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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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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일 설교 1997년 8월 3일 |
제목:안식후 첫날
본문:요한복음 20 : 1∼18
설교:이재철 목사 (주일 설교 1997년 8월 3일 )
드디어 이번 화요일(8월 5일)오전 10시에 정신여고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이 일을 맡겨주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연건평은 정신여고생 전원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대강당, 밤에 잠을 자면서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수련관, 소강당과 각종 활동실및 우리 교회가 사용할 공간을 포함하여 총 2,380평에 이릅니다. 이에 대한 공사비는 설계료를 포함하여 70억원으로 예상하고 정신여고쪽에서 10억원, 우리교회에서 60억원을 부담키로 하고 일이 추진되었습니다. 60억원 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금액입니다. 만약 우리교회가 창립 때부터 헌금전액을 우리교회 자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교회였다면, 정신여고가 아무리 미션스쿨이라 할지라도 남의 학교 강당을 지어드릴 엄두를 감히 낼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이런일에 개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전 헌금액의 50%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시므로, 교회가 이웃 즉 사회와 앞으로 어떻게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 미래의 본보기로 우리를 택하시고 이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헌금의 50%를 이웃과 나눈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헌금의 50%를 계속 모아 가다보면 몇년후에는 60억이 되겠지만, 공사가 1년여만에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목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사부터 해준 뒤, 연차적으로 공사비를 결제 받는 건설회사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고맙게도 벽산건설이 우리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습니다. 만약 그때 벽산건설이 우리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이 일은 아예 진행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벽산건설은 만약 벽산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설회사가 있으면 그쪽을 선택하라는 배려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끝난 뒤 벽산을 포함하여 세 건설회사를 상대로 입찰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개봉결과는 현대건설이 부가세를 포함하여 85억 7천 2백만원, 벽산건설이 80억 1천 4백만원 으로 모두 우리의 예상금액 70억원을 초과하는 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박재준 집사님이 경영하는 강산건설이 66억 5천 5백만원으로 응찰하였습니다. 그 금액은 설계비와 감리비를 포함하면 우리의 예산70억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박재준 집사님은 주님의 교회 제직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맡겨주신 이 대 사명을 솔선수범하여 감당키 위해 오직 헌신과 봉사의 차원에서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내일 모래 뜻깊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완공은 13개월 후인 98년 9월로 예상하고있습니다. 재정위원회에서는 공사가 끝난 2년후인 2천년 12월말까지는 공사비를 다 지불 할수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특별히 날을 정하여 따로 헌금치 않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성도님들이 정신여고 강당건축기금으로 헌금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일에 관한 한 따로이 헌금일을 정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동참하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때고 자유롭게 참여하면 되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징검다리역할을 해주었던 벽산건설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대건설측에도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이 궂은일에 앞장선 강산건설측에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공사가 끝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더 크게 드러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들의 중단 없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7주 동안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19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므로 바로 금요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무덤'이란 이미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식을 위하여 스스로포기했던 자기의 새 무덤이었으며, `예수를 거기 두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운명하신, 다시 말해 영혼이 돌아가신 예수님의 육체 즉 시신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때가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라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즉 주일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흘동안 영혼이 떠나신 예수님의 시신은 분명히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 속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 한가지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그 육체를 떠난 예수님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 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때 영혼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의 영혼도 육체와 함께 죽어버렸습니까? 완전 소멸되어버렸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구원을 요청하는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 `너'와 `나'는 예수님과 강도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뜻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 17장에는 소위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가셨을 때에 하늘에서부터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1천 5백년 전에 이미 그 육체가 죽은 자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분명히 모압땅에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어 버렸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 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운명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드린 것은, 인간의 육체는 죽을 망정 영혼은 결코 죽지 않음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흘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 해답은 이미 성숙자반 제7과에서 배운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드리고있는 사도신경속에 제시되어있습니다. 먼저 첨부된<사도신경 한글 영어 원문비교표>를 살펴보십시다. 여섯 번째 항이 한글 쪽은 공난인데 반해 영어 쪽은 비어있지를 않습니다. 즉 한글에는 없는 내용이 영어 원문에는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 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예수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되셨지만, 주님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계시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미국인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미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속에는 반드시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찬송가중에 앞면에 사도신경 영어원문이 인쇄되어있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이 구절은 어김없이 들어있습니다. 왜 한글에는 없는 구절이 영어원문에는 포함되어있습니까? 미국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첨가한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1천 3백년전 교회에 의해 확정된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 이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첨부된 <사도신경 발전과정표>를 보십시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기초한 신앙고백이란 의미에서 사도신경, 혹은 사도신조로 불리우는 이 내용은 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례식에서 문답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표의 1번 항에서 보는바와 같이 집례자가 `당신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아버지를 믿느뇨?' 하고 물으면 수세자가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 문답형의 내용이 고백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수세자가 세례받기전에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이 내용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세기를 거치면서 오늘과 같은 내용으로 확정되면서 일반 예배시간에도 지금처럼 암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도표를 자세히 보면 시대를 거듭하면서 고백의 내용이 계속 보완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네 번째 항입니다. 2세기와 4세기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라는 구절이 8세기의 확정문속에 보완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 이미 제기되었고, 교회는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와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답을 제시한 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 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 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벧전 3:18∼20)
