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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4:2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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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성규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아주 오래 전 미국에 이민 간 한 처녀가 고향 교회 목사님께 결혼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은 딸처럼 사랑한 교인이 혼인한다고 하니 생각 끝에 축전을 보냈습니다. 잘 살지 못하는 때인지라, 요한 1서 18절을 결혼 선물로 준다는 전보를 친 것입니다. 이 구절 내용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나니..." 입니다. 그런데 신혼부부가 받은 목사님의 전보는 요한복음 4장 18절이었습니다. 성서를 찾아 읽으니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 순간 신부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마리아 수가성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막 대화를 마친 다음부터입니다. 수가성우물가에 스승만 계시게 하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서 돌아와 보니 낯선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이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더구나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지는 못합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급히 돌아가고 이제 제자들과 예수 사이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말이 대화지 내용은 겉도는 것입니다. 예수와 교회역사 사이도 그렇고 예수와 우리들 사이도 그럴 것 같습니다.
스승이 시장한 것을 알고 음식을 구하려 간 제자들이기에 당연히 음식을 잡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랍비여 드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나보다고 서로 말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아까 그 사마리아 여인을 연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다"고 하시니 대화가 겉돌고 있습니다. 제자와 스승의 선 자리가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스승을 따르고 한 솥 밥 먹으며 말씀을 들어왔지만, 온갖 권능을 행하는 것을 목격하였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이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를 읽으면 제자들은 스승을 이해 못합니다. 비유를 듣고서 그 설명을 따로 청해서 들으려 합니다. 예수는 여러 번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해 부족만이 아니라 스승의 길도 오해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오 수난 당하는 그리스도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었습니다.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동일한 낱말로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을 정도로 스승의 길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행진 속에서 누가 높으냐고 다투고 요한과 야고보는 권력의 자리를 청탁을 하니 베드로만의 오해가 아닙니다.
마침내 가롯 유다는 스승을 은 30에 팔고, 베드로는 닭 울기 전 3번이나 선생님을 부인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 곁에는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이 도망을 쳤습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2천년의 교회역사도 그런 측면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긴 설명 대신에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형 이반이 동생 알료사에게 자작 극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제는 대심문관입니다. 때는 15세기, 세비아 광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00명의 이단자들이 화형을 당합니다. 국왕, 추기경, 각료,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한꺼번에 화형을 당합니다. 바로 그 이튿날 15세기 전 3년간 땅에서 사신 때의 인간 모습으로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살그머니 나타났으나 민중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는 15세기 전처럼 민중 속에서 살았습니다.
90세의 대심문관 추기경이 예수를 체포합니다. 그리곤 심문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방해하려 왔오. 우리의 친구는 당신이 아니라 악마요.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버리고 악마와 한 패가 되었소. 옛날에 당신이 거부했던 것을 우리는 그 악마로부터 받았소.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일을 방해하러 왔기에 나는 당신을 내일 화형에 처할 것이오…" 소설의 대심문관이 예수를 화형에 처형 하려듯이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들이 2천년 기독교사에서 계속되었다고 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순교자요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는 를, 김지하 시인은 를 말 한 것이라 여깁니다.
오늘날에도 예수와 상관없는 종교적 행위들이 예수와 복음의 이름으로 자행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로 비복음적인 것일수록 더 화려하게 예수적인 것으로 치장하고 나타납니다.
서양에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진실과 허위가 함께 목욕을 했습니다. 먼저 물에서 나온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었습니다. 진실은 허위의 옷을 입을 수 없으므로 벌거벗은 채로 살았습니다. 허위가 진실의 옷을 입고 미혹하지만 허위는 허위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35절에서 예수는, 너희는 4개월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하는데, 아니 지금이 추수 때라고 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파종 후 4개월이 지나야 추수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이고 자연의 순리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지금이 추수 때라 함은 웬일입니까? 자연 질서대로라면 4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치 영적 차원에서는 4개월이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지금이 추수 때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면 4개월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진실 중심으로, 정의와 자유를 중심에 놓으면 지금이 착수할 때요 지금이 추수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을 추수 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인종, 성별, 신분, 신앙 등이 장애가 되어 할 일을 미루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죽어 가는 생명의 자리에서 보면 4개월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4개월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산이 거기 있어 등산한다고 하듯이, 북한 동포가 굶어 죽어 가고 있으니, 생명이 시들고 있으니 돕자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4개월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이 추수 때라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외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외 것들을 먼저 구합니다. 그러기에 '우선 순위 바꾸기'가 절실해 집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지금이 항상 추수 때가 됩니다.
