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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2063 추천 수 0 2008.10.22 20: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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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4:2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6월 15일 주일2부설교 
일시 : 2003년 6월 15일 주일2부설교
제목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설교 : 조 용 기 목사
성구 :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서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담의 반역과 타락 이후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에 들어갔고 마귀는 죄악과 탐욕과 여러 가지 욕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죄악과 탐욕이 있는 이상 이세상은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역사는 마귀가 일으키는 죄악과 탐욕의 폭풍에 휩쓸려 살인적인 생존경쟁과 전쟁과 약육강식의 사투속에 지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현 인류 역사가 존속하는 이상 지구상의 물리적인 평화는 결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와 혼돈속에서도 우린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고 살수 있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환경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풍랑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풍랑이 대적하였으나 천지를 뒤덮는 파도속에서도 예수님은 뱃속에서 주무셨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의 경험이나 지각을 뛰어넘는 평안을 주님께선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1. 평안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다
첫째, 평안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알아야 되겠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화는 절대로 없습니다. 인류의 첫 두려움과 불안을 체험한 자는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때는 불안이나 공포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평안과 안식과 기쁨만 넘쳤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9절로 10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처음 두려움을 체험했습니다 언제 두려움을 체험했는가 하면 범죄하고 하나님을 낮을 피해 동산 나무뒤에 숨었을 때 하나님 음성을 듣고 불안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처음 느끼는 불안과 공포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숨자 불안과 공포가 아담에게 다가온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을때는 불안과 공포란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는 하나님께로 쫓겨나고 쫓겨난 인생은 또 끊임없이 그의 삶속에 죄와 마귀와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쫓기며 살게 되니깐 평안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쫓겨나고 계속해서 쫓기면서 도망치는 삶속에 평안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갈길을 잃어버려 자기를 놓쳐버리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아무리 어린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고 멋있는 모자를 쓰고 양손에 먹을 과자를 잔뜩 쥐고 있더라도 깊은 산속에 수풀속에 길을 잃어 버렸다면 그리고 해는 뉘엇늬엇 져가고 어둠이 다가오는데 그 마음속에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고 좋은 모자를 쓰고 손에 맛있는 과자를 잔뜩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해는 져가고 어둠은 다가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할지 저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자기를 잃어버린 그 어린 아이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난 다음 존재가 불안하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자기의 정체를 알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다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을때는 정체불명의 사람입니다. 어디서 왔느냐? 알수가 없어요. 어디로 가느냐? 몰라요. 왜 사느냐? 몰라요. 정체불명의 존재입니다. 정체성 상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인간은 존재적으로 불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인도의 민속 예화를 보면 밤낮 쥐가 벌벌벌~ 떨고 있거든 이예 요술쟁이가 보고 “너무 불쌍하다 너 왜떠니?” “언제나 고양이가 날 잡아 먹을까 싶어서 떨고 있다” 좋다,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젠 마음이 평안하지? 또 벌벌벌 떨고 있습니다 “야 임마 쥐때에는 고양이 때문에 벌벌 떨고 있엇는데 이제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더니 왜 떠느냐?” “ 개가 물을까 싶어서 겁이 났습니다.그래 그럼 또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개가 꼬리를 뱃속에 넣고 벌벌벌 떨고 있습니다 야 임마 개로 만들어 줬는데 왜떠냐? 호랑이가 잡아 먹을까 싶어서 겁이 났습니다. 그래 또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호랑이도 늘 눈치보고 벌벌벌 떨면서 산속에 이렇게 왔다갔다..야 임마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는데 왜 떠냐 사냥꾼이 언제 총을 쏠지 모르기 때문에 겁이 납니다 . 야 이판저판 사판이다.에라 쥐로 돌아가거라 도로 쥐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어도 불안하다는 것입니다.인간은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난 다음에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결코 인간속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편 91편 1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아래 거하기 전에는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적으로 끊없는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요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하여 창조하셨나이다 오 주여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당신안에서 언식을 얻기 까지는 쉬지 못하나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품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마음에 평안 없다“ 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부둣가에 설연히 서있는데 바람이 막 부는데 갑자기 새 한 마리가 총알같이 날라오더니만 갑자기 품안에 싹 들어가버리더래요 이런 일이 어디 있느냐 새가 어떻게 바다에서 내 품안에 들어오느냐 그 뒤에 보니깐 바다 매 한 마리가 쏜살같이 쫗아 오다가 자기 옆에서 휙 날라서 공중에 빙글빙글 날라갔습니다 옷을 들쳐보니깐 새가 숨을 팔딱팔딱 하면서 딱 셔츠 주머니에 발로 딱잡고 매달려 있더래요 그래서 그 선언이 새를 쓰다듬으면서 야 이놈아 니가 내품에 숨어 있기에 저 매에게서 살았다. 그냥 있으면 잡혀 죽었으니 이젠 평안이 가라고 새를 잡아서 나주었다고 그 이야기를 읽어 본적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자의 품에 숨을 때 비로서 평안할 수가 있지 숨을 곳이 없으면 평안하지 않지요 그럼 우린 누구에게 피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비로서 평안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을 통해서 난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인침을 받아서 하나님 내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 이름하에서 살게 되면 피난처 있습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자 이리오게 라고 한 말씀대로 이제는 하나님 품에 피할 수가 있습니다. 