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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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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용덕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5.10.23 주일설교 |
제목: 뜻대로 하소서(順命)
본문: 요한복음 15:13, 로마서 8:5~9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것은 문둥이 성자로 불리는 다미안의 묘비에 쓰여진, 그의 삶을 함축한 성경구절입니다. 여기서 ‘친구’란 예수께서 항상 강조하던, 헐벗고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최고형태로서, 이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이 과연 인간의 선한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친구’를 위하여 자기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친구’를 위해 바치거나, 지식을 활용하여 봉사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친구’를 위하여, 하나님 사업을 위하여, 다른 삶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을 간혹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이룬다는 것, 순교(殉敎)의 길을 가는 것은 자기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의적(自意的) 결단을 넘어, 성령(聖靈)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이시려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불행까지도 감수하여가며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 인간적인 욕구와 의지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를 완전히 바칠 때,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 신앙의 길이 열리는 것이겠지요. ‘뜻대로 하소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소서’ 라는 순명의 삶은 그만큼 깊은 종교적 헌신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오래 전, 제 친구의 신부 서품미사에서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청빈(淸貧)과 정결(淨潔)과 순명(順命)의 삶을 서약하는 의식 중 새로이 서품받는 신부들이 바닥에 온몸을 펴고 엎드리는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이한 느낌이 들기는 하였습니다만, 순명 즉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서약의 행위였기 때문에 그 순간이 제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 교리상, 교황의 명에 복종하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순명의 삶을 살았던 전형적인 인물로 Damien 신부를 들 수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아프리카 오지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던, 의사이고 위대한 신학자이며 오르가니스트이고 바흐음악의 이론가인 슈바이처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었습니다. 더구나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러나 하와이에서 스스로 문둥이가 되어 죽어간 다미안 신부의 삶을 알게 되면서, 그의 완전한 헌신, 순명의 삶에 충격이라 할 만큼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수 없듯이 다미안도 존경의 차원을 넘어선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부르는 것 자체가 꺼려져 최근에는 한센씨병(Hansen's Disease)으로 고쳐 부르기도 합니다만, 일찍이 천형(天刑)으로 여겨질 만큼 치유가 불가능한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성경에도 구약, 신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기도 하고, 예수가 행한 치유의 기적을 알려주는 예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오죽 치료가 안 되는 병이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아이의 간을 빼어 먹어야 낫는다고 하는 소문까지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두려움 때문에 문둥이를 멀리 하게 하려는 민간에서의 잔인한 대응이었겠습니다만, 어떻든 저도 어렸을 때 길에서 놀다가도 문둥이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문둥이에게 먹을 것과 옷가지를 건네주고 난 후는 꼭 대문 고리를 소독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문둥병은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음 앞에 오는 죽음’이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동굴 속의 문둥이들의 모습은 아마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서양에서는 집안에 문둥병자가 생기면, 사제가 와서 환자에게 장례에 해당하는 작별의식을 행하고 집을 떠나게 하여 일반 세상에서 사라지게 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실 문둥병이 거의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4세기 중엽 흑사병(pest)이 돌아 전유럽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이 병으로 죽어갈 때, 면역력이 약한 문둥병자들이 가장 먼저 죽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미안은 1840년 벨기에의 루뱅 근처 농촌에서 태어난 죠셉 드 뵈스터(Joseph de Veuster)의 수도명(修道名)입니다. 