36절 하반 절에서 우리의 예상을 깨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 우리는 심는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오 또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하는데, 심는 자 따로, 거두는 자 따로 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심는 자, 수고하는 자가 그 결실을 거두고 영광과 찬양을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르지만 둘이 함께 기뻐하는 차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현대인은 똑똑합니다. 야무지게 이기적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각각 따로 라는 것이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심기는 내가 했는데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거둔다? 나는 피와 땀을 흘렸는데, 그 땀의 열매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나는 슬피 울어야 했던 일로 누군가는 내 눈물 때문에 웃게 된다? 이 물음의 답은 단연 "아니다" 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남의 피와 땀의 결실을 따먹고 삽니다.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당은 아직도 건축중이라 합니다. 유럽에는 몇 백년을 걸쳐 지은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 따로 있고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신앙을 키워갑니다. 험한 등산길에 누군가가 쇠줄을 달고 다리를 놓아 등산객을 즐겁게 합니다. 이들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수고한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소천한 기장의 증경총회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사독재시절에 감옥에 간 적이 없고 특별히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총회장 자격으로 해외 장로교 총회에 참석해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장 총회장이 소개되니 전 회원이 기립박수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것이 없었으나 같은 교단소속 목사, 청년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핍박을 당하면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그 땀과 희생의 열매를 그가 거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저 폴리갑의 순교, 마포나룻가 절두산에서 목잘려 죽은 천주교 순교자들, 대동강에서 피 흘린 토마스 목사, 주기철 목사 등 그들의 희생의 열매로 시작되고 다듬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 모를 신앙의 선배들의 땀과 피로 세워진 신앙의 탑에 오른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거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의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심으면서 또 일을 시작하면서 그 수고의 결실을 누군가 거두면서 기뻐하겠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자녀들보고 "너희들만 잘 되면 됐지,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사회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봉사와 헌신을 하면서도 그 결과를 전혀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넓은 운동장에서 페스탈로치가 허리를 구부려 열심히 주은 것은 유리조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거두지 못해도, 당대에 추수하지 못할지라도 일을 시작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그 열매로 인하여 기뻐할 것을 앞당겨 느끼고 기뻐할 수 있기에 심으면서 지금 기뻐합니다. 심는 일 그 자체에서 거두는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4개월이라는 계산이 필요없습니다. 다만 지금이 추수 때인 것입니다. 그는 언젠가 이름 모를 이웃이 거두고, 이 민족이 추수하며 기뻐할 것을 내다보는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거두지 않으면 이 역사가 거둘 것이고 하나님이 추수할 것을 내다보는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둘 것이기에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섬기고 지금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보다 공로가 많지만 그 열매를 스스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신앙 경력이 누구보다 출중하면서도, 헌금을 누구보다 많이 하면서도 그 일로 자기 주장을 펴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자가 말한 대로 공성이불거(功成而不去)입니다. 공을 세우고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8월 14일 일간지 톱기사 제목은 이었습니다. 내용인즉 12일 오후 6시쯤 60대 중반쯤의 할머니가 신문사 수재민 성금 창구를 찾았습니다. 수표 5천만 원을 내 놓았습니다. 기탁서 작성할 뜻은 없고 돈이 제대로 쓰여지기만 하면 된다는 할머니였습니다. 어떤 돈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쓰려고 아들과 함께 틈틈이 오랫동안 모았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끝내 이름을 밝히기를 사양하고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향해 접수 창구의 본사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머리를 숙였습니다. 여기 머리를 숙인 신문사 직원이나 이 기사를 오려 놓았다가 설교문에 삽입하여 쓰고 있는 나는 그 할머니의 삶에서 진한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할머니는 이미 그 열매를 이름 모를 사람들 속에서 거두고 있는 것 아닌가요?
철인 스피노자가 말했던가요? 나는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으련다고요. 80세 가까운 할아버지가 17년 후에 필 꽃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닌 누군가가 그 꽃을 볼 것을 앞당겨 보기 때문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자기가 묻힐 무덤을 손질하면서 주변에 유실수를 심습니다. 언젠가 죽은 후 자손들이 성묘하러 와서 그 열매를 따먹을 것을 내다보며 지금 기뻐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새길교회가 지금 하는 일의 열매는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거둘 수 있습니다. 이 민족이 거두고 하나님이 거두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라도 우리의 일을 성사시킬 것입니다. 의와 진리를 따라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풍성한 열매로 거두실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엔가 우리들이 즐겨 암송했던 Longfellow의 화살의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공중을 향하여 한 화살을 쏘았노라
그 날음이 너무 빨라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네
나는 공중을 향하여 한 노래를 불렀노라
그 날음이 너무 빨라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네
그러나 먼 훗날 나는 그 화살이 느티나무에 꽂힌 것을 보았네
그리고 내가 부른 노래를 처음부터 친구의 가슴에서 들었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본문 말씀은 사마리아 수가성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막 대화를 마친 다음부터입니다. 수가성우물가에 스승만 계시게 하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서 돌아와 보니 낯선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이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더구나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지는 못합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급히 돌아가고 이제 제자들과 예수 사이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말이 대화지 내용은 겉도는 것입니다. 예수와 교회역사 사이도 그렇고 예수와 우리들 사이도 그럴 것 같습니다.
