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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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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추응식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2005.11.13 주일설교 |
전에 방학 때, 대구 있을 때는 노동자 교회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주일날, 지난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가면 말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 목사님, 저는 술 안 먹으려고 약속했는데 또 마셨습니다. 다음 주부터 정말 안 마시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은 ‘너 그 말이 도대체 몇 번째냐? 알았다. 오늘은 너 말을 꼭 믿고, 내가 술 한 잔 사겠다. 오늘 예배 마치고 칠성시장에 가자’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여기는 중세가 완전히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살아있는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서도 동물의 왕국, 인간시대 같은 난픽션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물론 TV에서 사실적인 것이라 해도 선택되고 편집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관념적인 것보다는 살아있는 실재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설교말씀도 실재 있는 일을 말할 때 더 감동이 됩니다. 얼마 전 말씀 증거 하신 분도 전도서의 일인칭 증언이 감동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서 자기 고백적 증언은 공감도 잘 되고, 평신도 교회에도 어울리는 형식이 아닐까하는 생각합니다. 설교라는 말 대신 말씀증거라는 말을 우리가 쓰는 것도 이런 의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저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일찍이 칼 바르트도 한손에는 성경, 또 한손에는 신문이란 말을 하였고, 나아가서 돌아가신 서남동 목사님은 삶이 오히려 텍스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실재 예수라는 사람을 세상에 보내어 진리를 증거 하셨고, 우리도 예수님이 살았던 모습을 통해 실재성을 더욱 느낍니다.
저는 신앙의 넓이는 물론 깊이도 없습니다. 성서를 끝까지 한번도 차분하게 읽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서말씀을 통전적으로 해석할 능력은 물론 없습니다. 30년 전부터 깊이 빠져서 끝까지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창세기에서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등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좀 부끄럽고 위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에는 성서를 몇 번을 읽어야 천국 간다는 말 없고, 오히려 세리와 바리세인 등의 예를 들면서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에 약간의 위로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성서를 열심히 읽지 않은 것은 물론 저의 게으름과 부족한 신심 때문이겠지만 굳이 변명을 한다면 제가 성서를 처음 접했을 때, 경전치고는 참 쉽다고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대체로 잘 이해되었습니다. 또 왜 쉽게 기술되어있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고매한 이론서라기보다는 실천서 같이 제에게는 느껴졌습니다.
저는 전번 말씀 증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교를 접한 지 한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믿지 않았을 때와 믿고 난 이후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저는 예수교 득을 확실히 보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교를 통해 저는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했고, 세상의 원리를 이해했습니다. 믿기 전에 비해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나름대로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했을 때, 저는 움직이지 않는 길은 움직이는 생명을 위해 있고, 생명은 그 자체가 길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말씀은 교조적이지 않아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저를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외줄기 길도 아니고,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히 열려있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길 없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명료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보면, 우리하고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교육기관 같은 데서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교육시킨 것도 아니고, 삶의 현장 속에서 몸소 사시면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길도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라는 그런 도와는 좀 다르게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길은 오늘날과 달랐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도회지 말고는 길이 대체로 험했을 것 같습니다. 잘못 들어서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막의 길도 있었을 것이고 강도가 나타나는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은 경우에 따라 생명과 직결되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서, 요한복음 14장 5절 뒷부분에서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도마가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목적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길을 알 수 있겠느냐는 그런 물음인 것 같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은 수단이요, 장애가 됩니다. 인류 문명사는 이런 장애를 줄여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의 길은 그 자체가 목적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은 길 위에서 걷든지 쉬든지 죽든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정말 자유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는 성서가 쉽게 느껴졌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말씀은 어려웠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랜드 디자인을 하신 하나님의 분신답지 않게 편협하고 종파적인 분 같이 느껴졌습니다.