하와이 원주민들이 지금도 그를 카미아노(Kamiano)로 기억하는 것은 다미안이 처음 봉사하던 마을의 사람들이 ‘D’ 발음을 못해 대신 ‘K’로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체구가 크고 건장하여, 수도수사가 되기 전에는 건축일에 종사하는 평수사(平修士)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닮는 것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가 하와이에 파송될 때(1863년)의 하와이는 토착민 왕국이었고, 마법사들이 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1778년 James Cook 선장에 의해 서양세계에 노출될 때까지 하와이는 40만 명의 토착민이 행복하게 사는 낙원 같은 섬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백인들이 들어오면서 성병?결핵?문둥병 등이 전염되어 다미안이 도착했을 때에는 토착인구가 5만 명으로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다미안은 백인으로서의 죄의식을 처음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둥병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자, 하와이 정부에서는 몰로카이(Molokai) 섬의 한 구석에 문둥이들을 격리수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문둥병자가 발생한 집안에서는 관리들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온 가족이 깊은 산속이나 토굴로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미안의 신도 가운데에도 문둥병자들이 발생하여, 강제격리 명령을 받게 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격리 직전 마지막 영성체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몰로카이 수용마을로 들어가면 절대로 바깥과의 접촉이 금지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몰로카이 섬에 있는 문둥이들의 격리마을은, 탈출을 막기 위해 섬 끝에 돌출한 칼라우파파(Kalaupapa)라는 조그만 반도에 있었습니다. 삼면이 바다, 그리고 육지로 연결된 곳도 날카로운 절벽으로 막혀, 오직 배로만 연락이 되던 완벽한 격리지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강제 이주되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문둥이들에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다미안은 자청하여 이 곳으로 갔습니다. 이 곳으로 일단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규정을 알고, 하와이의 주교는 다미안의 의지를 다시 확인하여 보았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하였습니다. 그가 칼라우파파(Kalaupapa)에 도착했을 때의 문둥이 마을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쓰레기처럼 버려져 짐승만도 못한 삶 속에 내던져져 있었고, 자포자기에 빠진 그들의 생활 또한 음주?도박?난교로 절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마음을 닫아버린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던져,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는 없다고 다미안은 결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다미안이 누이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순명과 헌신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2-3개월 전에 큰 폭풍이 두 번이나 불어왔습니다. 첫 번째는 불과 2-3시간 만에 집을 100여 채나 파괴시키고, 두 번째 폭풍은 사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 때에 따라 저는 목수가 되어 일하기도 하고 성당 안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누님! 번민은 많고 위로는 적은 것이 요즈음 저의 생활입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멍에도 즐겁고 짐도 가볍게 지고 살아갑니다. ……
저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따라 이 인내가 제 사업의 생명이라 생각하고 만족하려 합니다. 숙련된 조각가의 손에 들려 있는 연장과 같이,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
다미안은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 식사는 두 끼-아침식사로는 대개 쌀, 절인 고기, 커피와 비스킷 등이고, 저녁은 아침에 먹다 남은 것과 차 한 잔으로 때웠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문둥이들의 장례, 매장을 비롯하여 틈나는 대로 위생, 교육시설의 개선 등에 온 시간을 바치고 있었습니다만,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적어 그 자신이 스스로 집도 짓고 수도시설도 앞서 해 나가야 했습니다. 워낙 건장한 체력에다가 목수의 경험도 있어 이러한 일을 그에게 맡겨진 소명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오기 전에는 죽은 사람들이 관도 없이 묻히고 말았지만 그는 외롭게 죽어간 그들을 경건하게 보내주기 위해서 몸소 관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2천 개 이상의 관을 짰다고 합니다. 제대로 관을 묻으려면 묘지의 흙을 파내어야 하는데, 이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예 잠자리를 공동묘지 옆에 정하고 교회도 그 근처에 지어, 문둥이들조차 꺼리는 그곳에서 생활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하와이의 주교가 다미안을 보러 왔을 때, 그 배의 선장은 규정에 따라, 다미안 마저도 문둥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 하여 승선을 금하였습니다. 다미안은 주교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승선을 간청하였지만, 선장의 완강한 거절로 할 수 없이 그는 타고 온 보트를 주교의 배 옆에 대어 놓고 둘이만 아는 프랑스어로, 큰 소리로 고해성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주교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문둥이들의 고름을 닦아내고, 붕대를 갈아주기 위하여 몸으로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기 위하여 직접 손을 대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그의 희생적 봉사가 알려지면서 외부세계로부터 지원이 늘기 시작하고 자원봉사하려는 신부와 수녀들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몰로카이의 문둥이들도 차차 마음을 잡고, 생활을 절제해가는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 섬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1885년 6월 첫 주일 미사 때였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하고 항상 시작하던 첫 마디 대신 다미안은 “우리 문둥이들은”으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감동이 엄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린 것을 감지한 것은 그 전해였다고 합니다만 공식적인 확인은 이 때였습니다. 