스승이 시장한 것을 알고 음식을 구하려 간 제자들이기에 당연히 음식을 잡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랍비여 드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나보다고 서로 말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아까 그 사마리아 여인을 연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다"고 하시니 대화가 겉돌고 있습니다. 제자와 스승의 선 자리가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스승을 따르고 한 솥 밥 먹으며 말씀을 들어왔지만, 온갖 권능을 행하는 것을 목격하였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이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를 읽으면 제자들은 스승을 이해 못합니다. 비유를 듣고서 그 설명을 따로 청해서 들으려 합니다. 예수는 여러 번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해 부족만이 아니라 스승의 길도 오해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오 수난 당하는 그리스도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었습니다.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동일한 낱말로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을 정도로 스승의 길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행진 속에서 누가 높으냐고 다투고 요한과 야고보는 권력의 자리를 청탁을 하니 베드로만의 오해가 아닙니다.
마침내 가롯 유다는 스승을 은 30에 팔고, 베드로는 닭 울기 전 3번이나 선생님을 부인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 곁에는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이 도망을 쳤습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2천년의 교회역사도 그런 측면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긴 설명 대신에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형 이반이 동생 알료사에게 자작 극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제는 대심문관입니다. 때는 15세기, 세비아 광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00명의 이단자들이 화형을 당합니다. 국왕, 추기경, 각료,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한꺼번에 화형을 당합니다. 바로 그 이튿날 15세기 전 3년간 땅에서 사신 때의 인간 모습으로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살그머니 나타났으나 민중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는 15세기 전처럼 민중 속에서 살았습니다.
90세의 대심문관 추기경이 예수를 체포합니다. 그리곤 심문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방해하려 왔오. 우리의 친구는 당신이 아니라 악마요.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버리고 악마와 한 패가 되었소. 옛날에 당신이 거부했던 것을 우리는 그 악마로부터 받았소.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일을 방해하러 왔기에 나는 당신을 내일 화형에 처할 것이오…" 소설의 대심문관이 예수를 화형에 처형 하려듯이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들이 2천년 기독교사에서 계속되었다고 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순교자요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는 를, 김지하 시인은 를 말 한 것이라 여깁니다.
오늘날에도 예수와 상관없는 종교적 행위들이 예수와 복음의 이름으로 자행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로 비복음적인 것일수록 더 화려하게 예수적인 것으로 치장하고 나타납니다.
서양에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진실과 허위가 함께 목욕을 했습니다. 먼저 물에서 나온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었습니다. 진실은 허위의 옷을 입을 수 없으므로 벌거벗은 채로 살았습니다. 허위가 진실의 옷을 입고 미혹하지만 허위는 허위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35절에서 예수는, 너희는 4개월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하는데, 아니 지금이 추수 때라고 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파종 후 4개월이 지나야 추수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이고 자연의 순리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지금이 추수 때라 함은 웬일입니까? 자연 질서대로라면 4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치 영적 차원에서는 4개월이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지금이 추수 때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면 4개월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진실 중심으로, 정의와 자유를 중심에 놓으면 지금이 착수할 때요 지금이 추수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을 추수 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인종, 성별, 신분, 신앙 등이 장애가 되어 할 일을 미루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죽어 가는 생명의 자리에서 보면 4개월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4개월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산이 거기 있어 등산한다고 하듯이, 북한 동포가 굶어 죽어 가고 있으니, 생명이 시들고 있으니 돕자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4개월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이 추수 때라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외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외 것들을 먼저 구합니다. 그러기에 '우선 순위 바꾸기'가 절실해 집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지금이 항상 추수 때가 됩니다.
