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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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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중석 목사 |
참고 : | 연세대학교 대학원장, 신학과 교수/새길교회 2006.7.9주일설교 |
흔히 ‘3D 업종’은 사람들이 가능하면 기피하려는 직업군을 뜻해왔다.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이다. 요즘은 ‘신 3D 업종’이 생겼는데, 이 업종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Digital, Design, DNA를 바로 신 3D라 한다. 이 중에서도 DNA 분야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요한복음에도 이 DNA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는 구절들이 나온다. 우선 크리스천이란 어떠한 사람들인가? 크리스천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 설명은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칭(요 1:12)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1:13)이라는 명칭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너무 흔히 사용되어 이제는 거의 무감각하게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해 주는 감격적인 뜻을 담고 있다. 저 아이들은 홍길동의 자녀이다 하면 그 아이들은 홍길동의 DNA, 곧 홍길동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홍길동과 외모는 물론 생각과 성격과 마음까지 닮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DNA를 가진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요한복음서는 하나님을 독특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신성을 갖고 태어난 자란 뜻이 된다. 따라서 요한의 예수는 예배하는 자는 영적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24). 더 나아가 예수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라”(6:63)고 선포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영적 삶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크리스천이 지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DNA를 잊지 말고 잘 간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라는 두 명칭은 서로 유사하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결과로서 신자들의 현재의 지위를 좀 더 강조하고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은 신자들의 신적인 기원을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두 명칭은 모두 신자들을, 그 기원이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의식의 견지에서 볼 때, 신성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우리가 신성을 향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육을 향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영성은 하늘을 향한 우리와 우리를 향한 하늘이 하나가 될 때 그 깊이가 더해질 것이다.
우선, 지상에서 신성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언어의 한계, 언어의 허구를 깊이 인지해야한다. 물이라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내 갈증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말과 하나님은 다르다.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말을 경계해야 한다. 신성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 말은 하나의 벽이다. 말이 떨어져 나가야 신성이 확대된다. 오죽하면 예수도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경계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DNA는 참다운 기도 속에서 유지된다. 어떤 욕망의 외침이나 하나님과의 거래는 기도의 본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성급한 기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참다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더 많이 채워달라는 외침은 참다운 기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 저급한 기도보다는 묵도를 추천하고 싶다. 묵도는 우리의 육에 관한 돌들과 잡초들을 제거하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DNA의 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좋은 마음의 토양을 만드는 작업이다.
신자들이 소망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말을 계속해서 쏟아내는 한, 결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에 관한 이론과 학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DNA를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 신성과 신성은 하나로 쉽게 합쳐지기 때문이다.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가 된 그 속에 포괄되는 것이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예수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22)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가슴 설레는 축복이 아닌가? 사실 요한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을 작은 “신들”로 인식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이라 하셨거든….” “신들”이라는 칭호는 요한교회의 자기규정을 암시하고 있다. 그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작은 “신들”로 간주한다. 천상의 예수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믿은 이후, 그들은 이러한 “신들”로서의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였던 것같이(17:8),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신들”이다(10:35). 모든 정신력을 영적으로 집중할 때만이 신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요한이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다른 자질구레한 모든 항목들은 이 소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신성을 잠재우려하는 어떠한 종교적인 시도들도 단호히 거부해 나가시기 바란다. 여러분 속에 있는 성화를 억압하여 가정용 화롯불로 만들려는 주변의 이런 저런 유혹들로부터 과감히 등을 돌리시기 바란다.
