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9:24-34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03.8. 31 |
시력을 되찾은 사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다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 놓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하고 말하였다(24절). 이 짧막한 한 구절에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유다인들이 왜 시각장애인을 불러 놓고 이렇듯 윽박지르는 듯한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 전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9장 1절부터 나오는데 예외적으로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길을 가는 중에 선천성 장애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서, 또는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을 죄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런 차원에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차원을 달리 했습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3-5절).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곧 그의 장애를 고치셨습니다.
이 사건을 접한 동네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못 보던 사람이 갑자기 멀쩡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만으로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고 보았는지, 이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서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한쪽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걸 트집 잡아서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며, 다른 한쪽은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이 사람이 원래 선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이었다가 다시 보게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을 불러내서 이게 사실이냐고 확인했습니다. 그 부모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한 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소극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가 원래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우리 아들인 것만은 확실하고, 그리고 지금 볼 수 있게 된 것도 확실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우리 아들도 성년이 되었으니 직접 물어 보라.
대충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칫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밉보이면 그 사회로부터 따돌림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사실만 말했습니다. 부도들로부터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이 유대인들은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시력을 되찾은 이 사람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 첫 마디가 바로 24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더 그 말씀을 찬찬히 읽어봅시다.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자기 독단
사실대로 말하라는 이 첫 마디는 흡사 검사가 피의자에게 하는 듯한 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위협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은 자기들은 이미 사실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아마 회당의 여러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대표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모세의 법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진리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개역성경과 마틴 루터 성경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나 비슷한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대로 볼 줄 알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곧 진리이며, 그런 진리의 드러남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이 말에도 역시 말하는 자의 자기 확신이 엿보입니다. 자신들은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자부심 말입니다. 시각을 되찾은 이 사람들은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내세우지만 본심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서 진리를 규정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진리에 대한 독단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이미 자신들이 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대로', 또는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면서 예수라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단언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이 사실의 실체를 알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그의 가르침과 행위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가 안식일을 그들의 율법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문제를 만드시는 걸까요? 약간만 융통성이 있었다면 다음 날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율법에 목숨을 걸고 있는 유대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마당에 안식이라니요. 제가 예수님의 생각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단지 이렇게만 추정해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안일을 위해서 좌고우면 하지 않는 분이셨다고 말입니다. 기존 질서를 무조건 무시하는 분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절대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하신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어쨌든지 이게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결정적으로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깎아 내린 그 행동 말입니다.
요즘도 거의 비슷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별 것 아니라고 말하면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변호사, 의사, 교수 자리, 목사직이 별 거 아니라고 말하면 당사자들은 기분 나빠합니다. 자식의 출세나 돈이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니라고 말하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든지 화를 냅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자기가 이루어놓은 업적에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이룬 게 많을수록 자신 속에 빠지게 됨으로써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비뚤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이었든지 세속적인 차원이었든지 자기 속에 갇힌 사람들은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율)법의 절대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한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을 비뚤게 보는 이들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단한 것만큼 결정인 오류는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아무 교묘한 말로 예수님의 범죄행위를 기정 사실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비열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데서 그들의 비뚤은 시각이 나타납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모든 세계를 규정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8절에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큰소리를 내듯이 인간의 행동을 규정할 수 있는 법을 자신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고정된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단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전통이고 경험이고, 그것에 의한 그들의 확신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은 우리 종교적 삶에 질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만약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면 민족적 모든 정체성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은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갱신의 길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만큼 율법은 유대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예수님도 그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놓여있는 문제는 율법을 율법의 범주에 제한시키지 못하고 그것을 절대화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법은 그것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명의 세계를 일구어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은총과 사랑의 질서가 다가오면 늘 물러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율법은 은총을 담아내야 할 그릇이며 본질을 간직해야 할 형식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은총과 본질을 외면한 채 그 형식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결국 은총과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법과 사랑의 변증법적 관계를 아주 예민하게 작동시키지 않게 되면 결국 이 세상을 비뚤게 보게 됩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우리의 '보안법'을 개정하거나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이 '보안법'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제가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법이니까 생겼겠지요.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개정 내지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주장이 옳은지는 일단 접어두고 '보안법'도 역시 이 나라를 지탱해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만약 기계적인 방식으로 적용된다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쪽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법도 역시 계속해서 은총과 사랑의 힘이라는 법의 본질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 중간에 벌어진 해프닝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시민 단체에서 반북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것을 본 북한 기자들이 거칠게 항의함으로써 북한 선수단이 철수하느니 않느니 말이 많았습니다. 이 나라 안에서 북한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순수한 젊은이들의 스포츠 행사 한 복판에서 그렇게 정치적인 색깔이 농후한 기자 회견을 연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미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있기 전에도 인공기 소각 사건 등으로 인해서 상당히 예민해 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행태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처럼 자신들의 독단적 판단을 절대화함으로써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세상 비뚤게 보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이런 일련이 사건에 연루된 분들이 모두 비상식적이거나 광신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소한 자기의 생각에 빠져서 세상을 정확하게 바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인공기를 불태우거나 스포츠 행사장 앞에서 반북 기자회견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목사라고 하는군요.
