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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구하매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1581 추천 수 0 2008.12.05 01:28:11
.........
성경본문 : 요19:31-42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일 설교 1997년7월27일 성찬 주일 
제목:시체를 구하매
본문:요한복음 19 : 31∼42
설교:이재철 목사 (주일 설교 1997년7월27일 성찬 주일)

요즈음 폭력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단 하루도 끔찍한 폭력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사회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학교인들 안전할 리가 만무합니다. 학교인지 폭력원인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성적타락 또한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습니다. 동네마다 환락가 줄지어 들어서고있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자라나는 10대들이 무사할 까닭이 없습니다. 10대들이 직접 출연·제작한 `음란 비디오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개탄을 금치 못하면서,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우려하며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오늘만의 문제입니까? 어제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10년 전에는 괜찮았습니까? 100년전, 1000년전에는 오늘날과 틀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단지 오늘날과 형태의 차이가 있었을는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나 판단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이 증거 해주고 있는바 입니다.

성경을 열어보십시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에덴동산과 그 낙원 속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의 타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실낙원, 에덴동산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봅시다.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나타난 제일 첫 번째 문제가 바로 폭력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을 쳐서 죽여버린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여인들과 놀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그때의 성적타락이 얼마나 도가 지나쳤으면 창세기 6장∼7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들을 심판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까? 전혀 아니었습니다. 인간 교만의 극치요 영적 부패의 본보기인 바벨탑이 창세기 11장에 등장하고 있으며, 창세기 13장에는 인류역사상 성적타락의 전형인 소돔과 고모라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폭력, 성적타락, 영적 부패의 문제는 성경전체를 통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사실은 무엇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있는 모든 병리현상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늘 있어왔고,앞으로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자신을 신봉하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자들은 계속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는 갈수록 더 번창할 것이며, 폭력을 숭상하는 카인들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합니까?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이라면 너무나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인간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야 이 암울한 세상에서 구태여 애써 살아야 할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비관주의자가 되던가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참한 현실속에서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을 만날 수 있음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에덴동산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낙원은 오늘도 창세기 2장속에 영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되돌아가야할 영적 고향으로 말입니다.그 낙원을 되찾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그 낙원이 회복되기만 하면, 이 세상이 악으로 인해 아무리 요동쳐도 우리는 흔들림 없는 소망과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허물어트리려는 악의 세력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여전히 있을 것이나, 인류의 역사는 그 심령 속에 에덴을 품고있는 자, 진리의 등불이 되는 자들에 의해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인도되어왔고, 되고 있고,또 되어갈 것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영적고향으로 되돌아갈 길을 제시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망이요 소망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천년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의 율법에 의해 정죄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일 수가 없는 한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했을 때, 실낙원을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찾았을 때에, 그들은 정녕 새로운 사람, 에덴의 사람, 진리의 등불로 거듭나므로 이 땅을 에덴으로 일구어 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적타락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추잡한 창녀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에덴을 회복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폭력신봉자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영육간에 부패한 자의 표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매 에덴의 참된 실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실낙원이 회복되는 생명의 역사, 에덴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의 `목회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서슴없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 즉`에덴의 회복'이라고 답합니다.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에덴이 회복된 자만 이 세상을 바로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에덴을 회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에 대하여는 `새 신자반'제7과 `교회'에서 상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에서 재론치는 않겠습니다. 단지 이 시간에는, 그 심령 속에 에덴을 회복한자에게 나타나는 분명한 특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실(失)낙원 했던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득(得)낙원했을때, 먼저 그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에덴의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를 터득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에덴이 점점 더 확장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운명하셨습니다. 로마군병 한 명이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키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매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심장파열로 이미 운명하신 뒤였던 것입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자들의 낙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으며, 그 죽음의 현장에 제자중 유일한 목격자로 남아있던 사도 요한 마저 그 절망적인 순간에 어찌할 바를 알지못한채 망연자실 예수님의 주검을 쳐다만 보고 있었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이 암울한 순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38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시체란 절망과 부정과 비탄의 상징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가족이외의 사람이 타인의 시체를 구하는 법이란 통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란 사람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 가져가기를 구하였습니다. 요셉이 의사이기에 해부실습용으로 쓰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면 장의사이기에 돈을 벌기 위함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57절에 의하면 그는 장의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소문난 거부였습니다. 할일 없이 남의 시체나 거두고 다닐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시체를 구한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1∼42)

