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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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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란 책의 저자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STEPHEN R. COVEY는, 새로 출간된 <첫 번째 것들을 제일 먼저(First things First)>란 명상록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바른 일 행키 원할 수 있고, 또 그 일을 바른 명분으로 행하기를 소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바른 원칙을 지니고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손으로 벽을 치는 것처럼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옳고 바르다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셨겠습니까?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릇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범죄자들마저도 자기 나름대로 정당한 명분과 이유를 다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스스로 자신은 옳고 바르다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사회는 정의롭지 못합니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으면 다 자신은 옳고 바르다 주장함에도 왜 이 사회에는 오히려 불의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COVEY의 지적처럼 바른 원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나치를 보십시오. 그들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킬 때 그들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그들은 정당한 사유를 갖고 있었고, 독일 신학자와 교회는 그 명분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인류적 범죄 집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바른 원칙을 갖고 있지를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지니고 적용했던 게르만적 원칙이란 그릇된 야망과 폭력의 원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거짓된 원칙으로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른 일을 바른 명분으로 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바른 원칙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바른 원칙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진리입니다. 진리로 이 땅에 오시어 진리의 원칙을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바른 원칙이 없을 때 내가 무엇을 행하던 그것은 만행일 수 있고,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어도 실은 나치군과 다를 바 없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마음 자세가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그때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본문2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후 주님과 갖는 첫대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여전히 부족하지만, 여전히 문제 덩어리이지만, 그러나 계속하여 주님의 제자로 중용 하시고 변함없이 신뢰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이었음은, 이미 지난주일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위대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혜였습니다. 그 큰사랑과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 그 이후 복음 증거의 현장으로 주저 없이 나아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아무 원칙도 없이 자기 신념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그냥 마구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을 해치는 무서운 이기 집단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께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원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가는 것이, 제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여주셨던 진리의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삶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진리의 삶, 참 생명의 삶, 영원한 구원과 사랑의 삶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하여 만방에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이후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주님 안에 감추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습니다.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원칙에 투철하였습니다.그결과 그들을 통하여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원칙에 충실치 않았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 할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BC에서 AD로 전환되는 대변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칙이 없는 곳에 남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뿐이고, 인간의 이기심과 이기심이 부딪히는 곳에는 그 열정의 도가 심할수록,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오늘날의 정치 판에서 보듯, 끝없는 다툼과 분열로 귀결되어 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주님의 말씀은 2천년전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2천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과 생명 그리고 진리를 이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삶의 현장에 보내어진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가지―우리의 삶이 반드시 지켜야 할 바른 원칙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로써 삶의 현장에서 보여야 할 원칙을 적용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던 삶은 한마디로 어떤 모습이습니까?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할 수 있듯이 우리는 그 해답을 성령의 열매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2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 성령의 열매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실천하신 삶의 모습이요,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원칙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요,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으로, 그 분의 희락으로, 그 분의 화평으로, 그 분의 오래 참음으로, 그 분의 자비로, 그 분의 양선으로, 그 분의 충성으로, 그 분의 온유로, 그 분의 절제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진리와 복음은 절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소홀한 것 또한 이것입니다. 그 결과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실현되어져야 할 이 원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서 결여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바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그 원칙을 실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즉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하찮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은 신에게 수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빈민촌 나사렛에서 비천한 목수일을 하신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일 수 있겠으나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단 한 번도 수치로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손에 의해 벌거 벗기운채 못 박혀 죽으신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독일 수 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런 것을 부끄러워 하셨다면 우리같이 가난하고 죄많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온유와 절제 등을 결코 보여 주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자로서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시는 한, 성육신이나 가난이나 고난은 자랑일망정 전혀 부끄러움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교묘한 술책으로 주님을 유혹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향하시는 주님 앞을 가로막는 수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단호히 질책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분을 통하여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며,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참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시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우둔하셨다면, 이와 같은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그 분을 통해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원칙을 어떻게 쉽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언제나 당당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늘 민감한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삶의 원칙입니다.
가끔 작은차 타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을 볼수 있습니다. 간혹 작은 평수의 아파트나 상대적으로 작은 수입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따금 병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써 간곡히 말씀 드립니다. 그런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결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정직하고 진실되이 산 결과가 가난이요 육체의 연약함이라면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뇌물이요, 탈세요, 불의요, 까닭 없는 분노요, 무절제한 탐욕이요, 무분별한 이기심이요, 이유 없는 분열이요, 끝없는 다툼이요, 진리에서 벗어난 거짓된 삶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보다 더 큰 수치는 없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엡 5:11-12)
정말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부끄러운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치 않을지 모르나, 오히려 그 부끄러운 것들로 더욱 큰소리치며 살지 모르나, 주님 앞에서는 반드시 수치를 당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인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자신을 갖게 되고, 다시 오시는 그 분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Ⅰ요 2:28)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아니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주 조천 초등하교 6학년생인 안현숙양이 <우리 아빠>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동시를 썼습니다.
다섯 여섯 살적엔가
처음 알았다
아빠가 말을 못하신다는 것을
어디엔가 갈 때면
초라한 츄리닝을 입고
한마디 말도 못하시는 아빠가
정말 싫었다
그런데……
내가 손을 크게 다쳤을 때
정신없이 츄리닝을 입고
나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신 아빠
말은 못하고
아빠 등 뒤에서
엉엉 울어 버렸다
아빠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나를 책임져줄 아빠가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빠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겨우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벌써 깨달았으니 이 소녀는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만약 소녀가 자신의 잘못을 수십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깨닫고 땅을 치며 통곡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가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움과 부끄럽지 아니한 것을 구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 같이, 우리 삶의 현장으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입니다. 한알의 밀알은 지극히 작으나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바른 원칙이 없었음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했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오히려 당당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바르게 구별하는 자 되므로 이 다음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참다운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이요 소금 되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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