바로보기
시각장애인이었던 이 사람은 율법 지상주의에 빠짐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사건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엘리트요 지도자요 여론 주도층이었던 반면에 우리의 주인공인 이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적을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동냥을 얻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를 말입니다. 요한에 의해서 어느 정도 편집된 부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첫 번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25). 신학적인 문제는 잘 모르지만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만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문제를 걸고 넘어가면서 예수님에게 일어한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이 사람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유대인들은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했소?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했단 말이요? 눈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으니까 예수가 무슨 마술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의도로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이야기를 벌 써 해드렸는데 그 때에는 듣지도 않더니 왜 다시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27). 이 사람의 단순한 머리로는 복선이 깔린 이 유대인들의 질문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마 설명한 것을 다시 하라고 하는 걸 보면 예수님에게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제자가 되려는가?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속내를 드러나는 것 같아서 움찔했을 것입니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아무에게도 도전 받지 않을 모세의 권위로 숨습니다.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른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의 그럴듯한 말입니다. 아무도 모세의 권위를 넘볼 수 없습니다. 요즘도 툭 하면 법이나 권력을 들먹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말에도 주눅이 들지 않은 이 사람은 이 유대인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33).
시각장애인이었던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배움도 짧고 세상 경험도 없었던, 한평생 어둠 속에서만 살아왔던 이 사람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이 많이 받은 사람보다 본질을 훨씬 잘 파악하는 일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는 걸까요? 교육은 모자랄수록 좋다는 뜻입니까?
교육의 본질은 사물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교육은 말 그대로 계몽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의 근본이 망각된, 그래서 일종의 정보를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교육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능력을 훼손시킵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만들뿐입니다. 신앙교육도 역시 그렇습니다. 잘못된 신앙교육은 사람을 오히려 파괴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단이라고 부르는 그 행태에서 극단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생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교주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실제로 영생한다고 믿습니다. 정통 교회에서도 약간 강도가 약할 뿐이지 이런 잘못된 교육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세부항목까지 꿰뚫을 정도로 공부가 깊었지만 결국은 그 공부가 오히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아주 평범했습니다. 그냥 자기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이 사람에게 가능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속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자기의 업적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힘이 빠져 있는 상태일 때만 사물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 스님의 열반송도 역시 이런 뜻입니다.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이 세상을 비뚤게 보는 이 유대인들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34). 그리고 이 사람을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고 합니다. 이들은 늘 사람들을 죄의 시각으로만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하더니 이 사람을 향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났다고 막말을 합니다. 선천적인 장애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는 법으로 죄인을 만들고, 이 사람은 장애인이라는 법으로 죄인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들에게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죄인으로만 보입니다. 세상 사람을 구원해야겠다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들이 설정한 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이며 불평이며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유대민족을 사랑하셔서 모세를 통해서 준 율법이 결국 이렇게 망가졌습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체제와 법과 교육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근본을 잃으면 결국 이 세상을 비뚤게 보도록 사람을 망칩니다.
오늘 본문에 이은 단락을 보면, 회당에서 쫓겨난 이 사람은 다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 실체를 인식하고 믿게 됩니다. 반면에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41). 우리의 중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워 두어야 삶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8월31일>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