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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2013 추천 수 0 2008.10.30 08: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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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7:1-5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1996년 9월 1일 
제목: 눈을 들어
본문: 요한복음 17 : 1∼5
설교: 이재철 목사 (1996년 9월 1일 )

모 병원에서 새로운 항암 유전자치료법을 임상실험할 수 있는 대상자를 공개 모집한 결과, 놀랍게도 2,000명의 지원자들이 쇄도하여 병원측이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기 암환자들로써, 시한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치료법의 효과가 의학적으로 판명되지 않았기에 임상실험 대상자에게 직접 실험을 해보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무서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 상태가 더 악화될수 있는 위험성도 얼마든지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치료법에 내 생명을 맡기기에는, 아직까지 너무나도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그 치료법의 실험 대상자가 되겠다며, 죽음을 앞둔 말기 암환자 2,000명이 쇄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인간은 죽기 싫어함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를 알지 못하면 모르려니와, 자신의 죽음의 날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그 자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목전에 둔 2,000명에 달하는 그 말기 암환자들은, 마치 물에 빠진 자들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새로운 치료법의 실험대상이 되겠다며 스스로 지원한 것입니다. 한결같이 생명에 대한 실날같은 희망을 걸고,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생명이고 보면, 그 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사람 치고, 누가 선뜻 죽음을 기뻐하고 달가와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다 죽음과 벗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십니다. 누구보다도 본인이 그 죽음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못박히사 처참하게 찢어져 죽어야 하심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 끔찍한 죽음이 지금 코 앞에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죽음을 피할 방도를 궁리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초를 다투는 그 긴박한 순간에 주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면서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b)

여기에서 세상을 이겼다 하심은, 모든 인간을 패배자로 전락시키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를 뜻함은 지난 주일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선 내가 이제 세상을 이길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씀치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완료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처참한 죽음이 코 끝에 다가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미 그 죽음을 이기고 계셨습니다. 죽음이 당신을 덮치기도전에 죽음에 대해 완전무결한 승리를 거두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에게 덮치는 죽음이 제아무리 처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죽음의 끝은 부활임을 아시고 이미 그 영원한 부활에 동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오셨던 주님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육신을 가진 인간 치고 죽음을 기뻐할 자는 없지 않습니까? 죽음의 끝은 부활임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마냥 멀리만 하고픈 것이 육체를 지닌 인간의 한계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육신을 가지셨던 인간 주님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셨습니까? 죽음이 덮치기도 전에 죽음을 이미 이기고, 온 몸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그 처참한 죽음을 어찌 기꺼이 감수할 수 있으셨읍니까? 모든 상황 속에서 지켜야할 자리, 걸어야 할 길을 어찌 그토록 끝까지 겸손하게 지키고 걸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오늘의 본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주님께서 죽기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렸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바,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본문에서 들었다는 단어`epairo'는 더 정확히 말하면 'lift up' `들어올렸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어디를 향해서 입니까? 하늘을 우러러서였습니다. 이때의 시각은 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밤하늘의 별을 보시기 위해, 고요한 달빛을 감상키 위해 하늘을 우러러 눈을 들어 올리셨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늘을 우러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러렀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틈이 날때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렀습니다.

마가복음 7장 34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귀먹은 자를 고치실 때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무덤 속에서 썩어가고 있던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릴 때도, 주님께서는 먼저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렀다고 요한복음 11장41절이 증거합니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 14장 19절은,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직전에도 먼저 하나님을 우러러보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둔 가장 결정적인 순간, 또다시 눈을 들어 올려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덮쳐드는 죽음을 보시고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그 죽음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시므로 오히려 죽음을 이길 수 있으셨습니까?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건, 걸어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으셨습니까? 그분은 눈을 들어 올려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이란 눈을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1] 눈을 들어올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만, 끝까지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6장 3-4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미가 그 자식에게 그러하듯 우리를 품고 계시며 안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고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성경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왜 매번 눈을 들어올려 하나님을 우러러 쳐다보셔야만 했습니까? 모든 인간의 곁에 계신 하나님께서 유독 주님에게 대해서만은 당신을 감추시사 하늘 위로 피하셨기 때문입니까?