평시 제가 가지고 있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공유코드는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다’라는 생각에 혼란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한히 열려 있는 길이 아니라 바둑의 외통수 길 같았습니다. 자유의 길이 아니라 구속의 길 같았습니다. 안 그래도 종파, 교파 때문에 동네 시끄러운데 이런 것은 속으로 생각하시지 꼭 겉으로 드러내셔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네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목사님께 이 구절을 물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 가지고는 안 된다’라는 의미가 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의 길은 넓어졌고 자유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 때 바리세파 사람들은 구획정리를 하고 몇 개의 길을 만들어 놓고는 ‘이 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너의 길은 무한하다’ 하시며 새 길을 내셨습니다. 아니 새길이 아니라 본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새길이 이 길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야 움직이는 것들을 위할 수 있습니다. 새길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아서 제가 정대현 선생님께 ‘길교회’라든가 아니면 ‘그 길 교회’지 왜 ‘새길’입니까?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처럼 좀 잘해보자 뭐 이런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은 ‘말 그대로 뭐 쉽게 생각해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제가 말하고도 괜히 제가 말 만들어 말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요즈음 종교를 넓게 보다 생각하면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정상은 하나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려오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한 곳 바다에서 만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의 가족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미션스쿨에 오래 계셨지만, 공자, 노자, 장자를 좋아하시고, 요즘도 새벽에 향교에 가서 공부하십니다. 어머니는 불교시고, 그리고 저희 형제 5남매는 모두 예수교입니다. 위에 누님 두 분 계시고 아래에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데, 여동생, 매제는 목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조금 덜한 편인데 전에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서도 종교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우선 바로 위 누님과 바로 아래 여동생은 좀 극성인 편입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앞에 앉혀놓고 몇 시간씩 예수 믿어야 된다고 설득합니다. 어머님은 난처해하시면서 ‘오냐 알았다, 알았다. 너희들이 하나님 믿어서 나는 좋다. 하나님께 기도 많이 해다오.’ 라는 말씀만 간간히 하십니다. 저는 뒤에서 보고 있으면 종교를 떠나서 안쓰럽고, 어머님이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좀 하시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즐거운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화살이 저에게 날아옵니다. ‘장남인 네가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으로 인도해야지, 네가 맨 날 희미하게 신앙생활을 하니까 엄마 아버지가 교회에 안가시잖아’라면서 원망을 합니다. 저는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사실 부모님이 예수를 잘 믿고 편안히 돌아가시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같이 사는 백주희에게도 가끔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믿음이 약해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다른 형제들이 없을 때는 어머니께 살며시 ‘어머님, 공덕으로 제가 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버님하고는 가끔씩 호쾌한 장자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면 두 분은 좋아하십니다. 저는 두 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당신들을 이해 해 주니까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좋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큰애가 믿고 있는 예수교는 서로 서로 위해주는 것이 종교보다 먼저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이를 때는,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갈래의 길이 하나 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하고 김재준 목사님과 그의 아버님과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앞의 마태, 마가, 누가가 예수님 언행 중심의 기술인데 비추어 영적, 해석적 의미가 있어서 앞에 것 보다는 좀 어렵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내에서도 제자들이 잘 모르겠다고 예수님께 묻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절 앞에 있는 5절에서도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과 길을 잘 모르겠다고 했고 뒤에 나오는 8절 9절에서 빌립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물어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대체로 ‘내 사는 것 보면 모르겠냐 내가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하고 답하십니다. 오늘 성서 4절에서도 ‘내가 가는 곳으로 가는 길을 너희는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7절에서도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큰 길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세상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았고 새들도 살았습니다. 구름도 흘렀고, 바람도 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길이 이미 있었습니다.