하나님께서 패역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식구 8명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은 그들의 육체였지 영혼까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은 여전히 살아 `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옥이라 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떨어지는 `지옥'혹은 음부'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육체가 운명하셨던 예수님의 영혼은 바로 그 지옥, 음부로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 혹은 알지 못해 저주받았던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 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6)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영혼들도 구원받아 살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이 그곳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하여 신학적 이견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지난 1,300년동안 교회는 한결같이 이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 복음을 증거 하셨다고 고백해왔으며, 오늘날도 캐톨릭을 비롯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의 원문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개신교만은 이 구절을 빼버린 불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이 구절이 삭제되어, 한국의 개신교 신자만은 사도신경속에 이런 구절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못하고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말 잘못했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까닭없이 삭제되어있는 부분을 복원시키고 주님께서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주저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이유인 즉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만이 첫째로 성경과 사도신경을 더 이상 왜곡하는 우를 범치 않는 것이요, 둘째 이것을 알 때에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온전하신 구원자로 바르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신경을 그림으로 표시한 첨부된 도표를 보십시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구원하시려 영으로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말하자면 천상천하 음부의 세계가 모두 주님의 완전한 구원의 능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음부의 세계만은 예수님의 구원능력에서 제외된다면 어찌 그 분이 온전한 구원자일수 있겠습니까? 천상 천하 음부가 모두 주님의 통제력 속에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영육간에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 대학 기독신우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다 품었다'고 해석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형편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마음속으로 그를 품기만 하면, 그의 잘못과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수치를 다 품어주셨습니다. 당신을 못박아 죽이는 군병들까지도 완전히 품어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사 주님을 믿지 못해, 알지 못해 저주받은 음부의 영혼까지 품어주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천상 천하 음부를 초월하여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영원한 사랑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거나 절망 속에 빠져있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주님을 불신하여 지옥에 떨어진 영혼마저 품어주시는 주님께서 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미래를 품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왜 지금 우리를 그 사랑의 품으로 품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본심을 의심치 마십시오. 온전히 그분의 법도안에 거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도 우리의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참 생명과 소망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허망한 나의 뜻이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시는 주님의 영원한 뜻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로소 두 눈으로 확인하며,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케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시사 그곳의 불쌍한 영혼까지 품어주신 것을 알게해주셔셔 감사합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나를, 나의 미래를 품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의 품속에서 변함없는 소망의 사람,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어렵고 혼란한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희망의 등대, 진리의 등불들이 되게 하옵소서.―아멘
본문:요한복음 20 : 1∼18
설교:이재철 목사 (주일 설교 1997년 8월 3일 )
드디어 이번 화요일(8월 5일)오전 10시에 정신여고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이 일을 맡겨주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연건평은 정신여고생 전원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대강당, 밤에 잠을 자면서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수련관, 소강당과 각종 활동실및 우리 교회가 사용할 공간을 포함하여 총 2,380평에 이릅니다. 이에 대한 공사비는 설계료를 포함하여 70억원으로 예상하고 정신여고쪽에서 10억원, 우리교회에서 60억원을 부담키로 하고 일이 추진되었습니다. 60억원 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금액입니다. 만약 우리교회가 창립 때부터 헌금전액을 우리교회 자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교회였다면, 정신여고가 아무리 미션스쿨이라 할지라도 남의 학교 강당을 지어드릴 엄두를 감히 낼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이런일에 개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전 헌금액의 50%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시므로, 교회가 이웃 즉 사회와 앞으로 어떻게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 미래의 본보기로 우리를 택하시고 이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헌금의 50%를 이웃과 나눈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헌금의 50%를 계속 모아 가다보면 몇년후에는 60억이 되겠지만, 공사가 1년여만에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목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사부터 해준 뒤, 연차적으로 공사비를 결제 받는 건설회사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고맙게도 벽산건설이 우리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습니다. 만약 그때 벽산건설이 우리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이 일은 아예 진행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벽산건설은 만약 벽산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설회사가 있으면 그쪽을 선택하라는 배려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끝난 뒤 벽산을 포함하여 세 건설회사를 상대로 입찰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개봉결과는 현대건설이 부가세를 포함하여 85억 7천 2백만원, 벽산건설이 80억 1천 4백만원 으로 모두 우리의 예상금액 70억원을 초과하는 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박재준 집사님이 경영하는 강산건설이 66억 5천 5백만원으로 응찰하였습니다. 그 금액은 설계비와 감리비를 포함하면 우리의 예산70억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박재준 집사님은 주님의 교회 제직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맡겨주신 이 대 사명을 솔선수범하여 감당키 위해 오직 헌신과 봉사의 차원에서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내일 모래 뜻깊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완공은 13개월 후인 98년 9월로 예상하고있습니다. 재정위원회에서는 공사가 끝난 2년후인 2천년 12월말까지는 공사비를 다 지불 할수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특별히 날을 정하여 따로 헌금치 않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성도님들이 정신여고 강당건축기금으로 헌금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일에 관한 한 따로이 헌금일을 정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동참하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때고 자유롭게 참여하면 되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징검다리역할을 해주었던 벽산건설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대건설측에도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이 궂은일에 앞장선 강산건설측에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공사가 끝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더 크게 드러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들의 중단 없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7주 동안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19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므로 바로 금요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무덤'이란 이미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식을 위하여 스스로포기했던 자기의 새 무덤이었으며, `예수를 거기 두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운명하신, 다시 말해 영혼이 돌아가신 예수님의 육체 즉 시신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때가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라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즉 주일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흘동안 영혼이 떠나신 예수님의 시신은 분명히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 속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 한가지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그 육체를 떠난 예수님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 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때 영혼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의 영혼도 육체와 함께 죽어버렸습니까? 