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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2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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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
본문 24절로 25절 상반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열두제자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문들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 한가운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사흘 전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시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들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제자들로서는 실로 황홀하기 그지없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왠 영문인지 그 역사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만은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도마를 만난 제자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던 자들에게는 그 한마디 외에 따로 더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의 이 외침과 똑같은 외침을 이미 이날 새벽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날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첫증인의 영광을 얻습니다. 그 직후 그녀가 무엇을 했었는지를 본장 18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그녀는 그 길로 예수님의 제자를 향하여 달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외침은 똑같이 `주님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았다'는 동사 `horao'는 얼핏보거나 스쳐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친한 친구를 우연히 만날 때, 그 친구의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찬찬히 뜯어 본 뒤에야 친구임을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척 보는 순간에 아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은 그날 처음 주님을 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도록 주님을 따라 다녔기에 주님을 뵙는 순간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목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 장사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대 그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그들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죽음을 이기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보았던 것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진리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일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참된 길,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는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만 죄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게 하는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주의 깊게 뵈면서 평소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나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외친 그 외침의 참된 뜻은 `주님이시야 말로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길이시요, 영원한 진리시요, 참 생명이심을 보았다'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 바로 도마의 고백입니다. 지난주일 함께 보았듯이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도마 역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주를 보았다'고 증언한 내용의 심오한 의미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형태상 두 가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말한 주체의 수가 달랐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한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인 단수였던데 반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외친 제자들은 다수인 복수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 말을 듣는 객체의 수가 달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할 때 그 말을 듣는 객체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의 객체는 도마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깨달음 두 가지를 얻게 됩니다.
첫째, 단 한사람이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르게 증언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반드시 열매가 수반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할 때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였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자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진리를 체험한자로써의 고독감을 혼자 씹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독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10명의 제자들이 `우리도 주를 보았다'고 증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미천한 한 여인의 신실한 증언을 발판으로 삼아 주님께서 역사 하셨을 때 그곳에는 10배의 열매가 거두어 졌던 것입니다. 자신의 증언을 조롱하던 제자들이 `우리도 주를 보았노라'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진리를 증거한 자로서의 막달라 마리아의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여기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착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는 것을 뜻합니다. 또 `피곤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포기하지 아니하면'이란 의미입니다. 진리를 증거 하는 삶을 살다가 낙심하지 말랍니다. 진리를 사는 자가 언제 낙심하게 됩니까? 나홀로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도 세상에선 불의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릴 때, 진리를 좇아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때, 아무리 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도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결코 낙심치 말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진리를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 하시매 반드시 열매 거두게 하심을 바울은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내가 주를 보았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독한 고백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고백을 거쳐, 이천년이 지난 오늘 전세계 15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하게 하기에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금 나홀로 고독하게 진리를 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와 똑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열매를 반드시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영원한 진리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이 다수에게 진리를 행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단 한사람에게 진리를 증거 하는 것 또한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주님을 증거할 때 그녀의 앞에는 11사람의 제자들이 있었고, 10명의 제자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증언할 때 그들 앞에는 단 한 명의 도마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달라 마리아보다 제자들이 행한 일이 덜 가치로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한 일이나 제자들이 한 일이나 그 가치는 동등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나머지 모든 사람의 생명의 가치와 동등한 탓입니다. 한 사람이라고 해서 생명의 절대적 가치가 감소되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생명이라고 해서 그 절대적 가치가 증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는 그 수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100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고 사라졌을 때, 주님께서는 안전한 99마리를 안전한 곳에 두고 길 잃고 헤매이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1 마리의 양의 가치와 안전한 99마리의 가치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런 분이 아니셨다면 죄악과 죽음의 길에서 방황하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친히 찾아오시는 참 구원자가 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들에게 진리를 보여 주기 위해 애쓰되, 길 잃고 헤매이는 한 사람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한 사람을 진리 안에서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세계를 진리 위에 세우는 것과 똑같은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이 두 가지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어느 누구 앞에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당신의 생명의 역사를 펼치시기 원하시는 분인 까닭입니다.
