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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것이라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2162 추천 수 0 2008.10.30 08: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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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6:7-15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1996년 / 7월 14일 
설교:다 내것이라
말씀: 요한복음 16 : 7∼15
설교자 이재철 1996년 / 7월 14일

제가 살고 있는 합정동에는 저를 존경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동네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에서 일하는 이발사가 바로 그 장본인인데, 그 사람이 저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 목욕탕에 이발하러 갈 때면 늘 네 명의 아이들이 따라 갑니다. 그리고 제가 이발하는 동안에 아이들은 목욕탕 안에서 기다리면서 놀곤 합니다. 작년에 그 목욕탕으로 새로 오게 된 이발사가 저를 처음 만나던 날,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다 제 아들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순간부터, 그의 눈빛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이발사는 아들 갖기를 열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딸 둘만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거듭 만나면서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제 머리를 깎으면서 심각하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저를 만나면서 용기를 얻었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아이를 갖고픈 마음이 있는데, 자기 나이가 지금 41살이기 때문에 혹 주위 사람들이 주책이라고 욕하지나 않을까 두려운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째 아이를 낳고 싶으면 낳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는 막내 아이를 43살에 얻었다고 하자, 그 순간부터 더 존경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까지 저를 존경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그 사람이 저를 존경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이발하려는 사람이 많았기에, 제가 의자에 앉을 때에는 목욕탕에 들어온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한참 머리를 깎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이 터졌습니다. 소리를 듣는 즉시 제 막내 아이의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한시간 내내 탕안에서 기다려도 아빠가 데리러 오지를 않으니까, 저를 찾아 나오느라 탕문을 열고 뛰어나오다가 자기 몸에서 떨어진 물에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나자빠진 것이었습니다.

제 아이임을 확인은 했지만 머리카락 투성이인 가운을 뒤집어쓰고서 일어날 수 없었고, 또 제 경험상 아이의 울음 소리는 길어도 2-3분이면 끝날 울음이었기에 저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부터 갑자기 이발사가 가위와 빗을 내리더니, `우황청심환, 우황청심환! 응급실, 응급실!'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지를 못하고 이발사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바로 저에게 하는 말임을 알았습니다. 빨리 아이에게 우황청심환 한 알을 먹이고, 병원 응급실로 업고 뛰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발사에게 이제 곧 아이가 일어나서 이쪽으로 올 테니까, 걱정 말고 계속 머리나 깎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큰일날 소리를 하느냐며 저를 나무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가 정말 일어나서 제 옆으로 왔습니다. 이발사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 표정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렇게 넘어진 아이가 자기 발로 걸어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제 곁에 온 아이가 뒤통수를 만지면서 혹이 났다고 합니다. 제가 가운 밑으로 손을 내밀어서 아이의 머리를 만졌더니 정말 큰 밤알 만한 혹이 나있었습니다. 제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을 했습니다.

"너, 용감하게 참을 수 있지?"
아이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침 그때 탕안에서 동생이 보이질 않자 큰 아이가 막내 아이를 찾으러 또 제 곁에 왔습니다. 제가 막내 아이에게,
"너 형아와 함께 탕안으로 가서 다시 놀고 있거라. 아빠가 머리 다 깎고 나면 널 부르러 갈께"
라고 말했더니, 막내 아이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형의 손을 잡고 탕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뒷모습을 이발사가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제게 다시 묻습니다.
"정말 병원 안 데려가도 괜찮습니까?"
제가 괜찮다고 하니까 또 묻습니다.
"평소에 저렇게 넘어져도 언제나 제 혼자 일어나서 걷습니까?"
또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발사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딸아이들이 저렇게 넘어지면, 꼭 우황청심환을 먹이고 병원 응급실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정신이 돌아오곤 합니다. 사내 아이는 역시 틀리군요."
그러더니 다시 한번 더 확인을 합니다.
"정말 병원에 안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제 대답을 들은 이발사는 그래도 미심쩍었는지 탕쪽으로 가서 문을 열더니, 아이가 잘 노는지 확인을 한 다음 제 곁으로 다가와 꾸벅 절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저는 사람에게 존경받기가 그토록 쉬운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제가 네 명의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이발사는 변함없는 존경의 태도로 저를 맞아 주고 있습니다.

그 날밤 그 이발사는 저로 하여금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이발사가 저를 존경할 이유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를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그가 사내아이들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이발사는 그 동안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딸아이의 세계에만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우황청심환이니 응급실이니 하고 법석을 떨었던 것도, 딸아이와 경험한 그 세계가 모두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자신과 그 이발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자기'라는 좁디좁은 우물 속에 갇히어서도 그것이 온 세계라 잘못 알고 있는 우리 자신, 그 협착한 우물 속의 논리로 세상만사를 재단하려는 우리 자신, 하늘이 얼마나 광활한지 알지 못한 채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는 손바닥만한 하늘을 하늘의 모두라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 우물 속에서의 경험만을 전부라고 생각하고서 조그만 일이 생겨도 법석을 부리는 우리 자신과 그 이발사는 무엇이 틀립니까?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갇혀있던 자기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의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고 주님의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시야를 넓혀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세계에 대하여 시야가 확대되는 사람만 그 신앙이 성숙해질 수 있고, 또 신앙이 성숙해지는 사람만 주님의 세계에 대한 시야가 더 커지는 법입니다.