주님께서 눈을 들어 올려 하나님을 우러러 보셨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스스로 낮은 위치에 거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님 곁에 계신다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든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낮은 마음을 잃지 아니하셨기에, 그 분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함을 견지하실 수 있었습니다.

겸손을 나타내는 영어 humility의 어원은 라틴어 humus인데, 그것은 흙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흙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흙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흙이 어디에 있건 흙의 자리는 사람의 발 아래입니다. 사람의 머리 위에 앉으려는 흙, 사람의 눈앞에서 사람과 마주 보려는 흙은 이미 흙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람의 발 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흙인 우리의 관계도 이것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품고 안고 계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는 언제나 그분의 발 아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높여 주셔도 우리가 하나님을 내려다보거나 마주보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눈을 들어 올려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교만에 빠짐없이, 진정 하나님만 드러내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눈을 들어 올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만, 어떤 상황 속에서건 자기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애송하는 노래 중에서 시편 121편이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인은 지금 땅만 내려다보면서 말할 수 없는 절망과 탄식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땅만 내려다보고서야 무슨 소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소망은 어떤 경우에도 땅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탄식하던 시인은 문득 높은 곳을 향해 눈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 순간 시인은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눈을 들어올리는 순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분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탄식으로 시작되었던 시인의 고백은 이렇게 극적으로 반전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처음의 절망과 탄식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영원토록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승리의 노래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대 역전이 가능했겠습니까?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우러러보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한 내 삶의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처참한 죽음이 주님을 덮치려는 그 결정적인 순간 주님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주저없이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생명으로 반드시 죽음을 깨뜨려 주실 것임을 확신하셨던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만 모든 상황에서 주저없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있습니다. 소망과 확신은 언제나 위로부터만 옵니다.

[3]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만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수십년전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가오라는 목사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이 불교만 성행했던 가나사와 부근에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교인 한 명이 오지 않습니다. 6개월, 1년이 지났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자는 언제나 그의 아내와 어린 아이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곳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단정하고 철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곳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5년 동안 그곳을 지켰습니다. 마침내 5년만에 교인 한 명이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그것도 젊은 청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그 청년은 각혈하는 폐병환자 였습니다. 당시 폐병은 저주받은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가오목사는 그 청년을 극진히 보살폈고, 나가오 목사에게 감명 받은 청년은 그 이후, 그 유명한 일본 빈민의 아버지,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5년 동안 한 명의 교인밖에 얻지 못한 나가오목사는 실패한 목회자 인것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나가오 목사가 없었던들 가가와 목사가 있을 수 없었고, 가가와 도요히꼬목사가 없었던들 수많은 일본 빈민들이 어떻게 구원받는 대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나가오 목사가 5년 동안 한 명의 교인도 없는 교회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 그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자 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상, 이 일이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자는 모두 죽습니다. 그래서 매일 지구에서는 수없이 많은 자들이 죽어가기에 특별한 죽음이란 사실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로마제국 한복판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 변방에서 죽었습니다. 그날 현장에서 강도들도 함께 죽었습니다. 결코 특별할 수도 대수로울 수도 없는 죽음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육체를 제물 삼아 그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자신의 그 조그마한 죽음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대 역사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는 자만, 지금 주어진 일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 하찮게 보이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일어남을 그들만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해서 죽음 앞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겟세마네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에 엎드린 주님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 분도 순간적이나마 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처참한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처참한 기도, 땀과 피가 맺힐 정도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았을 때 그분의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분이 끝까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로 바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은 눈을 들어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러보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월요일 두 전직 대통령과 그 주위에 있던 분들이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역사 바로 세우기'가 구현되고 법과 정의가 살아 있음이 증명되었다라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들만 단죄되면 이 나라의 역사가 영원토록 바로 세워집니까? 법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 할 자들은 그들 뿐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15년동안 우리 모두가 다 공범이었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안달을 했습니까? 그들에게 다가가는 연줄을 잡으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우러러야 보아야 합니다. 그때야만 법정에선 그들이 곧 나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중형이 나에 대한 심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정녕 우리 모두가 거듭나야 역사는 바로 세워지고 법의 정의가 진정 살아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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