하와이의 주교는 즉시 치료를 위해 그 곳을 떠나도록 명하였지만, 다미안은 “만일 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 섬을 떠나 제가 하던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면, 저는 성한 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고 청원하였습니다. 문둥이들을 위하여 자신이 문둥이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교의 명령에 따라 하와이의 병원에 가보기는 하였습니다만, 문둥이 마을로 돌아가려는 그의 소원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돌아오는 배의 선장이 바로 몇 년 전 그의 승선을 막았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미안의 승선을 제지한 뒤로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다미안을 다시 만난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그 선장을 다미안은 오히려 깊은 애정으로 죄책감에 떠는 영혼을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두 사람의 맑은 영혼이 함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심각한 문둥병의 악화로 1889년 4월 15일 아침 떠날 때, 그의 얼굴에는 문둥병자의 징표가 모두 사라졌다고 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 본 신부와 수녀들은 증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기적이 삶의 마지막 순간 다미안에게도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보다도, 하나님께 순명하여 자신을 버리고 오직 ‘뜻대로 하소서’만을 지켜간 다미안의 영혼을 성령으로 받아들이는 섭리의 현현(顯現)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순간의 낭비도 없이 충실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만, 다미안처럼 살아있는 순간을 한시도 헛되지 않게 충실하게 채워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 충실한 삶은 인간적 의지와 노력으로 되어지기 보다는,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순명(順命)할 때, 자기의지가 성령의 힘으로 변화하여 삶의 순간순간이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과 일치할 때, 거기에 진정 충실한 삶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찾아 가는 도상(途上)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항상 되묻게 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본문: 요한복음 15:13, 로마서 8:5~9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것은 문둥이 성자로 불리는 다미안의 묘비에 쓰여진, 그의 삶을 함축한 성경구절입니다. 여기서 ‘친구’란 예수께서 항상 강조하던, 헐벗고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최고형태로서, 이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이 과연 인간의 선한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친구’를 위하여 자기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친구’를 위해 바치거나, 지식을 활용하여 봉사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친구’를 위하여, 하나님 사업을 위하여, 다른 삶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을 간혹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이룬다는 것, 순교(殉敎)의 길을 가는 것은 자기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의적(自意的) 결단을 넘어, 성령(聖靈)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이시려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불행까지도 감수하여가며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 인간적인 욕구와 의지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를 완전히 바칠 때,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 신앙의 길이 열리는 것이겠지요. ‘뜻대로 하소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소서’ 라는 순명의 삶은 그만큼 깊은 종교적 헌신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오래 전, 제 친구의 신부 서품미사에서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청빈(淸貧)과 정결(淨潔)과 순명(順命)의 삶을 서약하는 의식 중 새로이 서품받는 신부들이 바닥에 온몸을 펴고 엎드리는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이한 느낌이 들기는 하였습니다만, 순명 즉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서약의 행위였기 때문에 그 순간이 제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 교리상, 교황의 명에 복종하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순명의 삶을 살았던 전형적인 인물로 Damien 신부를 들 수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아프리카 오지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던, 의사이고 위대한 신학자이며 오르가니스트이고 바흐음악의 이론가인 슈바이처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었습니다. 