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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켜 있더라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1799 추천 수 0 2008.12.05 01: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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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1-18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일 설교 1997년 8월 24일 
제목:개켜 있더라
본문:요한복음 20 : 1∼18
설교:이재철 목사(주일 설교 1997년 8월 24일 )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암석을 뚫은 인공동굴이나 혹은 자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좁은 입구를 통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세 면의 벽 아래에는 돌로 쌓은 긴 의자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수의로 싸여진 죽은 사람의 시신은 그 위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는 큰 돌로 막아 언제든 여닫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시체가 완전히 썩고 나면 사람들은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넣은 뒤, 무덤의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만약 시체가 다 썩기 전에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무덤 속에는 동시에 2구 혹은 3구의 시체가 안치되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무덤은 거의 모두 한 가문이나 씨족이 대를 이어 사용하는 가족 공동묘지인 셈이었습니다.

그나마 가족 공동묘지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죽는 즉시 땅 속에 매장되어 버렸고, 흉악한 범죄자나 저주받은 자들의 시체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일반공동묘지'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장사된다는 것은 여간 부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경우에는 시신이 그냥 땅 속에 매장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흉악범으로 십자가 형에 처해졌기에 기드론 골짜기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던져져야만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41∼4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께서는 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빈민중의 빈민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장사된 일이 없는 완전 새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리마대의 거부 요셉이란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단지 자기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그와 같은 행동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아리마대 요셉때문에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죽음)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기에서 `그 죽음이 악인과 함께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완전한 의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강도와 같이 강도처럼 못 박혀 죽으실 것이란 뜻이요,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는 말은 빈민 중의 빈민이셨던 주님께서 부자의 완전한 새 무덤에 장사되실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새무덤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땅속에 매장되거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버려졌더라면 이사야의 예언은, 아니 구약성경은 거짓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아리마대 요셉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주님께서는 땅속에서 온몸에 흙을 뒤집어 쓰신 채 일어 나셨거나, 기드론 공동묘지로 부터 다른 시체의 썩은 물에 흠뻑 젖으신 채 부활하셨을 터인데,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째로 무엇보다도 아리마대 요셉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꼭두새벽처럼 주님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시신이 비천한 자처럼 땅속에 매장되었더라면 어찌 막달라 마리아가 땅을 파헤치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릴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흉악한 범죄자들의 시체가 우굴거리는 기드론 공동묘지라면, 어찌 그녀가 겁도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했기에, 다시 말해 그 속에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녀는 연약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사랑하는 주님께 자신의 새 무덤을 드릴 때 이와같이 위대한 역사가 그곳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상상치도 못할 위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는 한숨에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 말에 놀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왔을 때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수의―즉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었습니다. 이 세마포의 가치에 대하여는 이미 지난 주일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6절∼7절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단어는 `놓였다'는 동사와 `개켜 있더라'는 동사입니다.

`놓였다'는 동사 ke mai는 아무렇게나 놓여진 상태가 아니라 정돈되어 놓여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개켜 있더라'는 동사 entuliss 는 마치 붕대를 감듯 정성을 다한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 버린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와 수건만 남아 있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본문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마태복음 27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 27:57∼66)

예수님의 장례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뒤에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트릴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총독의 허가를 얻어 예수님의 무덤의 돌문을 봉인한 뒤 무장한 파수군으로 하여금 사흘동안 그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상상치도 못한 그들은, 사흘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하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부활을 예언한 예수님이야말로 허황한 사기꾼이었음이 저절로 증명되는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제일 먼저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2절)'고 말했습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한 반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가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결코 도난 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장한 군인들이 서슬퍼렇게 경비를 서고 있는 그 무덤에서 무슨 여유가 있다고 수의를 벗겨 정돈해 둔 뒤 시신만 훔쳐가겠습니까? 시간이 급한 만큼 수의가 입혀진 시신을 그대로 들고 나가는 것이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또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하는 자가 그 시신이 과연 예수님의 것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얼굴을 감싼 수건을 벗겨 보았다 치십시다. 그렇더라도 그 수건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어야지 어떻게 정성스럽게 개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예수님의 시신이 절대로 도난 당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채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와 수건이 무덤 속에 정성스럽게 개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음을 웅변하는 말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아니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을 정성스럽게 개켜놓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귀중한 증거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무덤을 자신을 위하여 마련해 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새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무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 예수님을 장사 지내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찬란한 부활의 현장이요, 영원한 부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는 그 부활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는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질서 정연하게 개켜진 세마포와 수건이었습니다. 만약 그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무질서 하였더라면 그것은 단지 무덤이었을 뿐이요, 예수님의 시신은 도난 당했음이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는 질서―그것이야말로 부활의 증거였고, 그 질서로 인해 그곳은 부활의 현장일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은 곧 질서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 아십니까?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고,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 `cosmos'가 곧 `질서'라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 신지 아십니까? 질서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의 현장에 남아 있는 부활의 증거가 바로 주님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함인지 아십니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질서를 되찾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아십니까? 이 생명의 영원한 질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 질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며 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이 질서를 생활화하고 매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질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질서 속에 빠져 있다면 설령 그의 육체가 호흡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죽은 자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생명의 질서 속에 거하고 있는 자라면, 그의 육체는 호흡이 끊어졌다 해도 그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처럼 실은 영원한 부활의 현장 속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이요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일이란 곧 하나님 앞에서 흐트러진 내 생명의 질서가 추스러지는 은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무질서한 내 삶의 혼돈(카오스)이 하나님의 코스모스(질서) 속에서 바로 세워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로 인하여 새로이 일주일 동안의 우리의 삶이 생명의 질서와 진리의 질서를 누리고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수필가이자 철학자인 아하드 하암(Ahad Haam)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 왔다기 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켜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없이 2,600년 동안이나 유랑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나라도 민족도 벌써 완전 소멸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라를 잃은지 2,600년 만에 다시 옛날의 그 땅에 이스라엘을 복원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안식일의 가치를 깨달아 철저하게 안식일을 준수하므로 하나님의 질서 속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을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질서도, 심지어는 히틀러의 광란의 무력도 그들을 영원히 쓰러트릴 수 없었음을 오늘도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도 주일을 휴일 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일주일에 한번씩 주어지는 주일을 진정 주님의 날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안식하며 주님의 질서로 자신을 바로 세우십시오. 주님의 생명의 질서가, 진리의 질서가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 이 사회 속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속에 충만케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코스모스가 되게 하십시오.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던 그곳은 찬란한 부활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설령 무덤 속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질서의 주님.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질서 속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신 주님! 오늘 우리를 주님의 질서 속에 바로 세워주시기 위해 주일을 허락해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매주 돌아오는 이 주일이 결코 휴일이 됨이 없이 언제나 질서의 주님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주일이 거듭될수록 우리의 생명 속에, 삶 속에 주님의 질서가, 생명의 질서가, 진리의 질서가 충만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던 우리의 삶이, 우리로 인하여 우리가 있는 그곳이, 새 생명의 역사가 질서 정연하게 일어나는 영원한 부활의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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