2000년 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길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처림 밥도 먹고, 술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다 이루었다하고 편히 죽었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삶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고 다마스커스의 길 위에서도 여전히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의 모든 삶이 길이었음을 길 되고 있음을 성서의 기자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은 지금 우리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류상태 형제님도 자연, 양심, 성서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나오고, 컴퓨터가 나와도 변하지 않는 그 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교도 종파도 없던 한점 막힐 곳 없는 그 태초의 하나님의 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저 우주에서도 세포 속에서도, 교회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있고 싶습니다. 그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저는 그 길이 자유의 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여 길 잃고도 길 잃은 줄 모르고, 길 밖에 있으면서 길 안에 있는 줄 알고, 자기가 길 만들어서 하나님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다면, 주여, 주께서 은총을 내리시어 눈을 밝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저는 이런 살아있는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서도 동물의 왕국, 인간시대 같은 난픽션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물론 TV에서 사실적인 것이라 해도 선택되고 편집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관념적인 것보다는 살아있는 실재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설교말씀도 실재 있는 일을 말할 때 더 감동이 됩니다. 얼마 전 말씀 증거 하신 분도 전도서의 일인칭 증언이 감동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서 자기 고백적 증언은 공감도 잘 되고, 평신도 교회에도 어울리는 형식이 아닐까하는 생각합니다. 설교라는 말 대신 말씀증거라는 말을 우리가 쓰는 것도 이런 의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저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일찍이 칼 바르트도 한손에는 성경, 또 한손에는 신문이란 말을 하였고, 나아가서 돌아가신 서남동 목사님은 삶이 오히려 텍스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실재 예수라는 사람을 세상에 보내어 진리를 증거 하셨고, 우리도 예수님이 살았던 모습을 통해 실재성을 더욱 느낍니다.
저는 신앙의 넓이는 물론 깊이도 없습니다. 성서를 끝까지 한번도 차분하게 읽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서말씀을 통전적으로 해석할 능력은 물론 없습니다. 30년 전부터 깊이 빠져서 끝까지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창세기에서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등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좀 부끄럽고 위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에는 성서를 몇 번을 읽어야 천국 간다는 말 없고, 오히려 세리와 바리세인 등의 예를 들면서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에 약간의 위로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성서를 열심히 읽지 않은 것은 물론 저의 게으름과 부족한 신심 때문이겠지만 굳이 변명을 한다면 제가 성서를 처음 접했을 때, 경전치고는 참 쉽다고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대체로 잘 이해되었습니다. 또 왜 쉽게 기술되어있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고매한 이론서라기보다는 실천서 같이 제에게는 느껴졌습니다.
저는 전번 말씀 증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교를 접한 지 한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믿지 않았을 때와 믿고 난 이후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저는 예수교 득을 확실히 보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교를 통해 저는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했고, 세상의 원리를 이해했습니다. 믿기 전에 비해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나름대로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했을 때, 저는 움직이지 않는 길은 움직이는 생명을 위해 있고, 생명은 그 자체가 길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말씀은 교조적이지 않아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저를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외줄기 길도 아니고,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히 열려있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길 없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명료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보면, 우리하고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교육기관 같은 데서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교육시킨 것도 아니고, 삶의 현장 속에서 몸소 사시면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길도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라는 그런 도와는 좀 다르게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길은 오늘날과 달랐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도회지 말고는 길이 대체로 험했을 것 같습니다. 잘못 들어서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막의 길도 있었을 것이고 강도가 나타나는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은 경우에 따라 생명과 직결되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서, 요한복음 14장 5절 뒷부분에서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도마가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목적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길을 알 수 있겠느냐는 그런 물음인 것 같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은 수단이요, 장애가 됩니다. 인류 문명사는 이런 장애를 줄여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의 길은 그 자체가 목적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은 길 위에서 걷든지 쉬든지 죽든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정말 자유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는 성서가 쉽게 느껴졌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말씀은 어려웠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랜드 디자인을 하신 하나님의 분신답지 않게 편협하고 종파적인 분 같이 느껴졌습니다.
