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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9: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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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일 설교말씀 1997년7월13일 |
제목:돌아가시니라
본문:요한복음 19 : 23∼30
설교:이재철 목사 (주일 설교말씀 1997년7월13일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최후 모습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요즈음 시간으로 아침 9시경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6시간이 경과한 오후 세시가 되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드디어 운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돌아가셨다'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과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갔다' 혹은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리가 쓰는 용어와 예수님에게 사용된 용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상반된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돌아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수동적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장본인은 돌아갈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하여 발버둥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타력적인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를 묘사하고 있는 동사 `paradidomi'는, 그와는 정반대로 능동적, 자발적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구체적인 뜻은 `give up', `포기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타력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스스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히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시기 전에, 대제사장들이 음모를 꾸며 예수님을 고발하기 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시고 자발적으로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포기하셨습니까?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오직 사망일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값을 당신이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될 당시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당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포기치 아니 하셨더라면 어찌 하찮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위대한 십자가 구원의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아침 두 가지의 진리를 마음 속에 되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자발적으로 버릴 때에만, 자기를 능동적으로 포기할 때에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실 수가 있었습니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원한 구원의 표징일 수가 있었습니까? 그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15세기의 사람인 일본의 선승 이뀨(一休)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아무리 부러트려 보아도 그 속엔 벚꽃이 보이지 않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절로 피어오르는가?"
그렇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트린다고 벚꽃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달래고 얼른다고 피어나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때린다고 해서 피어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봄이 오기만 하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피어나는 벚꽃을 막을 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봄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겨울이 자기를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겨울이 더 이상 겨울이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춘3월이 왔다 할지라도, 북극에서처럼 겨울이 마냥 버티고만 있다면 벚나무가 기를 써도 벚꽃은 결코 피어오를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모든 열매가 알차게 영글 수 있는 것은 봄이 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요, 가을이 되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여름이 자기를 버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을은 가을대로 또 가을이기를 포기해 주었기에, 비로소 온 자연은 한 겨울의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이 밤이기를 포기하므로 생명이 약동하는 낮이 이르는 것이요, 낮이 자기를 버림으로 안식의 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유치함을 버릴 때 성숙함이 가능한 것이요, 성숙함을 포기할 때 원숙함이, 원숙함마저 떠날 때 비로소 영원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자기 떠남'이 있는 곳에만 생명의 역사가 있음은 하나님의 법칙이요 철칙입니다. 그 곳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후로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납니다.본질적인 죄인이 죄인된 자기자신을 버리고 포기치 않으려 할 때, 어찌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가능할수 있겠습니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보십시오. 참으로 가관이요 점입가경입니다. 지도자다운 인품이나 인격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고 그저 유치하기 짝이 없어만 보입니다. 그런 좁은 생각, 좁은 마음으로 어떻게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설수 있는지 그 용기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란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는커녕, 분열과 다툼을 거쳐 죽음의 열매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포기치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죄와 노예와 자기 욕망의 노예상태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죄와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약이요, 흉기인 탓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진리와 생명의 열매 그리고 역사는 오직 자기 버림의 텃밭에서만 거두어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저없이 포기하셨던 분이시라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6월초 몽고에 갔을 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몽고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장 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사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신학자 C.S.루이스(Lewis)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해가 뜬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주님을 믿는다. 단지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를 통해 모든 것을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입니까? 해가 중요함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물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절대적인 것은 주님으로 인해서만 이 세상을, 나의 상황을, 나 자신을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나를, 내 주위를, 이 세상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어느 사건 치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총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롬8:31b~3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였다 할지라도, 막상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잠잠히 내어놓지 않으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침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포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우리를 책임져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요즈음 수요 예배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로니아의 침공에 의해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근심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지 못한 채 자기에게 집착하여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9년 전에 이미 다니엘과 에스겔 등을 미리 바벨로니아로 보내시어,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세우실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속에서 전혀 새사람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여건의 악화로 인하여 요즈음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회사를, 가계를 꾸려 가느라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모든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본심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내어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 어찌 우리에게 그 결과가 해로 끝날 것을 주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본심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사회적 경제적 정의와 개인적 정직,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본질과 내실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식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진리를 생각인들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근심과 고통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나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치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사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그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비록 고통과 고난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국은 우리의 유익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기회에 우리 모두 주님처럼 자기를 버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진리 위에 바로 서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머지않아 사도 바울처럼 고백치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니라."(롬 8:28)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7일동안 내내 절망하고 근심하며 한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버리지 않으시고 이 시간 불러 주시사,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잠잠히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확신케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여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나를 버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은총의 기회로 삼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썩어질 허망한 내 욕망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광된 열매들이 날마다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
본문:요한복음 19 : 23∼30
설교:이재철 목사 (주일 설교말씀 1997년7월13일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최후 모습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요즈음 시간으로 아침 9시경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6시간이 경과한 오후 세시가 되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드디어 운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돌아가셨다'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과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갔다' 혹은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리가 쓰는 용어와 예수님에게 사용된 용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상반된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돌아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수동적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장본인은 돌아갈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하여 발버둥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타력적인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를 묘사하고 있는 동사 `paradidomi'는, 그와는 정반대로 능동적, 자발적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구체적인 뜻은 `give up', `포기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타력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스스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히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시기 전에, 대제사장들이 음모를 꾸며 예수님을 고발하기 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시고 자발적으로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포기하셨습니까?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오직 사망일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값을 당신이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될 당시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당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포기치 아니 하셨더라면 어찌 하찮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위대한 십자가 구원의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아침 두 가지의 진리를 마음 속에 되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자발적으로 버릴 때에만, 자기를 능동적으로 포기할 때에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실 수가 있었습니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원한 구원의 표징일 수가 있었습니까? 그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15세기의 사람인 일본의 선승 이뀨(一休)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아무리 부러트려 보아도 그 속엔 벚꽃이 보이지 않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절로 피어오르는가?"