꿇어 엎드려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 하나님 소유물이 되었으니 평안하잖아요.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도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되어야 비로서 하나님께 의지할수 있고 마음의 평안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고 장래에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안이상 그 하나님 품속에 우리가 안기면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청해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인생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와서 나와 화목하라 그리고 내 품안에 돌아오라고 오늘날도 청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20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죄에 송두리 속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죄가 용서함 받고 마귀의 발톱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천지과 만물을 지으시고 영존하시는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휴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없는 곳에 평화가 없습니다. 겔 브레이스라는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2차 대전이후 현대 인간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차 대전이후로 오늘날 와서 어디를 봐도 불확실해, 하나도 확실하고 안전한 곳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찾아볼수가 없는 것입니다.모든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때 비로서 평안을 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항상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하며 고백하라
둘째로, 우리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입술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건지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고 고백해야 됩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릴 건지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그러고 그 하나님을 마음속에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러고 믿고 하나님이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강하게 입술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2절로 3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고 입술로 고백을 해야 됩니다 저는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 이들은 6.25전쟁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전쟁을 무슨 테레비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생각하고 스릴을 느낄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6.25의 전쟁을 겪은 노세대들은 6.25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어마어마하고 끔직한 전쟁입니다. 공산당이라고 생각만해도 몸서리칩니다, 공산당이 가지온 6.25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파탄이 일어났습니다. 군관민 3500만명 사상자가 일어났고 온 광토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이름으로 중동노동자들이 타고오는 칼 비행기를 격파시켜서 처참하게 살해 했습니다 공산당의 이름으로 아웅산에서 우리 정부의 각료들을 폭파해서 다 죽였습니다. 공산당.!! 꿈에도 생각하기 싫습니다 공산당이라면 이가 갈립니다. 이는 공산당이 한국에 합법화되어야 민주주의가 되어야 된다! 그 말 여러분 용납할수 있습니까? 학자는 그렇게 말할수 있어요 철학자는 이상적으로 그런말 할수 있어요. 현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런말 할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공산당이라면 치가 떨립니다. 얼마나 처참한 고통을 우리가 겪었습니까. 그때 유일한 피난처가 부산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열차를 타고 열차 꼭대기에 올라 않아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하고 부산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살아남었었습니다. 피난처,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피난처는 오늘날은 있을수가 없어요. 오늘날은 미사일 시대입니다. 부산이고 어디고 피난처가 있을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만군의 야웨의 품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가 된다!.주는 나의 요새다!. 요새란 것은 난공불락의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격해도 공격해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요새입니다. 모든 인간의 성은 다 무너져도 하나님의 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는 나의 요새요, 주는 나의 힘이 되십니다.
시편 18편 1절로 3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화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
그리고 저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우린 고백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나에게 그 아들을 주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일생을 바쳐서 의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격한 염병에서 나를 건지실 것이다. 새사냥꾼이 와서 그물을 쳐서 올무에 잡아넣어서 나를 소요할려고 해도 피하게 해주시고 극한 염병. 형언할수 없는 고통에서도 건져 주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까.
한 부자가 호화롭게 살아도 마음이 늘 불안초조하고 괴로웠습니다.그래서 궁리 끝에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하나 사서 걸어 놓아야겠다고 거액의 상금을 걸어서 마음의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좋은 식당에서 호화로운 음식으로 대접하고 난 다음에 갤러리에 그림구경을 갔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산밑에 호수가 있고 두둥실 흰 구름이 떠 있는 아름다운 평화로운 그림도 있었습니다. 또 시골 마을의 소박하고 평화스러운 전경을 담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소는 긴 낮에 여물을 씹고 있고 닭은 꼬끼오 하고 울고 있는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그 앞에 잠시 섰다가 그냥 지나고 말았습니다.그러나 한 장면은 평화하고는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벼락 안쪽 틈에 가슴 붉은 새 한마리가 둥지를 치고 알을 품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어오면 폭포에 휩싸여 둥지는 천근만근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새의 눈에는 조금도 불안과 공포 없이 그 둥지에서 알을품고 앉아있습니다. 그 부자가 무릎을 탁 치면서 그 그림들 들어 “이거야 이거, 이세상에 환경적인 평화가 있을수가 없지! 폭풍우가 불고 폭포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도 그 가운데 이 하늘하늘한 가지에 둥지를 치고 알을품고 앉아있는 이 새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수 있지 환경의 평화는 있을수 없다.!” 그래서 그 그림을 거액을 주고 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안한 것은 어떠한 우리의 인간이 맞는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개 아래 피할 때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때 우리가 평안을 가질수 있습니다.