본문이 말하는 새 무덤이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자신을 위하여 예비해둔 무덤이었다고 마태복음 27장 60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구했던 이유는 한 가지―정성을 다하여 자기 무덤으로 장례를 치루어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39절-40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찍 예수께서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 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 마포로 쌌더라"

유대인의 장례법은 시체에 방부제를 바르는 애굽이나 로마의 장례법과는 달리, 죽은자의 몸에 오히려 향품을 바르고 부드러운 세마포로 감싸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존귀한 산헤드린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에 필요한 값비싼 향품과 세마포를 가져다,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염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믿는 자기자신을 은휘- 즉 숨기던 자요, 니고데모 역시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밤중에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찾았던 위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 완전한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도주해버리는 그 죽음과 절망과 공포의 극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두렴없이 자신들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지성으로 예수님의 장례식에 앞장설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만났던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나라, 에덴이 회복된 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산헤드린 의원이었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여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던 날, 니고데모가 예수님으로 부터 배웠던 것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그 날밤 주님을 만난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덴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에덴이 복원되었을 때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할 것을 결의할 때, 유일하게 그 부당성을 용감하게 지적했던 자가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이처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정으로 에덴의 사람으로 거듭난자들이었기에, 본문에서와 같은 참 제자다운 행동을 주저없이 지체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적인 욕구로만 좇았을 뿐 아직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버리는 배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오직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다리를 꺾어 죽여주기를 구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구경꾼들은 한결같이 폭력의 신봉자요, 성적·육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이날의 골고다는 절망의 언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절망의 언덕에서 절망보다 더 크고 찬란한 소망의 빛을 볼 수 있음은, 그곳에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자, 그리스도안에서 에덴을 회복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적으로 만난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육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심령 속에 회복된 에덴이 흔들릴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얻게 된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육적인 죽음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구했던 것은 단순히 숨이 끊어진 예수님의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구했던 것은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더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을 위한 더 큰사랑을 간구했을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을 도구로 삼아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디에서 부활하셨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해두었으나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포기했던 새 무덤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시체를 장사지내는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눈부신 부활의 현장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요한복음 20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 부활의 증거품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 속에 남겨진 세마포였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가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의 시신을 향품과 함께 싸드렸던 세마포였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심령 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에덴을 훨씬 더 확장시켜주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포기한 자기 무덤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부활의 시발점이 되고, 주님의 시신을 감싸드린 세마포가 부활의 증거품으로 존귀케 됨을 보았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심령 속에서 끝도 없이 확장되었을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생각만 해보아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온전히 거듭난 에덴의 사람인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기에,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부활의 새역사를 이루어 가시기에, 폭력과 타락, 배신과 죽음,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요한복음 19장속에서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소망을 발견하고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십시다. 도처에 폭력이 기승을 부리고있습니다. 무분별한 성적타락은 우리의 건전한 가정을 위협하고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날로 썩어질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만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마십시오. 이것은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소위 선진국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므로 실낙원한 인간의 삶이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요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만, 낙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만 보며 탄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마십시다. 실낙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덴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 분을 육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만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 안에서 득낙원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 안에서 얻은 에덴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가는 자들이 되십시다. 아무리 카인이 득세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창궐하며, 멀쩡한 사람의 다리를 꺾는 흉폭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되는 한,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의 역사를, 우리의 미래를, 우리 자녀들의 장래를 기필코 바르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껏까지 그렇게 해오신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3년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이 구했던 것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실은 주님의 육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육체가 운명하는 그 현장에서 그들은 모두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구했던 것은 그리스도안에있는 하나님의 나라, 실낙원 했던 에덴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주님의 시신을 구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도구로 삼으시사 부활의 새 역사를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폭력과 배신과 죽음이 난무하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절망보다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을 얻게 됩니다.
주님! 이 사회가 골고다처럼 절망의 언덕이라 할지라도, 아니 아무도 부정할수 없는 분명한 골고다 언덕이기에, 절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한없는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주님을 어떤 상황속에서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작은삶을 통하여, 골고다 곧 해골과 같은 이 세상이 부활의 언덕, 새 생명과 새 역사의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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