평시 제가 가지고 있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공유코드는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다’라는 생각에 혼란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한히 열려 있는 길이 아니라 바둑의 외통수 길 같았습니다. 자유의 길이 아니라 구속의 길 같았습니다. 안 그래도 종파, 교파 때문에 동네 시끄러운데 이런 것은 속으로 생각하시지 꼭 겉으로 드러내셔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네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목사님께 이 구절을 물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 가지고는 안 된다’라는 의미가 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의 길은 넓어졌고 자유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 때 바리세파 사람들은 구획정리를 하고 몇 개의 길을 만들어 놓고는 ‘이 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너의 길은 무한하다’ 하시며 새 길을 내셨습니다. 아니 새길이 아니라 본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새길이 이 길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야 움직이는 것들을 위할 수 있습니다. 새길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아서 제가 정대현 선생님께 ‘길교회’라든가 아니면 ‘그 길 교회’지 왜 ‘새길’입니까?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처럼 좀 잘해보자 뭐 이런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은 ‘말 그대로 뭐 쉽게 생각해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제가 말하고도 괜히 제가 말 만들어 말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요즈음 종교를 넓게 보다 생각하면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정상은 하나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려오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한 곳 바다에서 만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의 가족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미션스쿨에 오래 계셨지만, 공자, 노자, 장자를 좋아하시고, 요즘도 새벽에 향교에 가서 공부하십니다. 어머니는 불교시고, 그리고 저희 형제 5남매는 모두 예수교입니다. 위에 누님 두 분 계시고 아래에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데, 여동생, 매제는 목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조금 덜한 편인데 전에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서도 종교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우선 바로 위 누님과 바로 아래 여동생은 좀 극성인 편입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앞에 앉혀놓고 몇 시간씩 예수 믿어야 된다고 설득합니다. 어머님은 난처해하시면서 ‘오냐 알았다, 알았다. 너희들이 하나님 믿어서 나는 좋다. 하나님께 기도 많이 해다오.’ 라는 말씀만 간간히 하십니다. 저는 뒤에서 보고 있으면 종교를 떠나서 안쓰럽고, 어머님이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좀 하시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즐거운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화살이 저에게 날아옵니다. ‘장남인 네가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으로 인도해야지, 네가 맨 날 희미하게 신앙생활을 하니까 엄마 아버지가 교회에 안가시잖아’라면서 원망을 합니다. 저는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사실 부모님이 예수를 잘 믿고 편안히 돌아가시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같이 사는 백주희에게도 가끔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믿음이 약해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다른 형제들이 없을 때는 어머니께 살며시 ‘어머님, 공덕으로 제가 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버님하고는 가끔씩 호쾌한 장자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면 두 분은 좋아하십니다. 저는 두 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당신들을 이해 해 주니까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좋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큰애가 믿고 있는 예수교는 서로 서로 위해주는 것이 종교보다 먼저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이를 때는,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갈래의 길이 하나 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하고 김재준 목사님과 그의 아버님과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앞의 마태, 마가, 누가가 예수님 언행 중심의 기술인데 비추어 영적, 해석적 의미가 있어서 앞에 것 보다는 좀 어렵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내에서도 제자들이 잘 모르겠다고 예수님께 묻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절 앞에 있는 5절에서도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과 길을 잘 모르겠다고 했고 뒤에 나오는 8절 9절에서 빌립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물어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대체로 ‘내 사는 것 보면 모르겠냐 내가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하고 답하십니다. 오늘 성서 4절에서도 ‘내가 가는 곳으로 가는 길을 너희는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7절에서도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큰 길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세상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았고 새들도 살았습니다. 구름도 흘렀고, 바람도 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길이 이미 있었습니다.
2000년 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길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처림 밥도 먹고, 술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다 이루었다하고 편히 죽었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삶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리고 다마스커스의 길 위에서도 여전히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의 모든 삶이 길이었음을 길 되고 있음을 성서의 기자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은 지금 우리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류상태 형제님도 자연, 양심, 성서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나오고, 컴퓨터가 나와도 변하지 않는 그 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교도 종파도 없던 한점 막힐 곳 없는 그 태초의 하나님의 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저 우주에서도 세포 속에서도, 교회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있고 싶습니다. 그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저는 그 길이 자유의 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여 길 잃고도 길 잃은 줄 모르고, 길 밖에 있으면서 길 안에 있는 줄 알고, 자기가 길 만들어서 하나님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다면, 주여, 주께서 은총을 내리시어 눈을 밝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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