36절 하반 절에서 우리의 예상을 깨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 우리는 심는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오 또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하는데, 심는 자 따로, 거두는 자 따로 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심는 자, 수고하는 자가 그 결실을 거두고 영광과 찬양을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르지만 둘이 함께 기뻐하는 차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현대인은 똑똑합니다. 야무지게 이기적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각각 따로 라는 것이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심기는 내가 했는데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거둔다? 나는 피와 땀을 흘렸는데, 그 땀의 열매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나는 슬피 울어야 했던 일로 누군가는 내 눈물 때문에 웃게 된다? 이 물음의 답은 단연 "아니다" 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남의 피와 땀의 결실을 따먹고 삽니다.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당은 아직도 건축중이라 합니다. 유럽에는 몇 백년을 걸쳐 지은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 따로 있고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신앙을 키워갑니다. 험한 등산길에 누군가가 쇠줄을 달고 다리를 놓아 등산객을 즐겁게 합니다. 이들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수고한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소천한 기장의 증경총회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사독재시절에 감옥에 간 적이 없고 특별히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총회장 자격으로 해외 장로교 총회에 참석해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장 총회장이 소개되니 전 회원이 기립박수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것이 없었으나 같은 교단소속 목사, 청년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핍박을 당하면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그 땀과 희생의 열매를 그가 거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저 폴리갑의 순교, 마포나룻가 절두산에서 목잘려 죽은 천주교 순교자들, 대동강에서 피 흘린 토마스 목사, 주기철 목사 등 그들의 희생의 열매로 시작되고 다듬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 모를 신앙의 선배들의 땀과 피로 세워진 신앙의 탑에 오른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거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의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심으면서 또 일을 시작하면서 그 수고의 결실을 누군가 거두면서 기뻐하겠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자녀들보고 "너희들만 잘 되면 됐지,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사회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봉사와 헌신을 하면서도 그 결과를 전혀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넓은 운동장에서 페스탈로치가 허리를 구부려 열심히 주은 것은 유리조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거두지 못해도, 당대에 추수하지 못할지라도 일을 시작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그 열매로 인하여 기뻐할 것을 앞당겨 느끼고 기뻐할 수 있기에 심으면서 지금 기뻐합니다. 심는 일 그 자체에서 거두는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4개월이라는 계산이 필요없습니다. 다만 지금이 추수 때인 것입니다. 그는 언젠가 이름 모를 이웃이 거두고, 이 민족이 추수하며 기뻐할 것을 내다보는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거두지 않으면 이 역사가 거둘 것이고 하나님이 추수할 것을 내다보는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둘 것이기에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섬기고 지금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보다 공로가 많지만 그 열매를 스스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신앙 경력이 누구보다 출중하면서도, 헌금을 누구보다 많이 하면서도 그 일로 자기 주장을 펴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자가 말한 대로 공성이불거(功成而不去)입니다. 공을 세우고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8월 14일 일간지 톱기사 제목은 이었습니다. 내용인즉 12일 오후 6시쯤 60대 중반쯤의 할머니가 신문사 수재민 성금 창구를 찾았습니다. 수표 5천만 원을 내 놓았습니다. 기탁서 작성할 뜻은 없고 돈이 제대로 쓰여지기만 하면 된다는 할머니였습니다. 어떤 돈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쓰려고 아들과 함께 틈틈이 오랫동안 모았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끝내 이름을 밝히기를 사양하고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향해 접수 창구의 본사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머리를 숙였습니다. 여기 머리를 숙인 신문사 직원이나 이 기사를 오려 놓았다가 설교문에 삽입하여 쓰고 있는 나는 그 할머니의 삶에서 진한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할머니는 이미 그 열매를 이름 모를 사람들 속에서 거두고 있는 것 아닌가요?
철인 스피노자가 말했던가요? 나는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으련다고요. 80세 가까운 할아버지가 17년 후에 필 꽃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닌 누군가가 그 꽃을 볼 것을 앞당겨 보기 때문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자기가 묻힐 무덤을 손질하면서 주변에 유실수를 심습니다. 언젠가 죽은 후 자손들이 성묘하러 와서 그 열매를 따먹을 것을 내다보며 지금 기뻐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새길교회가 지금 하는 일의 열매는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거둘 수 있습니다. 이 민족이 거두고 하나님이 거두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라도 우리의 일을 성사시킬 것입니다. 의와 진리를 따라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풍성한 열매로 거두실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엔가 우리들이 즐겨 암송했던 Longfellow의 화살의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공중을 향하여 한 화살을 쏘았노라
그 날음이 너무 빨라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네
나는 공중을 향하여 한 노래를 불렀노라
그 날음이 너무 빨라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네
그러나 먼 훗날 나는 그 화살이 느티나무에 꽂힌 것을 보았네
그리고 내가 부른 노래를 처음부터 친구의 가슴에서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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