한국 축구가 `98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종합 전적 6승 1무 1패로, 1위를 차지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사람은 누가 뭐래도 차범근 감독이었습니다. 그의 용병술과 작전력은 온 국민을 열광케 했습니다. 특히 경기 전후에 그리고 우리 팀이 골을 얻었을 때 두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의 감동과 더불어 뜻밖의 비판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되었던 어느 철학자의 비판과 그에 대한 차감독의 반론은 다 그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에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 사회에서 반드시 누가 옳고 그르다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저 개인적으로는 차감독의 기도와 관련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한 가지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일 서울에서는 일본과의 2차전이 있었습니다. 그날 한국 팀은 전국민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2:0으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이 당한 유일한 패배요, 뼈아픈 1패였습니다. 저의 아쉬움이란 왜 그날 그 패배 후에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나 하는 것입니다. 왜 이겼을 때는 기도하고 골을 얻었을 때에는 기도하면서, 두골을 먹고 패배했을 때에는 바바리 코트에 두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를 피하듯 퇴장하기만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물론 홈 그라운드에서 일본에 당한 충격적인 패배였기에 감독인 그분이 가장 곤혹스러웠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날 패배 후에도 승리하던 날처럼 벤치에 앉아 두손을 모으고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경건하게 감사 기도 드렸더라면,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내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분명하게 증거할수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 드렸던 모든 승리의 기도가 더욱 가치로와 질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그분의 그 참된 신앙앞에서 그 분을 비판하던 철학자 마저 승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안타까움은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70년대에서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경제적 번영을 구가할 때, 이 땅의 교회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며 얼마나 찬양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이 나라의 경제는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사상 유래 없는 경제난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은 걱정하고 근심하는 기도만 할뿐 이 상황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습니까?
다시스로 가는 요나가 탄 배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가 폭풍에 휩싸였습니까? 주님께서 요나를 저주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물 속으로 던져졌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배에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에 폭풍이 닥쳤고, 주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는 배에서 던져졌습니다. 만약 요나가 자신의 욕망을 따라 끝내 다시스로 간다면 그는 죄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주님께서는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 속에 던져져 큰 물고기에게 삼키운 요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오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2:8∼9)
지난달 초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Takapu절벽을 가 보았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닷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이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태풍이 부는 날이어서 온 바다에 마치 사이다를 부은 것처럼 온통 하얀 파도 천지였습니다. 얼마나 태풍이 센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않으면 바람에 밀려 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절벽 바로 아래 큰 바위에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앉아 있는데 사람이 밀릴 정도의 그 강풍 속에서 그 조그만 갈매기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갈매기들은 한 마리도 예외 없이 모두 태풍이 불어오는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마리는 태풍을 가슴에 안고 날아오르며 태풍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풍에 새들이 휩쓸려 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음이 생각났습니다. 태풍이 몰아쳐 집채가 날아가도 새들은 끄떡없답니다. 그 비결은 태풍을 마주보는 것이랍니다. 태풍을 마주보는 한 절대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태풍이 새들의 날개쪽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그러나 만약 태풍을 피하기 위하여 바람 부는 쪽을 향해 엉덩이를 갖다 대면 영락없이 휩쓸려 버리고 만답니다. 저는 태풍 속에서 쓰러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태풍을 마주보며 태풍을 즐기고 있는 갈매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칙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이 나라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 나라가 폭풍과 태풍 속에 휩싸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저주하셨기 때문에 이 가혹한 경제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결단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민족을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이 나라를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이 민족은 필경은 부정과 부패, 타락과 방종, 교만과 허세 속에서 영원히 몰락해 버리고 말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태풍을 피하려 하지 마십시다. 태풍을 정면으로 마주 보십시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 태풍을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이 폭풍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이 폭풍 속에서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고 세울 것은 바로 세우므로, 이 민족이 영원히 살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음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 합시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진리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한 이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오늘 우리를 통해, 아무렇게라도 잘 살기만 하려는 그릇된 나라로부터 바르게 사는 바른 나라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해 이 태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이 아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태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 태풍을 피하려다 쓰러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태풍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게 해 주옵소서. 이 태풍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이 태풍을 가슴으로 안고 진리안에서 비상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태풍 속에서 이 민족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으로 이 민족에게 보이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진리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태풍이 이 민족과 나라를 바로 세워주는 생명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되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한낱 미물에 불과한 갈매기보다 못한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중심을 붙들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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