완전 소멸되어버렸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구원을 요청하는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 `너'와 `나'는 예수님과 강도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뜻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 17장에는 소위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가셨을 때에 하늘에서부터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1천 5백년 전에 이미 그 육체가 죽은 자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분명히 모압땅에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어 버렸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 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운명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드린 것은, 인간의 육체는 죽을 망정 영혼은 결코 죽지 않음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흘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 해답은 이미 성숙자반 제7과에서 배운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드리고있는 사도신경속에 제시되어있습니다. 먼저 첨부된<사도신경 한글 영어 원문비교표>를 살펴보십시다. 여섯 번째 항이 한글 쪽은 공난인데 반해 영어 쪽은 비어있지를 않습니다. 즉 한글에는 없는 내용이 영어 원문에는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 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예수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되셨지만, 주님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계시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미국인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미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속에는 반드시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찬송가중에 앞면에 사도신경 영어원문이 인쇄되어있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이 구절은 어김없이 들어있습니다. 왜 한글에는 없는 구절이 영어원문에는 포함되어있습니까? 미국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첨가한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1천 3백년전 교회에 의해 확정된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 이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첨부된 <사도신경 발전과정표>를 보십시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기초한 신앙고백이란 의미에서 사도신경, 혹은 사도신조로 불리우는 이 내용은 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례식에서 문답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표의 1번 항에서 보는바와 같이 집례자가 `당신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아버지를 믿느뇨?' 하고 물으면 수세자가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 문답형의 내용이 고백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수세자가 세례받기전에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이 내용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세기를 거치면서 오늘과 같은 내용으로 확정되면서 일반 예배시간에도 지금처럼 암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도표를 자세히 보면 시대를 거듭하면서 고백의 내용이 계속 보완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네 번째 항입니다. 2세기와 4세기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라는 구절이 8세기의 확정문속에 보완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 이미 제기되었고, 교회는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와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답을 제시한 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 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 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벧전 3:18∼20)
하나님께서 패역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식구 8명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은 그들의 육체였지 영혼까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은 여전히 살아 `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옥이라 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떨어지는 `지옥'혹은 음부'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육체가 운명하셨던 예수님의 영혼은 바로 그 지옥, 음부로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 혹은 알지 못해 저주받았던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 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6)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영혼들도 구원받아 살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이 그곳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하여 신학적 이견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지난 1,300년동안 교회는 한결같이 이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 복음을 증거 하셨다고 고백해왔으며, 오늘날도 캐톨릭을 비롯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의 원문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개신교만은 이 구절을 빼버린 불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이 구절이 삭제되어, 한국의 개신교 신자만은 사도신경속에 이런 구절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못하고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말 잘못했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까닭없이 삭제되어있는 부분을 복원시키고 주님께서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주저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이유인 즉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만이 첫째로 성경과 사도신경을 더 이상 왜곡하는 우를 범치 않는 것이요, 둘째 이것을 알 때에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온전하신 구원자로 바르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신경을 그림으로 표시한 첨부된 도표를 보십시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구원하시려 영으로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말하자면 천상천하 음부의 세계가 모두 주님의 완전한 구원의 능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음부의 세계만은 예수님의 구원능력에서 제외된다면 어찌 그 분이 온전한 구원자일수 있겠습니까? 천상 천하 음부가 모두 주님의 통제력 속에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영육간에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 대학 기독신우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다 품었다'고 해석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형편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마음속으로 그를 품기만 하면, 그의 잘못과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수치를 다 품어주셨습니다. 당신을 못박아 죽이는 군병들까지도 완전히 품어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사 주님을 믿지 못해, 알지 못해 저주받은 음부의 영혼까지 품어주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천상 천하 음부를 초월하여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영원한 사랑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거나 절망 속에 빠져있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주님을 불신하여 지옥에 떨어진 영혼마저 품어주시는 주님께서 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미래를 품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왜 지금 우리를 그 사랑의 품으로 품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본심을 의심치 마십시오. 온전히 그분의 법도안에 거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도 우리의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참 생명과 소망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허망한 나의 뜻이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시는 주님의 영원한 뜻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로소 두 눈으로 확인하며,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케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시사 그곳의 불쌍한 영혼까지 품어주신 것을 알게해주셔셔 감사합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나를, 나의 미래를 품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의 품속에서 변함없는 소망의 사람,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어렵고 혼란한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희망의 등대, 진리의 등불들이 되게 하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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