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가 우리를 직접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보는데 비해서 이 두 번째의 입장은 그렇게 기준이 될 뿐 아니라 2,000년 전의 그분은 시대를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그를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을 얻는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우리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2,000년 전에 오신 그 분이 하신 단 한번의 공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습니다. 그 2,000년 전의 보혈의 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2,000년 전에 흘린 피는 그 능력을 믿기만 하면 지금 우리에게 신비로운 효과가 있으므로 그것에 의존하면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보수주의 혹은 정통주의의 입장에 해당됩니다.
이 두 가지의 입장의 공통점은 지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입장은 '오직 예수만'의 입장입니다. 여기에는 2,000년 전의 예수만이 유효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2,000년이라고 하는 시간적 거리가 있는 그 분이 지금 우리에게 혹은 표준으로 혹은 유일한 구원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공통된 의견은 '지금, 여기, 또 현재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구원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아주 멀게 합니다.

이제 세 번째의 입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의 입장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그 예수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완전히 신앙고백적이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분은 결국 부활하신 분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의 삶 속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참여하시고, 우리들과 함께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역사를 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지금, 여기, 이 시간에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활동을 성화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종교적인 중요성과 의미가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이 역사를 성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부활하셔서 2,000년 전이라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적, 시간적 거리를 건너뛰어 우리와 함께 지금 여기를 성화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예수 사이의 거리는 전연 없어지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성령을 매개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은 우리들과 거리가 전연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되 나 자신보다도 더 가까운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와 우리들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좋은 상징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친구라는 말이 가장 적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와 나 사이는 친구 사이입니다. 친구란 서로 가까이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친구는 서로를 생각해 줍니다. 서로 생각을 해 주지만 또 서로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나의 부모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부담이 있고, 책임과 의무가 담겨 있습니다. 또 예수를 나의 애인이라고 한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부담이 있고 의무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친구라 하면, 의무의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부담 없이 기쁘게 지내는 사이가 됩니다.
친구는 서로 간에 대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선생과 제자의 관계, 또는 애인과의 관계와는 다릅니다. 예수는 우리를 친구로 불렀습니다. 형제간에도 차별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맏아들에게 모든 특혜를 주고, 또 딸에게보다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줍니다. 그러나 친구 사이는 대등한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서로 협조하고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하신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친구가 없는 시대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비인간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이고 또한 욕망적인 시대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시대에는 분명 친구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비인격적인 관계만 존재할 뿐입니다. 상대방을 경계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신뢰와 우정보다는 처세술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로 음해하고,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정글과 같은 세상,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최후까지 남아 있는 믿을 수 있는 관계는 가족관계, 그것도 핵가족관계로 축소된 것입니다. 다른 관계는 모두 비인간적인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습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IMF 관리 체제에서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네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내가 나가게 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끈끈한 친구의 정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은 있지만, 서로 살리는 친구의 관계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친구로서 오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는 말씀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와 우리는 가까운 관계일 뿐 아니라 우리와 대등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친구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러한 입장은 제가 먼저 말씀드린 입장들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대등한 입장에서 구원의 문제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관점은 2,000년 전의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친구가 되신 부활하신 그 예수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우리를 종속적인 종으로 두시지 않고, 우리를 자신의 귀중한 동반자, 친구로 보시겠다고 결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예수를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우리 곁에 오시는 친구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고민들을 이 친구인 예수에게 쏟아 놓습니다. 그러면 이 친구인 예수는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마치 친구가 우리들에게 조언해 주듯이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홀로 어디에 있든지 예수는 가장 외딴 곳에 있는 나에게 찾아오시는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옥에 갇혀있거나 군대에 갔거나, 멀리 여행을 떠나 있을 때도 예수는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와 대화를 해 주시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 본문의 중요한 전환점이 존재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친구가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예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될 때 우리를 친구로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친구가 되는 데는 조건이 걸려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남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 계명의 말씀을 지키면 예수는 우리들을 더 이상 종으로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부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할 수 있으므로 성숙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종으로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의 친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IMF 관리 체제 이후 수많은 기업이 도산할 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사람들의 가정은 파괴되어 가고 있고, 그런 가정의 자녀들은 더욱 방황하고 희망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친구가 되라고 부름을 받은 우리 공동체의 역할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일정한 특징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타의 공동체들이나 모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친구 예수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경쟁자가 되는 이 시대에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예수 공동체의 특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 봉사부가 열심히 가동된다는 면에서 자랑스러운 교회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온 선교 봉사의 일에 만족하지만 말고 이 어려운 시대에 보다 과감하게 선교 봉사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IMF 관리 체제하의 실직 사태 속에서도 금융자산 소유자들만은 많은 이자 소득을 얻고 있습니다. 고금리 정책은 외국 자본들 특히 투기성 금융자본을 들여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전체 구성원의 고혈을 빨아 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 고금리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러를 끌어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정책이라고 하지만 교회가 여기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이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고율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예금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 나온 이자 중에서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돈은 물가 상승 분으로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려운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을 실직자 가정을 위해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화폐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구조는 바로 맘몬이 지배하도록 만드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오늘날의 모든 불행의 뿌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를 이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이자를 안 받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교회는 지금의 고금리 이자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레위기 25장 35절 이하에서는 이자를 본전을 넘어서 '더 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자를 말하는 히브리어는 neschek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살아 있는 몸에서 입으로 살을 물어뜯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높은 이자를 받는다는 것을 재고해야 할 것이며, 그 높은 이자를 받은 것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가장 어려운 사람들, 특히 실직자들의 가정을 위해 모든 교회가 이자 수입의 반 이상을 기금으로 내 놓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어두운 지옥에서 전직 산 도적이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집도 많이 태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니 이 사람이 다른 죄수들과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수가 살았을 때에 무슨 좋은 일을 한 것이 없는가 들여다보았습니다. 딱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산길을 가다가 자기가 밟아 죽일뻔한 거미를 가까스로 비켜 가서 살렸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탁드려서 거미줄 한 가닥을 내려주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실낱같은 거미줄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 죄수는 그것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죄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천당을 향하여 그 거미줄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며 올라갔습니다. 한참 올라가 보니까 지옥이 아주 작게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이 산 도적은 저기 밑에서 수많은 죄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새까맣게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들 때문에 이 줄이 끊어지면 나도 함께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리쳤습니다. "야, 이놈들아, 이 죄수들아, 이 거미줄은 내 꺼야! 누가 너희들보고 맘대로 이 줄을 잡으라고 했어? 내려가! 내려가란 말이야?" 바로 그 순간 그때까지 끄떡없던 거미줄이 뚝 끊어졌습니다. 이 죄수도 다른 죄수와 함께 다시 지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혼자만 살려고 하면 모두 죽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서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사이에 친구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대등한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입니다. 서로 의존적인 관계입니다. 어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좀 도와준다고 다른 쪽을 얕잡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호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친구 됨 속에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의 친구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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