예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를 보면 하나님이 연상되듯, 우리를 보면 사람들이 신성한 분위기를 감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주로 무엇을 연상한다고 하는가? 너만 보면 세상 살 맛 난다 하는가, 아니면 너만 보면 밥맛이다 하는가?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무엇을 연상하기를 바라는가? 너를 보면 신성한 기운을 느낀다. 이래야 크리스천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종교에서는 강을 건넌 후에 뗏목을 버리라고 한다. 그렇다. 아주 어릴 적에는 그런 시도도 한번 해볼만 하다. 그러나 장성한 신자에게는 그 역시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애당초 건너야할 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은 신들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영 쪽이 아니라 육 쪽으로 얼굴을 돌리려 한다면 하나님이 부여한 신적 DNA를 스스로 거부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친구가 없어서 인간에게 자신의 DNA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로 삼은 것 같다. 자신 속에 영성이 메마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발은 땅을 딛고 있어도 머리는 항시 하늘을 향하고 있는 나무처럼, 우리도 비록 땅에서 있으나 항시 하늘을 향해 하나님과 신성을 교감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그 영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요한복음에도 이 DNA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는 구절들이 나온다. 우선 크리스천이란 어떠한 사람들인가? 크리스천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 설명은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칭(요 1:12)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1:13)이라는 명칭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너무 흔히 사용되어 이제는 거의 무감각하게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해 주는 감격적인 뜻을 담고 있다. 저 아이들은 홍길동의 자녀이다 하면 그 아이들은 홍길동의 DNA, 곧 홍길동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홍길동과 외모는 물론 생각과 성격과 마음까지 닮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DNA를 가진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요한복음서는 하나님을 독특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신성을 갖고 태어난 자란 뜻이 된다. 따라서 요한의 예수는 예배하는 자는 영적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24). 더 나아가 예수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라”(6:63)고 선포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영적 삶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크리스천이 지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DNA를 잊지 말고 잘 간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라는 두 명칭은 서로 유사하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결과로서 신자들의 현재의 지위를 좀 더 강조하고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은 신자들의 신적인 기원을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두 명칭은 모두 신자들을, 그 기원이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의식의 견지에서 볼 때, 신성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우리가 신성을 향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육을 향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영성은 하늘을 향한 우리와 우리를 향한 하늘이 하나가 될 때 그 깊이가 더해질 것이다.
우선, 지상에서 신성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언어의 한계, 언어의 허구를 깊이 인지해야한다. 물이라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내 갈증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말과 하나님은 다르다.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말을 경계해야 한다. 신성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 말은 하나의 벽이다. 말이 떨어져 나가야 신성이 확대된다. 오죽하면 예수도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경계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DNA는 참다운 기도 속에서 유지된다. 어떤 욕망의 외침이나 하나님과의 거래는 기도의 본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성급한 기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참다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더 많이 채워달라는 외침은 참다운 기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 저급한 기도보다는 묵도를 추천하고 싶다. 묵도는 우리의 육에 관한 돌들과 잡초들을 제거하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DNA의 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좋은 마음의 토양을 만드는 작업이다.
신자들이 소망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말을 계속해서 쏟아내는 한, 결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에 관한 이론과 학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DNA를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 신성과 신성은 하나로 쉽게 합쳐지기 때문이다.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가 된 그 속에 포괄되는 것이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예수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22)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가슴 설레는 축복이 아닌가? 사실 요한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을 작은 “신들”로 인식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이라 하셨거든….” “신들”이라는 칭호는 요한교회의 자기규정을 암시하고 있다. 그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작은 “신들”로 간주한다. 천상의 예수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믿은 이후, 그들은 이러한 “신들”로서의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였던 것같이(17:8),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신들”이다(10:35). 모든 정신력을 영적으로 집중할 때만이 신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요한이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다른 자질구레한 모든 항목들은 이 소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신성을 잠재우려하는 어떠한 종교적인 시도들도 단호히 거부해 나가시기 바란다. 여러분 속에 있는 성화를 억압하여 가정용 화롯불로 만들려는 주변의 이런 저런 유혹들로부터 과감히 등을 돌리시기 바란다.
예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를 보면 하나님이 연상되듯, 우리를 보면 사람들이 신성한 분위기를 감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주로 무엇을 연상한다고 하는가? 너만 보면 세상 살 맛 난다 하는가, 아니면 너만 보면 밥맛이다 하는가?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무엇을 연상하기를 바라는가? 너를 보면 신성한 기운을 느낀다. 이래야 크리스천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종교에서는 강을 건넌 후에 뗏목을 버리라고 한다. 그렇다. 아주 어릴 적에는 그런 시도도 한번 해볼만 하다. 그러나 장성한 신자에게는 그 역시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애당초 건너야할 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은 신들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영 쪽이 아니라 육 쪽으로 얼굴을 돌리려 한다면 하나님이 부여한 신적 DNA를 스스로 거부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친구가 없어서 인간에게 자신의 DNA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로 삼은 것 같다. 자신 속에 영성이 메마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발은 땅을 딛고 있어도 머리는 항시 하늘을 향하고 있는 나무처럼, 우리도 비록 땅에서 있으나 항시 하늘을 향해 하나님과 신성을 교감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그 영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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