그렇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트린다고 벚꽃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달래고 얼른다고 피어나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때린다고 해서 피어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봄이 오기만 하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피어나는 벚꽃을 막을 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봄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겨울이 자기를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겨울이 더 이상 겨울이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춘3월이 왔다 할지라도, 북극에서처럼 겨울이 마냥 버티고만 있다면 벚나무가 기를 써도 벚꽃은 결코 피어오를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모든 열매가 알차게 영글 수 있는 것은 봄이 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요, 가을이 되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여름이 자기를 버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을은 가을대로 또 가을이기를 포기해 주었기에, 비로소 온 자연은 한 겨울의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이 밤이기를 포기하므로 생명이 약동하는 낮이 이르는 것이요, 낮이 자기를 버림으로 안식의 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유치함을 버릴 때 성숙함이 가능한 것이요, 성숙함을 포기할 때 원숙함이, 원숙함마저 떠날 때 비로소 영원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자기 떠남'이 있는 곳에만 생명의 역사가 있음은 하나님의 법칙이요 철칙입니다. 그 곳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후로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납니다.본질적인 죄인이 죄인된 자기자신을 버리고 포기치 않으려 할 때, 어찌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가능할수 있겠습니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보십시오. 참으로 가관이요 점입가경입니다. 지도자다운 인품이나 인격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고 그저 유치하기 짝이 없어만 보입니다. 그런 좁은 생각, 좁은 마음으로 어떻게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설수 있는지 그 용기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란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는커녕, 분열과 다툼을 거쳐 죽음의 열매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포기치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죄와 노예와 자기 욕망의 노예상태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죄와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약이요, 흉기인 탓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진리와 생명의 열매 그리고 역사는 오직 자기 버림의 텃밭에서만 거두어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저없이 포기하셨던 분이시라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6월초 몽고에 갔을 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몽고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장 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사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신학자 C.S.루이스(Lewis)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해가 뜬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주님을 믿는다. 단지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를 통해 모든 것을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입니까? 해가 중요함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물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절대적인 것은 주님으로 인해서만 이 세상을, 나의 상황을, 나 자신을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나를, 내 주위를, 이 세상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어느 사건 치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총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롬8:31b~3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였다 할지라도, 막상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잠잠히 내어놓지 않으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침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포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우리를 책임져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요즈음 수요 예배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로니아의 침공에 의해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근심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지 못한 채 자기에게 집착하여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9년 전에 이미 다니엘과 에스겔 등을 미리 바벨로니아로 보내시어,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세우실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속에서 전혀 새사람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여건의 악화로 인하여 요즈음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회사를, 가계를 꾸려 가느라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모든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본심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내어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 어찌 우리에게 그 결과가 해로 끝날 것을 주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본심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사회적 경제적 정의와 개인적 정직,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본질과 내실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식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진리를 생각인들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근심과 고통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나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치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사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그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비록 고통과 고난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국은 우리의 유익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기회에 우리 모두 주님처럼 자기를 버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진리 위에 바로 서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머지않아 사도 바울처럼 고백치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니라."(롬 8:28)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7일동안 내내 절망하고 근심하며 한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버리지 않으시고 이 시간 불러 주시사,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잠잠히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확신케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여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나를 버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은총의 기회로 삼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썩어질 허망한 내 욕망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광된 열매들이 날마다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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