육신을 입고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역을 다 마치신 뒤에 육신을 가지신 채로 승천하시어서 이 땅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강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 15절에 이르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하나님 아버지의 것은 모두가 다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과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알려 주시고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인 동시에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그 온전한 세계를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시고 그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보혜사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이 시간 성령 충만한 사람을 또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 그 모든 것을 다 알아 가는 사람,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그 주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 그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시야를 넓혀 가는 그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그처럼 주님의 세계에 대하여 시야가 확대되어 가는 사람이 주님의 더 크신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고, 또 그 뜻을 삶 가운데서 실천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시야를 더 확대시켜 나아가야 할 주님의 세계란 과연 어떤 세계이겠습니까?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고 그 말씀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크게 신약과 구약으로 이루어져 있고, 작게는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약 없는 구약이 존재할 수 없고, 구약 없는 신약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며, 나의 시야를 확대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의 세계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사들이 중국 오지를 여행하다가 첩첩산중 외딴 곳에서 양을 죽여서 그 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희한한 것은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이삭과 모세도 알고 있었고, 출애굽의 대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여서 피로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선교사들이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그 마을 사람이 갖고 있는 성경이라는 것이 창세기와 출애굽기뿐이었다고 합니다. 오래 전 누군가가 그 마을을 지나면서 창세기와 출애굽기만을 놓고 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두 책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만을 보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 두 책만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서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말씀의 세계에 우리가 온전히 몰입되지 아니한다면, 창세기와 출애굽기만으로 짐승의 피를 뿌려가며 제사 지내는 그 오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평생에 최소한도 성경을 5번 정도는 통독하시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총 1754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루에 5페이지씩 성경을 읽는다면 1년에 한 번씩 성경을 통독할 수가 있고, 하루에 2페이지 반씩 읽는다면 2년에 한 번씩 통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단 한 번도 통독해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5번 정도의 통독이 끝나신 다음에는 여러분의 자녀들 숫자만큼 여러분들이 직접 성경을 써보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카세트 테이프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기록된 문자로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 쓰면 귀로들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은혜와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써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입니다. 성경을 쓰실 때에는 새 노트를 구입하셔서 왼쪽 페이지에만 성경을 순서대로 쓰십시오. 오른쪽 공란에는 말씀을 써 내려가다가 깨닫게 된 깨달음과 기도하게 된 기도의 제목들, 그리고 여러분 자녀에게 하고픈 말을 그곳에 쓰십시오. 다 쓰신 후에는 여러분의 자녀가 성장하면 자녀에게 그 노트를 넘겨주십시오. 그 노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시야를 넓혀주는 노트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의 시야를 틔워 주는 가장 값진 유산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식 사랑은 없습니다.

바다 위에서만 거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산 위에 거하기만 해서도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지리적으로 더 많은 자연의 세계를 보는 사람, 한 나라만이 아니라 더 많은 나라를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더 큰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하던 사업 중에서 외국 항공 대리점 사업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때에는,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술집들을 순례하고 다니느라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제대로 접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술집에 박혀 있느라 금문교도 보지 못하고 왔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2년 전 안식년을 가지면서 우리 나라와 세계의 여러 곳을 다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와 깨달음이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공해에 찌든 서울 한복판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은혜요, 깨달음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더 많은 세계를 봄으로서 제 신앙의 경지가 더 넓어진 것입니다.