시편 91편 4절 ~6절에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사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옛날에 집에서 닭이 알을 까서 병아리를 데리고 정원에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있을때는 잔뜩 흥분해서 날개를 피고서 봅니다. 그런데 개가 근처에 오거나 고양이가 오면 꾸꾹꾹꾹꾹하고 부르면 순식같에 병아리들이 쏜살같이 와서 엄마 날개 밑에 들어오고 어미는 날개를 확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얼마나 사납던지 개나 고양이가 근처에 오지 못합니다. 개나 고양이가 없으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나가서 땅을 파고 벌레들을 먹입니다. 공중에 독수리가 날면 어미가 또 새끼들을 부르면 또 일시에 날개밑으로 옵니다. 한번은 우리 닭장에 불이 났습니다. 아침에 가니깐 다 타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미 닭은 불탔는데 그 날개 밑에 있는 병아리들은 다 살아서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 새끼를 품에 안고 타 죽으면서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주날개 밑 내가 편히 거하네. 주님은 어미 닭처럼 우리를 그 날개로 품으시고 그의 성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밤에 놀래지 않습니다. 이세상에 살면서 밤에 놀램이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밤중에 갑자기 흉한 소식이 들어오면 얼마나 놀랍니까. 밤중에 마음이 준비가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충동적인 살인이나 납치를 당하거나 유괴를 당하는 것이나 우리의 정보가 유출당하거나 카드빛 사기등 요사이 밤에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주 날개 있으면 이런일도 주님이 피하게 해주십니다.
낮에 흐르는 살은 계획적인 모함이나 공격입니다. 이땅에 살면서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얼마나 서로 모함하고 공격합니까? 우리 대통령께서는 신문도 안본다고 그럽니다. 신문만 보면 몸서리가 쳐진다고 합니다. 신문에 하도 비평을 하고 공격을 하기 때문에 신문이 낮에 흐르는 살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은 다른 사람의 염통을 꿰뚫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낮에 흐르는 살 이것을 안보겠다고 일한다고 피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날개 밑에 들어가면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본다고 살이 안날라 오나요. 그 살을 막아 버릴수 있는 주님의 날개 밑에 피해야지요. 흑암중에 행하는 염병입니다. 흑암중에 행하는 염병은 사스(SARS)처럼 원인 모를 재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흑암은 캄캄한 곳에 염병이라는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도저히 원인을 알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유행했던 사스(SARS)도 원인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원인을 알아야 약을 개발하던지 백신을 개발하던지 하는데 사스(SARS)는 원인 모를 병입니다. 중국은 사스로 433명이 죽었고 경제 손실만해도 약 2조원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흑암중에 행하는 염병 무서운 것입니다. 원인 모를 재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휘둥그레지는 것입니다.
이런것도 주님 날개 아래 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가운데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수대교 참사, 1994년 10월 21일 서른 두명이 죽은 성수대교, 출근한다고 버스 타고 가는데 백주에 버스가 내려앉고 다리가 내려갈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백주에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보시면,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고 커피숍에서 차 마시고 음식 먹고 순식간에 백화점에 무너져 내려 앉아버렸습니다 백주에 황폐케한 파멸입니다.
