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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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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6.4.16주일설교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십자가 형틀에 못박혀서 너무나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습니다(Passion of Christ 보신 분들 상상이 가시겠지요. 사실 저는 안 봤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신은 삼베로 감싸진 채 골고다 언덕에 있던 바위굴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새벽 예수의 무덤을 찾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이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갔다고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여러 여인들이 시신에 향유를 뿌리기 위해 함께 갔다합니다. 그들은 입구를 막은 큰 돌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 걱정을 하면서 무덤으로 올라갔고,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경험을 합니다.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고 무덤에는 예수의 시신이 없습니다. 무덤이 빈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제자에게 이를 알렸다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무덤에 와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데 요한복음 기자는 친절하게도 그들이 아직 “예수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무덤밖에 울다가 천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여인들이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합니다. 분명 천사는 “두려워 말라 그는 살아나셨다” 라고 말하였는데도 그들은 무덤에서 도망쳤고,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천사들이 “사흘 째 살아나시리라고 한 예수의 말을 기억하라”고까지 여인들에게 말하지만 제자들, 여인들 모두 믿지 못하고 이상히 여길 뿐입니다.
죽은 예수는 무덤에 삼베에 쌓인 시신으로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이틀 전 시신을 안치한 무덤이 비었을 때 상식적 반응은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구나 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그날 새벽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이것입니다.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구나.’ 천사는 분명 그가 살아나셨다고 하지만, 예수는 성경말씀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이미 그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빈 무덤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넋을 잃고 그리고 이상히 여길 뿐입니다.
마태복음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가 죽고 난 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또 모의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기억한 자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 청해서 무덤을 봉하고 경비병으로 지키게 합니다. 혹 그 무리들이 시신을 훔치고는 살아났다고 하면 큰일이라고 하면서요. 그리고 무덤에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후 그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예수의 시신을 그 제자들이 훔쳐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때까지 유대인에게 퍼진 것이라고 전합니다.
예수 부활의 첫 소식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 그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시신을 누군가가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 무덤 앞에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조차 누가 시신을 훔쳐갔느냐고 반응하고, 또 다른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빈 무덤 앞에서 예수를 따랐던 자들, 예수를 믿었던 자들은 사실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 없던 자들, 예수를 배척했던 자들만이 그 말씀을 기억하고, 헛소문을 유포하여 믿음을 흔들리게 하려 할 뿐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조롱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온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살아나면 정말 굉장했을 텐데, 예수는 어이없이 빈 무덤을 남겨 놓음으로써 오히려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간 것이라는 소문의 진원지가 됩니다. 이제껏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없는데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은 이가 살아난다면 정말 그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믿게 하는 좋은 방법이었을 텐데 오히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방법으로 부활하십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지, 정말 죽은 육신이 숨을 다시 쉬고, 멈춘 심장이 박동치는 그런 것일까? 이곳저곳 축지법 쓰듯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까 아마 영만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우리의 머리는 상상하고 설명하여 이해하려 애씁니다. 마치 증명이라고 해야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는 것인 양 말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 소식은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설명을 넘어서는 기억과 겸손의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빈 무덤 앞에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왜 무덤이 비었는지,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났는지 납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 그리고 그 약속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믿음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이 부활 아침 빈 무덤 소식 앞에서 당황하고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활을 부정하려 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겸손히 그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그보다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누리길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리고 이틀 후 새벽 예수의 무덤을 찾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이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갔다고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여러 여인들이 시신에 향유를 뿌리기 위해 함께 갔다합니다. 그들은 입구를 막은 큰 돌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 걱정을 하면서 무덤으로 올라갔고,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경험을 합니다.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고 무덤에는 예수의 시신이 없습니다. 무덤이 빈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제자에게 이를 알렸다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무덤에 와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데 요한복음 기자는 친절하게도 그들이 아직 “예수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무덤밖에 울다가 천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여인들이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합니다. 분명 천사는 “두려워 말라 그는 살아나셨다” 라고 말하였는데도 그들은 무덤에서 도망쳤고,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천사들이 “사흘 째 살아나시리라고 한 예수의 말을 기억하라”고까지 여인들에게 말하지만 제자들, 여인들 모두 믿지 못하고 이상히 여길 뿐입니다.
죽은 예수는 무덤에 삼베에 쌓인 시신으로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이틀 전 시신을 안치한 무덤이 비었을 때 상식적 반응은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구나 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그날 새벽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이것입니다.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구나.’ 천사는 분명 그가 살아나셨다고 하지만, 예수는 성경말씀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이미 그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빈 무덤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넋을 잃고 그리고 이상히 여길 뿐입니다.
마태복음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가 죽고 난 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또 모의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기억한 자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 청해서 무덤을 봉하고 경비병으로 지키게 합니다. 혹 그 무리들이 시신을 훔치고는 살아났다고 하면 큰일이라고 하면서요. 그리고 무덤에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후 그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예수의 시신을 그 제자들이 훔쳐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때까지 유대인에게 퍼진 것이라고 전합니다.
예수 부활의 첫 소식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 그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시신을 누군가가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 무덤 앞에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조차 누가 시신을 훔쳐갔느냐고 반응하고, 또 다른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빈 무덤 앞에서 예수를 따랐던 자들, 예수를 믿었던 자들은 사실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 없던 자들, 예수를 배척했던 자들만이 그 말씀을 기억하고, 헛소문을 유포하여 믿음을 흔들리게 하려 할 뿐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조롱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온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살아나면 정말 굉장했을 텐데, 예수는 어이없이 빈 무덤을 남겨 놓음으로써 오히려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간 것이라는 소문의 진원지가 됩니다. 이제껏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없는데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은 이가 살아난다면 정말 그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믿게 하는 좋은 방법이었을 텐데 오히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방법으로 부활하십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지, 정말 죽은 육신이 숨을 다시 쉬고, 멈춘 심장이 박동치는 그런 것일까? 이곳저곳 축지법 쓰듯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까 아마 영만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우리의 머리는 상상하고 설명하여 이해하려 애씁니다. 마치 증명이라고 해야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는 것인 양 말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 소식은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설명을 넘어서는 기억과 겸손의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빈 무덤 앞에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왜 무덤이 비었는지,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났는지 납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 그리고 그 약속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믿음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이 부활 아침 빈 무덤 소식 앞에서 당황하고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활을 부정하려 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겸손히 그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그보다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누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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