틈이 나시는 대로 산과 들을 찾으십시오. 가서 바닷가도 거닐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갈릴리 바다와 산과 들 그리고 요단강과 광야와 같은 하나님의 자연적인 세계와 더불어 심화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기회가 된다면 국내 여행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여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만 본 사람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오묘한 여러 나라를 본 사람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향락만을 위한 여행이라면 그것은 시간과 육체와 물질의 낭비에 불과한 것이므로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더 깊이, 더 넓게 경험하기 위한 여행이라면 그것보다 더 값비싼 교육, 더 가치 있는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혼자 여행을 시켜라.' 이 격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홀로 여행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갖게 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만 알고 미국말만 할 줄 아는 교포 2세들이 여름이 되면 고국을 알기 위해서 우리 나라를 찾습니다. 그들에게 앙케이트를 돌리면 그들이 이 나라에 와서 가장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한결같은 사람밖에 없는 것이라 답한다고 합니다. 머리색깔, 눈동자 색도 똑같고, 얼굴 모습도 하는 말도 똑같습니다. 검은 피부, 하얀 피부, 노란 피부로 가히 인종 전시장이라고 할만큼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찬 미국에 살던 그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힘든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단일 민족임을 자랑합니다. 단일 민족은 대단히 큰 장점일 수도 있지만 대단히 큰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을 결코 용납하질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 사람만큼 당짓기를 좋아하고 분열과 다툼을 일삼는 민족도 없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형적 세계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사람이라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우리와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더 만나고 더 많은 사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은 교류를 가짐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각각 다르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분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전공이 다른 사람과 학문과 지식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신앙,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더 넓은 사람의 세계 속으로 몰입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 과제임과 동시에, 그것은 조화 속에서 극치를 이루게 됩니다. 조화를 상실한 채 사람을 사랑한다함은 실은 약한 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강한 자의 일방적인 값싼 동정이거나, 아니면 강한 자를 향한 약한 자의 맹목적인 아양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b)"
이것은 다시 말하면,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것을 안다면 내게 어떤 사건이 닥쳐오든 그 사건을 두려워하고 외면하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회피하려 한다고 해서 회피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내게 더 큰 유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임을 믿고, 그 사건과 적극적으로 맞서며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섭리의 세계로 뛰어들어감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깊은 만남을 가지며 하나님 안에서 더 아름다운 진리의 삶을 가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중합니다.(시 119:71-72)"

세상에 고난을 즐겨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인은 자기가 예상치 못한 고난이 닥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믿고, 그 고난을 뚫고 나아갔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 시인은 예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더 넓은 말씀의 세계, 더 큰 하나님의 은혜, 더 깊은 신앙의 경지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내어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맹모의 삼천지교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맹모는 그 삼천지교로 인해, 서양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어거스틴의 모친 모니카와 더불어 동양의 어머니로 세계인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맹자를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까닭은, 자기 아들을 나쁜 환경 속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이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얼마나 지혜로운 어머니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자식을 공동묘지 옆으로 ,시장 곁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그 장소들을 택해서 그 곳에서 살았던 것은, 바로 그 곳이야말로 자기 자식에게 꼭 필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공동묘지 옆을 선택해서 살았던 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죽음의 세계를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자는 참다운 삶의 세계를 열어갈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맹자를 시장터 옆 동네로 데리고 가서 살게 했던 것은 시장바닥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생존법칙의 세계를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생존 법칙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자의 삶은 한평생 뜬구름 잡는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맹자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맹자를 학교 옆으로 데리고 갑니다. 죽음의 세계, 생존의 세계에 대한 눈뜸이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일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두 번째 해석에 100% 동의합니다.

한 여인이 자기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이 거쳐야 할 세계에 대해 눈뜨도록 그를 이끌어 도와주었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주님의 세계에 대하여 눈뜨기를 어찌 원치 않으시겠습니까? 얼마나 원하셨으면 우리의 개안을 돕고 그 세계로 인도하시도록 보혜사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했겠습니까? 주님의 세계에 대한 참된 눈뜸이 없는 신앙교육은 거듭되면 거듭될 수록 편협한 율법주의자를 양성할 뿐임을 누구보다도 주님께서는 잘 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정녕 성령 충만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를 돕고 계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우리는 먼저 자기라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조명 아래 거하면서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세계로, 즉 말씀의 세계로, 창조의 세계로, 사람의 세계로 그리고 섭리의 세계로 몰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향하여 우리의 시야를 키워가야 합니다. 한 순간이 아니라 일평생토록 지속적으로 그 세계 속에 거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자기에게 예속됨이 없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참 자유인이 될 수 있으며 그 때에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누룩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오직 세계를 알고 세계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새로워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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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요한복음 뜻대로 하소서(順命) 요15:13  김용덕 형제  2008-08-26 1451
376 요한복음 삶으로 드리는 예배 요4:19-24  류상태 형제  2008-08-26 2054
375 요한복음 생수의 근원지를 바꾸어놓은 여인 요4:1-42  최영실 교수  2008-06-02 2230
374 요한복음 생명의 씨알 요12:20-24  서창원 목사  2008-06-02 2054
373 요한복음 심는 자의 기쁨 요4:27-38  황성규 목사  2008-05-30 2106
372 요한복음 우연한 만남 요2:43-51  이정배 목사  2008-05-30 1727
371 요한복음 예수와 우리 사이 요15:12-15  권진관 형제  2008-05-29 1660
370 요한복음 예수님과 도적 요10:10  조용기 목사  2008-05-28 1906
369 요한복음 나는 누구입니까? (정체성의 위기) 요14:1-6  조용기 목사  2008-05-19 2319
368 요한복음 수난의 길 요12:20-26  서창원 목사  2008-05-19 1647
367 요한복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요13:3-15  강남순 교수  2008-05-19 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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