더구나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러나 하와이에서 스스로 문둥이가 되어 죽어간 다미안 신부의 삶을 알게 되면서, 그의 완전한 헌신, 순명의 삶에 충격이라 할 만큼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수 없듯이 다미안도 존경의 차원을 넘어선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부르는 것 자체가 꺼려져 최근에는 한센씨병(Hansen's Disease)으로 고쳐 부르기도 합니다만, 일찍이 천형(天刑)으로 여겨질 만큼 치유가 불가능한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성경에도 구약, 신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기도 하고, 예수가 행한 치유의 기적을 알려주는 예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오죽 치료가 안 되는 병이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아이의 간을 빼어 먹어야 낫는다고 하는 소문까지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두려움 때문에 문둥이를 멀리 하게 하려는 민간에서의 잔인한 대응이었겠습니다만, 어떻든 저도 어렸을 때 길에서 놀다가도 문둥이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문둥이에게 먹을 것과 옷가지를 건네주고 난 후는 꼭 대문 고리를 소독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문둥병은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음 앞에 오는 죽음’이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동굴 속의 문둥이들의 모습은 아마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서양에서는 집안에 문둥병자가 생기면, 사제가 와서 환자에게 장례에 해당하는 작별의식을 행하고 집을 떠나게 하여 일반 세상에서 사라지게 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실 문둥병이 거의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4세기 중엽 흑사병(pest)이 돌아 전유럽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이 병으로 죽어갈 때, 면역력이 약한 문둥병자들이 가장 먼저 죽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미안은 1840년 벨기에의 루뱅 근처 농촌에서 태어난 죠셉 드 뵈스터(Joseph de Veuster)의 수도명(修道名)입니다. 하와이 원주민들이 지금도 그를 카미아노(Kamiano)로 기억하는 것은 다미안이 처음 봉사하던 마을의 사람들이 ‘D’ 발음을 못해 대신 ‘K’로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체구가 크고 건장하여, 수도수사가 되기 전에는 건축일에 종사하는 평수사(平修士)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닮는 것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가 하와이에 파송될 때(1863년)의 하와이는 토착민 왕국이었고, 마법사들이 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1778년 James Cook 선장에 의해 서양세계에 노출될 때까지 하와이는 40만 명의 토착민이 행복하게 사는 낙원 같은 섬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백인들이 들어오면서 성병?결핵?문둥병 등이 전염되어 다미안이 도착했을 때에는 토착인구가 5만 명으로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다미안은 백인으로서의 죄의식을 처음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둥병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자, 하와이 정부에서는 몰로카이(Molokai) 섬의 한 구석에 문둥이들을 격리수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문둥병자가 발생한 집안에서는 관리들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온 가족이 깊은 산속이나 토굴로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미안의 신도 가운데에도 문둥병자들이 발생하여, 강제격리 명령을 받게 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격리 직전 마지막 영성체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몰로카이 수용마을로 들어가면 절대로 바깥과의 접촉이 금지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몰로카이 섬에 있는 문둥이들의 격리마을은, 탈출을 막기 위해 섬 끝에 돌출한 칼라우파파(Kalaupapa)라는 조그만 반도에 있었습니다. 삼면이 바다, 그리고 육지로 연결된 곳도 날카로운 절벽으로 막혀, 오직 배로만 연락이 되던 완벽한 격리지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강제 이주되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문둥이들에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다미안은 자청하여 이 곳으로 갔습니다. 이 곳으로 일단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규정을 알고, 하와이의 주교는 다미안의 의지를 다시 확인하여 보았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하였습니다. 그가 칼라우파파(Kalaupapa)에 도착했을 때의 문둥이 마을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쓰레기처럼 버려져 짐승만도 못한 삶 속에 내던져져 있었고, 자포자기에 빠진 그들의 생활 또한 음주?도박?난교로 절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마음을 닫아버린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던져,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는 없다고 다미안은 결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다미안이 누이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순명과 헌신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2-3개월 전에 큰 폭풍이 두 번이나 불어왔습니다. 첫 번째는 불과 2-3시간 만에 집을 100여 채나 파괴시키고, 두 번째 폭풍은 사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 때에 따라 저는 목수가 되어 일하기도 하고 성당 안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누님! 번민은 많고 위로는 적은 것이 요즈음 저의 생활입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멍에도 즐겁고 짐도 가볍게 지고 살아갑니다. ……