더구나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사건 보십시오. 다 집으로 혹은 직장으로 목적을 향해서 평안히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화를 할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갑자기 불을 붙여가지고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파멸 시켰습니다. 백주에 황페케 하는 파멸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막을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생에 우리가 안심하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안심하고 살수 있는 유일한 곳은 주날개 밖에 없지 않습니까?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페케하는 파멸을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편 91편 7절~12절에 “천 인이 네 곁에서 ,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 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화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딫히지 않게 하리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런 하나님이 내게 계신 것을 마음에 믿고 그리고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내 자신을 늘 바라보고 꿈꾸고 입술로 강하게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안당할때에는 평온할줄 알지만 내가 고난이 다가오고 풍파가 다가오면 여러분께서 이 성경 말씀을 늘 생각하고 입으로 외워야 됩니다. ‘야웨는 나의 파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하니 저가 새상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리로다 오~ 하나님이여 주는 진실로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니 주여 지금 다가오는 이 새사냥꾼의 올무에서과 극한 염병에서 나를 건져 주옵소서 말씀하지 않습니까.나는 말씀을 알고 믿고 꿈꾸고 시인합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주님이시여 주님의 날개로 나를 덮어 주시옵서서 주의 진실함은 방패과 손방패가 됩니다.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중에 행햐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하는 파멸을을 두려워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이 내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 넘어지나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여 믿사오니. 주께서 이 능력으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이 믿고 기도하고 그것을 바라고 꿈꾸고 입으로 시인할때에 여러분을 피난처에 들어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뉴스 평론가인 폴 하빈은 다음과 같은 사건을 보도한 일이 있습니다. 네바다주에 있는 비트리스라는 도시의 웨스트 사이드 침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7시30분에는 성가대 연습이 있기 때문에 대원들은 거의 모두 그 시간에 교회에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결코 전에 없었던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대원 전체가 성가대 연습시간에 좀 늦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피아노 반주하는 자는 저녁을 먹고 너무나 식곤증에 걸려서 잠깐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성가대원인 그의 어머니와 함께 늦을 수밖에 없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한 성가대 여학생은 학교의 급한 숙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늦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 부부는 항상 교회오는 길에 다른 대원들 몇명을 태워서 데리고 오는데 대원들을 태우고 오다가 자동차 엔진이 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다시 고쳐서 오기 때문에 늦어져서 시간에 못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로 이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날 저녁에 18명의 성가대원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늦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7시 반에는 반드시 성가를 연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연습시간 7시 30분까지는 평안했는데 바로 그날 1950년 3월 1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 교회 지하실에 있는 가스 파이프가 세워서 대폭팔이 일어나고 교회 전부가 불타버리는데 성가 연습실이 바로 가스실 위에 있었습니다. 7시 30분에 정시로 모였으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을것인데 어떻게 해서 그날 18명이 한결같이 사건들이 생겨서 못왔습니다. 다 살았습니다.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사건이 생겨도 하나님 뜻인줄 알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발버둥 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이 사람들을 다 피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3. 인간 최후의 공포인 죽음을 해결하신 예수님
셋째로, 인간 최후의 공포는 죽음입니다.
온갖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과학이 입을 다무는 곳이 죽음입니다. 다른데는 지식이 있는 사람, 과학자, 이성주의인 사람, 온갖 이론을 다 말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죽는데 무슨 영웅이 있습니까? 끝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있지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절대 절망, 절대 흑암, 절대 공포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보면 이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이 손썼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 자녀들이 혈육에 속해서 죽기를 두려워하여 벌벌 떠니깐 이 죽음에 공포에서 놓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들과 같이 혈육을 가지고 와서 사망의 세력을 잡을자 마귀와 죽음을 멸하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데 죽음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 확실히 주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친히 죽은자를 살리시므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회당중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들어가서 우는 사람들 다 쫓아내고 그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니 일어났습니다 죽은 딸이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주님이 해결할수 있다는 실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한 동네에 나인성이라는 동네를 행진해 가는데 저쪽에서 상여가 왔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으므로 통곡하고 울고 울고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상여를 중지시켰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횡렬이요 하나는 생명의 횡렬입니다. 죽음의 횡령을 예수님의 횡렬이 중지시켜서 그 관뚜껑을 열어놓고 죽은 청년에게 가서 “청년아 일어나라~!” 어 잠을 너무 오래잤구나. 일어나 버렸습니다. 어떠한 죽음의 횡렬도 생명의 횡렬을 만나면 죽음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에 해답자 인 것입니다. 심지어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납니다. 이건 도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도 무덤의 돌문을 옮겨놓고 난 다음에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시므로 죽은 자가 수의를 동인채 나왔습니다. 이것참 도저히 과학이나 철학이나 이성이나 지식은 입을 다물고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말씀하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2절~20절에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셧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철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자를 살리실뿐아니라 친히 당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라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근심할 것 없어요.
요한복음 14장 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 믿을만 하지 않느냐, 내가 죽은자도 살리고 직접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느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러므로 죽음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영원히 해결해버렸습니다.
안개와 구름을 해쳐 버리듯이 죽음의 문제를 일도양단해서 해결해 버렸습니다 너무나 명쾌하게 해결된 것입니다. 무슨 수양과 도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혈육으로 오셔서 죽음을 잡고 있는 마귀를 없애시고 죽음을 정복해 버리시고 광명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말라” 도무지 근심도 말로 두려워 말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존재적으로 불안합니다. 한가지 불안이 사라지면 항상 다른 불안이 꼬리를 물고 다가옵니다. 불안이 없는 세상은 그 가운데서 살며서 불안을 가질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평안을 가질수 있는 길을 택할수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것입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려 놀라지 말라 내가 어디로 가던지 내 하나님 야웨가 너와함께 하느니라.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불안의 시대고 우리의 존재가 불안한 존재고
현세계가 불확실의 시대인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 마음에 안심을 갖고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 땅에는 풍파가 늘 일고 안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누릴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옵니다.
금세 안심, 내세 평안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믿고 또 믿고 또 더욱 믿을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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