저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따라 이 인내가 제 사업의 생명이라 생각하고 만족하려 합니다. 숙련된 조각가의 손에 들려 있는 연장과 같이,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
다미안은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 식사는 두 끼-아침식사로는 대개 쌀, 절인 고기, 커피와 비스킷 등이고, 저녁은 아침에 먹다 남은 것과 차 한 잔으로 때웠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문둥이들의 장례, 매장을 비롯하여 틈나는 대로 위생, 교육시설의 개선 등에 온 시간을 바치고 있었습니다만,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적어 그 자신이 스스로 집도 짓고 수도시설도 앞서 해 나가야 했습니다. 워낙 건장한 체력에다가 목수의 경험도 있어 이러한 일을 그에게 맡겨진 소명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오기 전에는 죽은 사람들이 관도 없이 묻히고 말았지만 그는 외롭게 죽어간 그들을 경건하게 보내주기 위해서 몸소 관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2천 개 이상의 관을 짰다고 합니다. 제대로 관을 묻으려면 묘지의 흙을 파내어야 하는데, 이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예 잠자리를 공동묘지 옆에 정하고 교회도 그 근처에 지어, 문둥이들조차 꺼리는 그곳에서 생활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하와이의 주교가 다미안을 보러 왔을 때, 그 배의 선장은 규정에 따라, 다미안 마저도 문둥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 하여 승선을 금하였습니다. 다미안은 주교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승선을 간청하였지만, 선장의 완강한 거절로 할 수 없이 그는 타고 온 보트를 주교의 배 옆에 대어 놓고 둘이만 아는 프랑스어로, 큰 소리로 고해성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주교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문둥이들의 고름을 닦아내고, 붕대를 갈아주기 위하여 몸으로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기 위하여 직접 손을 대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그의 희생적 봉사가 알려지면서 외부세계로부터 지원이 늘기 시작하고 자원봉사하려는 신부와 수녀들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몰로카이의 문둥이들도 차차 마음을 잡고, 생활을 절제해가는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 섬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1885년 6월 첫 주일 미사 때였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하고 항상 시작하던 첫 마디 대신 다미안은 “우리 문둥이들은”으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감동이 엄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린 것을 감지한 것은 그 전해였다고 합니다만 공식적인 확인은 이 때였습니다. 하와이의 주교는 즉시 치료를 위해 그 곳을 떠나도록 명하였지만, 다미안은 “만일 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 섬을 떠나 제가 하던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면, 저는 성한 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고 청원하였습니다. 문둥이들을 위하여 자신이 문둥이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교의 명령에 따라 하와이의 병원에 가보기는 하였습니다만, 문둥이 마을로 돌아가려는 그의 소원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돌아오는 배의 선장이 바로 몇 년 전 그의 승선을 막았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미안의 승선을 제지한 뒤로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다미안을 다시 만난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그 선장을 다미안은 오히려 깊은 애정으로 죄책감에 떠는 영혼을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두 사람의 맑은 영혼이 함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심각한 문둥병의 악화로 1889년 4월 15일 아침 떠날 때, 그의 얼굴에는 문둥병자의 징표가 모두 사라졌다고 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 본 신부와 수녀들은 증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기적이 삶의 마지막 순간 다미안에게도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보다도, 하나님께 순명하여 자신을 버리고 오직 ‘뜻대로 하소서’만을 지켜간 다미안의 영혼을 성령으로 받아들이는 섭리의 현현(顯現)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순간의 낭비도 없이 충실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만, 다미안처럼 살아있는 순간을 한시도 헛되지 않게 충실하게 채워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 충실한 삶은 인간적 의지와 노력으로 되어지기 보다는,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순명(順命)할 때, 자기의지가 성령의 힘으로 변화하여 삶의 순간순간이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과 일치할 때, 거기에 진정 충실한 삶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찾아 가는 도상(途上)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항상 되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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